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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베드로의 사순절 (마 26:6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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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사순절 (마 26:69~75)


오늘은 베드로가 사순절 기간을 어떻게 보냈는가를 우리가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금 온 세계 모든 기독교인들은 베드로를 열 두 사도 중에 가장 훌륭했던 수제자라고 인정을 합니다. 이것은 동방정교회도 로마 가톨릭도 개신교도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가톨릭교회가 가장 큰 존경으로 베드로를 대우합니다. 바티칸에 가면 세계에서 제일 큰 성당이 있는데 그 성당의 이름을 ‘베드로 성당’이라고 했으며 그 성당의 입구에는 거대한 베드로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베드로의 손에는 천국 열쇠가 쥐어져 있습니다. 이 베드로 동상은 약간 고개를 숙인 듯 한 모습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베드로의 시선이 아래쪽을 향하도록 만들어져 있는데 성당을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있다는 뜻으로 약간 고개를 숙인 자세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또한 이 가톨릭교회가 가지고 있는 교회 조직은 1인 감독 제도입니다. 그러니까 온 세계 교회 최고의 감독 기관이 있어서 그 감독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는 교회 제도입니다. 그 절대 명령자가 교황인데 제1대 교황을 베드로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 신자들은 금요일에는 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그런 말이 없습니다. 교황청에서 먹지 말라고 명령해서 전 세계가 그렇게 지키는 것입니다. 외국의 가톨릭 마을에 우리 한국인들이 햄버거 장사를 하는데 금요일에는 장사가 잘 안 됩니다. 왜냐하면 고기를 안 먹으니까 사러 오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가톨릭교회는 금요일에 고기 안 먹는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교황이 한국은 먹어도 된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왜 교황이 한국은 고기를 먹어도 된다고 했느냐? 1950년에 교황이 명령을 했는데 그때 한국이 빈민국이었습니다. 1년 내내 고기를 못 먹어보다가 금요일에 이웃집에 잔치가 있어서 고기 한 점 먹으러 갔는데 금요일인 겁니다. 그래서 “그것도 못 먹어서 되겠느냐? 못 사는 한국인들은 금요일에 고기 먹게 해준다.” 교황이 특명을 내려주었기 때문에 한국은 금요일에 고기 먹지 말라는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외국에는 금요일에 고기를 먹지 않는 문화가 아주 심합니다. 지금은 변했는지 모르지만 각 성당의 본당 신부님들 설교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에서 이렇게 설교하라고 시키는 대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교황의 명령은 전 세계 누구도 거역하지 못하도록 1인 감독 제도의 체제로 전 세계 가톨릭교회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개신교처럼 신부님과 교인간의 마찰이 생겨서 교회가 분열하는 것이 없습니다. 제도 때문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가톨릭교회가 아닙니다. 절대 명령 기관이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됩니다. 

과거에 어떤 모르는 분이 저에게 찾아오셔서 자기 딸의 결혼 주례를 부탁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누구신데 저는 알지도 못하는데 결혼 주례를 부탁하시는 겁니까?” “목사님! 저는 장로입니다.” “장로이시면 담임목사님께 부탁하시지 왜 저한테 부탁하십니까?” “저는 지금 다니는 교회가 없습니다.” “장로가 다니는 교회가 없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쫓겨난 장로입니다. 자세한 말씀은 나중에 드릴 테니 제발 제 딸 시집가는데 주례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딸 시집보낸다니까 부탁을 들어드린 적이 있습니다. 

결혼식 끝나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교회에서 열심히 장로 일을 하다가 교회 재정을 맡아서 재정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과 항상 문제가 생겨서 제가 그 교회를 나와 버렸습니다.” “목사님과 무슨 문제가 생겼습니까?” 제가 경험하는 거지만 우리 목회자들은 교회 헌금을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인 선교와 교육에 헌금 들어오는 대로 빨리 빨리 투자하고 싶습니다. 쌓아두지 말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돈이 많다면 시험 거리나 생기니 빨리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에 선교비를 보냅니다. 저 같은 사람은 마이너스 통장 꺼내서 선교비를 보내는데 그것이 목사들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성서적이라고, 하나님 기뻐하실 일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제가 40년 이상 경험했지만 장로들은 될 수 있는 한 지출을 안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지출할 때마다 마찰이 생깁니다. 교회 싸움은 항상 거기서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분이 장로교 목사들 보기 싫어서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셨답니다. 거기 가서도 열심히 일했더니 거기서도 재정 일을 맡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가톨릭교회에서 보니까 신부는 장로교 목사보다 훨씬 더 하더랍니다. 그 신부는 구제 활동에 헌금을 모두 보내는 겁니다. 그러니 돈이 항상 없잖아요? 재정 맡은 장로는 그것이 속상했던 겁니다. 돈이 모일만 하면 다 쓰고 또 모일만 하면 다 쓰고…. 그런데 신부는 빨리 하나님 사업에 쓰면 되지 돈을 모아둬서 뭐하느냐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안 되겠다. 문제 좀 삼아야겠다.’ 생각하고 교구청에 투서를 한 겁니다. “우리 교회 신부가 이렇게 재정을 날마다 구제금 명목으로 다 씁니다.” 곧바로 답장이 왔습니다. 

