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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십자가, 십자가 (눅 23:3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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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십자가 (눅 23:34~43)


십자가는 사형틀이다. 사형수가 노출, 질식, 혈액 손실로 사망할 때까지 그를 붙들어 매놓는 나무 교수대였다. 십자가 사형틀은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죄수를 처벌하는 도구였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는 사람들에게 수치의 상징이다.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에 매어달린다는 것은 저주의 상징이다. 사람답게 살지 못한 자로 낙인 찍히는 흉악범의 상징이다. 따라서 내 가족이 십자가 형을 받는다면 부끄러워서 그 앞에 나설 수 없다. 모른 척 외면하는 길 밖에 없다. 

오늘 본문을 보라.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가 어떤 취급을 받는가?

1. 십자가가 구경거리로 취급된다. (눅23:35)

눅23: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십자가가 백성들에게 볼거리가 되었다. 여기서 구경이란 말은 흥미를 가지고 본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해 용서하고 기도하는데 그 거룩한 현장을 볼거리로 삼아 우두커니 서서 구경하고 있다. 

2. 십자가가 비웃음거리로 취급된다. (눅23:35中)

눅23:35中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라고 한다. 비웃는다는 것은 업신여긴다는 말로 제 까짓 것이 그리스도가 아니면서 구원자 행세를 했으니 자기 자신이나 구원하라는 것이다. 십자가는 안타깝게도 비웃음의 대상이었다. 

3. 십자가가 희롱의 대상으로 취급된다. (눅23:36)

눅23:36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눅23:37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라고 하였다. 군인은 왕을 위해 존재한다. 왕께 충성한다. 하지만 군인들이 예수가 왕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에 예수를 놀려댄다. 십자가가 희롱의 대상이 되었다.

4. 십자가가 비방거리로 취급된다. (눅23:39)

눅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골고다 해골의 언덕에는 세 개의 십자가가 세워졌다. 하나는 예수의 십자가, 두 개는 행악자의 십자가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 중 하나가 예수를 향해 ‘너도 구원하고 우리도 구원해달라.’고 비방한다. 비방은 헐뜯어서 좋지 않게 말한다는 뜻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 그분은 그리스도다. 유대인의 왕이다. 자기를 못 박은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비는 거룩한 중보기도의 사랑이다. 그러나 행악을 저지른 이 사람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사형수로 본다. 십자가에서 예수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기도를 하고 어떤 괴롭힘을 당했어도 십자가는 나무 토막의 사형틀일 뿐이다. 그래서 헐뜯는 비방의 말을 한다. 

하지만 오늘 본문이 전해주려는 십자가는 나무 토막이 아니다. 강도가 비방을 하지만 그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한 사람을 향한 구원의 자리이다. 여기 십자가에서 달려 죽어가고 있는 행악자 중 또 한 사람, 그는 달랐다.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죄인으로 보지 않았다. 눅23: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여기 행악자의 다른 모습이 있다.

첫째,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의인으로 고백한다. (눅23:41下)

모든 세상 사람들이 다 예수를 죄인이라고 말을 해도 행악자는 예수가 옳다고 고백한다. 예수가 죄인이기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니라 의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것이 행악자의 믿음이다.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예수가 죄 지은 사람이 아니고 죄 없이 죄짐을 지고 십자가에 매달렸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거기에 믿음이 담겨 있고 고백에 따르는 구원이 담겨 있다. 

히4:14下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라고 말하면서 히4:15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가리켜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하신다.

죄 없는 분의 죽음. 의인이 고난 받는 죽음. 그것을 믿었다. 그리고 그 의인이 매달린 십자가는 성경의 성