“본 당 신부의 권한이요. 당신은 누구인데 건방지게 교구청에 투서를 보냈소?” 막 책망하는 답장이 왔는데, 그 소문이 퍼져서 성당에 나가니까 신자들이 “당신 어디서 하던 버릇을 여기서 하느냐?” 마귀같이 취급을 해서 쫓겨났다는 겁니다. 그 분은 성당 체제, 제도를 모르셨던 겁니다. 1인 감독제도 성당은 상부의 명령대로 움직입니다. 그분들이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알고 있으니까 우리는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이것저것 참견할 필요가 없다는 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이 저한테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관심을 보여서 제가 농담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오지 마세요.” 

베드로의 장점과 단점이 성경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성격은 충동적이고 변덕스럽고 실패하기 쉬운 성격입니다. 게다가 흥분도 아주 잘합니다.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나도 걷게 하소서.” 하고 바다 위를 풍덩 들어갔잖아요? 감격도 빠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런 양면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름이 세 가지로 나옵니다. 베드로, 시몬, 게바입니다. 그런데 유대 나라는 셈족어, 아람어, 희랍어 세 가지 공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름이 여러 가지로 나오는 사람이 많습니다. 

지금 복음서를 보면 사복음서가 다 열두 제자 이름을 기록할 때 언제나 베드로가 첫 번째로 나옵니다. 가룟 유다가 언제나 꼴찌로 나옵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서 베드로가 수제자 분위기를 주고 있는 것이 정확합니다. 살로메가 자기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예수님 앞에 나타났잖아요? 살로메는 예수님의 이모요 예수님을 위해서 돈도 제일 많이 쓰고 친척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당신의 나라 임하실 때 나의 두 아들을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소서.” 이 부탁을 예수님께 왜 했는지 아세요? 베드로를 견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예수님의 마음속에 베드로가 제일 많이 들어가 있는 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도 예수님이 제일 좋아하셨잖아요? “천국 열쇠를 네게 주겠다.” 천국 열쇠를 주셨잖아요?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열두 제자 가운데 베드로에게 영적 권위를 주셨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을 앓고 있다고 소식을 들으니까 금방 좇아 심방 가셔서 그 자리에서 고쳐주셨습니다. 

아무래도 예수님이 베드로를 제일 훌륭한 리더로 인정하신 것 같습니다. 상식적 판단을 해봐도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를 디베랴 바닷가에서 1대1로 만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십니다. 마치 이 말은 “나는 너 없이 못산다.”와 같은 이런 심각한 질문을 두 사람이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 중에 베드로와 안드레가 형제이고 야고보와 요한이 형제라서 지금 이 열두 사도 공동체는 벌써 은연중에 계파 정치가 생긴 겁니다. 이 두 계파가 신경 썼던 것은 매우 중요한 주님의 특별한 일에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만 부르셨습니다. 

변화산 신비의 사건 때 보십시오. 높은 산에 올라가서 수백 년 전에 하늘나라에 간 엘리야와 모세가 예수님과 이야기하는 장면을 육안의 눈으로 보는 신비 사건에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 초대 되었잖아요? 세 사람 밖에 못 보았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회생시키셨을 때 회당장은 유대 사회의 큰 권세 가문입니다. 그 권세 가문의 집에 가서 죽어있는 딸을 살리는 것은 그 사회에서 큰 영광 받을 일로 취급이 되는데 그 자리에도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들어가셨습니다. 마지막 겟세마네 마지막 기도 모임 때는 주님이 최고 고통스러운 시간인데 그 고통의 시간에 위로의 대상으로 세 사람인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아마 다른 제자들이 질투할 만큼 편애가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보이지 않는 라이벌이 형성되어 있어서 어머니가 나서서 예수님께 그런 부탁까지 한 것입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신경전을 벌이고 급기야 그것이 표면화 되어서 계파 양성인 내분을 일으킬 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들은 지금 이방인의 집권자들처럼 권세를 부리고 사람을 임의로 주관하고 싶어서 그러느냐?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으니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라.” 이런 말씀을 하신 겁니다. 

베드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지금까지 훌륭한 위치를 지켜오다가 사순절 기간에 추악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수차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나는 고난을 받게 되고 죽임을 당할 것이다.” 베드로는 의미조차 모릅니다. 예수님의 진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베드로가 정말 그 십자가 사건이 닥쳐오니까 준비가 안 된 모습으로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고 만 겁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고 도망가고 말 것이다.” 그때에 제자들은 말했습니다. “죽을지언정 그런 일은 하지 않겠나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까지 자신이 차지했던 열 두 사도 중에서의 훌륭한 위치를 사순절 기간에 가장 멋지게 영적 권위를 나타낼 수 있는 기회가 왔으나 그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사순절 기간을 가장 비겁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모든 일에 전면에 나타났던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얼굴 감추기에 몰입하게 됩니다. 참 이상한 일이 벌어졌는데 3년 동안 예수님의 평소 사역에 전면에 나타났던 예수님의 열 두 사도들은 정말 도와야 할 때가 되니까 없어져 버리고 지금까지 잘 나타나지 아니하던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니고데모,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 앞에 나타났는데 그때 제자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몰약을 100근이나 가지고 와서 세마포로 싸서 아주 신중하게 예수님의 장례식을 다 치렀는데 그와 같은 일은 당연히 열 두 사도가 나타나서 해야 되는데 한명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던 제자들이 어려운 일을 다 치렀습니다. 열두 사도는 지금까지 예수의 영광스러운 사역만 좋아했다는 겁니다. 그때마다 전면에 나섰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보십시오. 현대 21세기 과학으로도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질병들을 예수님이 현장 치료해 주니까 사람이 수천 명씩 몰려왔습니다. 

그때 그 앞에서 교통정리를 하고 “다음은 네 차례! 다음은 네 차례!” 예수님을 만나는 순번을 정하던 사람들이 제자들입니다. 사람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청을 합니다. “제발 예수님 좀 오늘 만나게 해주세요.” 너무 바쁘시니까 함부로 만나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것이 너무나 자랑스러웠습니다. 오병이어 떡을 나눠줄 때는 얼마나 권위가 있었습니까? 그야말로 어깨에 힘을 주고 당당했습니다. 예루살렘 올라갈 때는 예루살렘 시민이 다 몰려나와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호산나”를 부를 때 예수님 곁에서 어깨를 펴고 예수님을 호위하며 가는 제자들은 얼마나 영광스러웠겠습니까? 세상이 뒤집히는 듯 했습니다. 

그렇게 전면에 영광스럽고 자랑스럽게 나타나던 열 두 사도는 예수님의 수난이 오니까 없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꼬리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을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여기서 “비로소”라는 말은 “처음”이라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일종의 폭탄선언을 듣고 충격을 받기 시작하는데 이 사건에도 충동적 베드로가 제일 먼저 반응을 했습니다. 

22절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여기서 “항변”이라는 말은 “항의”라는 말입니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절대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이 항변 속에는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고난이 걱정이 된 것입니다. “만약 지금 말씀하신 그대로 주님이 죽으신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나 같은 사람은 이제 온 나라 사람들에게 얼굴이 팔렸습니다. 예수의 수제자 명함이 얼굴에 붙었습니다.” 영광에 정 반대 선언을 하시는 예수님이 미워졌습니다. 그래서 항변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어떤 답변을 했습니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개인적으로 예수님에게 마귀, 사탄이라고 책망 들은 사람은 가룟 유다와 베드로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주님의 제자로 열심히 사는데 만약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1대1 시선을 마주치면서 “사탄아! 물러가라!” 하신다면 여러분은 기분이 어떠시겠어요? 아마 그 말은 예수 믿는 사람이 가장 듣기 싫은 치욕적 책망이 될 것입니다. 

이때부터 베드로는 마음에 부담이 왔습니다.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나는 사탄인가?’ 그리고 심상치 않게 다가오는 어떤 분위기가 느낌을 주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그때부터 차츰차츰 예수와 거리를 두는 마음을 가지다가 오늘 말씀에 와서는 급기야 최고의 소극적 자세가 되어 버리고 예수님과 마침내 절교를 선언했습니다.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여기 여종은 남의 집 심부름 정도 하는 노예 신분의 보잘 것 없는 소녀를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베드로가 당시 얼마나 얼굴이 많이 알려져 있었는가 증명이 됩니다. 누구나 알아보는 얼굴이 되어 버렸습니다. 여기서도 확실히 나타나는 지방색이 있습니다.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유다 사람이 아니잖아? 갈릴리에서 혁명 같은 것을 조직한 것이다.” 베드로가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영어 성경 쓰는 사람은 “I don't know. What are you talking about?” 이 말은 관용어가 되어서 영어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은 아주 자주 씁니다. “영문을 모르는 말을 내게 하도다.”라는 뜻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예수와의 관계를 “나는 그 사람과 영문도 모르는 관계다.” 절교해 버렸습니다. 그 다음 구절을 보면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또 말을 합니다. “이 사람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틀림없다.” ‘나사렛’을 강조하잖아요? “너는 유대 사람이 아니잖아? 나사렛 일당이지?” 참 유명해 지기는 했습니다. 존재도 없는 여종들에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알려진 얼굴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사역의 표면에 나섰기 때문에 알려진 겁니다. 베드로는 이제 당황해서 갈 길을 잃어버립니다.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그런데 세 번째 사건이 또 터집니다.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여기서 “도당”이라는 표현은 개역개정 성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개역한글 성경에는 그냥 “당”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정치적 색깔 표현입니다. “너는 예수를 앞세우는 갈릴리 정당의 대변인이잖아? 왜 유대에 와서 딴소리를 하는 거냐?” 베드로는 이제 어쩔 줄 모르게 됐습니다. ‘아! 죽어야 되는구나.’ “네 말소리는 너희들이 쓰는 갈릴리 지방의 전형적 악센트가 있는 지방 사투리를 계속 쓰고 있으면서 왜 유대 사람인척 하는 거야?” 큰일 났습니다. 그래서 저주까지 했다고 합니다.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이것이 베드로의 사순절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통곡의 사순절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단 한 가지 여기서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성격적으로 충동적이라서 회개도 빨랐습니다. 베드로는 닭소리를 듣자마자 금방 통곡할 수 있었기 때문에 회복의 가능성이 생겼고 가룟 유다는 자존심을 버리고 자리를 뛰쳐나감으로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새벽기도 때 이 설교를 한번 했는데 제가 노회장을 볼 때가 있었습니다. 어떤 교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목사님은 “나 이 교회를 탈퇴하겠다.” 막 말렸습니다. 

“뭘 그것 가지고 기분 나쁘게 생각하느냐?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지.” “아니다. 잘 먹고 잘 사시오.” 우리는 가서 말리고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결국 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한 1년이나 되었을까요? 다시 들어오겠다는 겁니다. 받아주겠습니까? 저도 화가 나 있는데다가 위원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말리고 얼마나 권유했습니까? 이제 와서 또 들어오겠다니! 그 사람 절대 받아주어서는 안됩니다.” 막 여기에 대해서 토론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누구도 안받아줄 분위기였는데 흑인 할머니 위원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 분이 일어나셔서 딱 한마디 하는 것을 누구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주었습니다. “하나님은 탕자도 받아주셨습니다. 목사가 다시 들어와서 목회 잘 하겠다는데 목사가 목사를 안받아주면 누구를 받아줍니까?” 아무 소리도 못하고 받아주었습니다. 가룟 유다도 십자가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일지라도 주님을 찾아와서 회개했다면 주님은 넉넉히 받아주셨을 것이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도 말 한마디 듣고 예수님이 용서하고 낙원으로 데리고 가셨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까지 가룟 유다는 안 나타났습니다. 

베드로 사순절에 가장 큰 교훈은 무엇인가? 이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약속하는 베드로의 모습과 자신이 약속한 것을 지켜내지 못한 베드로! 예수님이 수난을 예고할 때마다 베드로가 제일 먼저 나서서 약속 선언을 했습니다. 그 말씀 기록을 보면 “베드로가 먼저 말하고 다른 제자들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말이 무엇입니까? “나는 주와 같이 죽을지언정 주를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마 베드로의 약속은 정말 주님의 마음에 최고의 보람과 기쁨을 주는 제자의 결단 선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백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 성경에 서원이라는 단어를 많이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하는 모든 약속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8장에 “야곱이 돌기둥을 세우고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과 약속하는 겁니다. 민수기 21장에 민족 서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서원하여 가로되 우리 민족은 이렇게 하겠나이다.” 그래서 나실인의 서원을 하는 사람, 제물 서원하는 사람, 온갖 종류의 서원 신앙 문화가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서원은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 야곱의 서원을 보세요. 

하나님은 지키시는데 야곱은 안 지킵니다. “내가 가는 이 길에서 하나님이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십시오.” “그래라. 너는 뭐하겠니?” 서원은 상대적으로 하는 겁니다. “나도 하나님을 위해서 십일조를 하고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겠나이다.” 그런데 야곱은 하지 않았습니다. 거기 보면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야곱에게 풍부하게 지켜졌는지 야곱이 먹을 것, 입을 것을 위해서 기도하더니 엄청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해서 서원을 안 지키더니 다 간 곳이 없어지고 먹을 것조차 없어져서 야곱의 대식구가 애굽에 식량 구하러 가게 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모두 기억하는 삼손은 나실인의 서원을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천하무적의 힘을 그에게 주셨잖아요? 그가 그 약속을 지켜내지 못했을 때 그 힘은 순식간에 없어집니다. 저도 하나님과 서원한 사람입니다. “내 생명과 건강을 지켜주시는 시간까지 내 인생의 마지막 부분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 땅에 전하겠습니다. 틀림없이 서원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지켜왔고 지켜가는 날을 하나님이 지금까지 도와주시고 만약 내가 그 서원을 스스로 파약하고 이 길을 떠날 때는 하나님도 나를 떠나실 겁니다. 그래서 저는 대통령 같은 것은 시켜주지도 않겠지만 하라고 그래도 안합니다. 

하나님과 서원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통곡이 뭡니까? 자신이 약속한 것을 자신이 파기한 인격 파멸의 심리적 고통을 이기지 못해서 우는 겁니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어? 이게 뭐야? 왜 내가 주님을 저주해야 돼? 어떡하지?’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서원은 절대 함부로 하지 마시고 서원한 것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될 때는 상담을 하시고 절대 충분한 서원을 했다면 지키셔야 합니다. 사순절은 주님과 나의 관계성을 새롭게 하는 기간입니다. ‘내가 서원을 파약하고 사는 것은 없는가?’ 

사실 우리가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앙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환경의 변화를 따라 퇴색하여 간다는 것을 인정을 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시면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주님이 하신 말씀 “네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느니라.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본래 나와의 모습이 그게 아니지 않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유명한 유머 작가 루크호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약 열두 사도가 지금 21세기까지 살아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느 날 마가의 다락방에 기도회를 하니까 모이라고 했는데 그때는 120명이 모였는데 열두 명 밖에 안모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 어디 갔느냐? 왜 안 왔느냐?” “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닷가 제일 경치 좋은 곳에 별장을 사서 가족과 함께 주말여행 중입니다.” “그랬구나. 안드레는 어디 갔느냐?” “안드레는 어제 늦게까지 파티에 참석하고 와서 지금까지 자고 있습니다.” “그렇게 됐구나. 마태는 어떻게 됐느냐?” “네, 출세했습니다. 

국세청장이 되어서 세금 감사가 너무 바빠서 기도회에 못 왔습니다.” “그랬구나. 그러면 요한은 뭐하느냐?” “네, 수능시험 공부하느라고 도서관에 갔습니다.” “야고보는?” “오늘 골프 토너먼트 때문에 못 왔습니다.” “가룟 유다는 어떻게 됐느냐?” “공금 횡령죄로 검찰에 불려갔습니다.” 변질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오셨다가 다음에 오겠다고 메시지만 남기고 가셨답니다. 사순절이 뭡니까? 내 신앙의 점검 기간입니다. “나는 지금 주님과의 관계성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내 생활 우선순위를 어디다 두고 내가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는가?” 그것을 점검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모습을 보고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사순절에 영적 승리가 이루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은 마음이 수시로 변하여 유다나 베드로를 책망할 수 없을 만큼 저희 자신의 신앙의 퇴색을 인정합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 주님의 여러 제자들을 조명하면서 우리 삶의 우선 선택권이 어디 있는가 바라보는 영적 회복의 사순절이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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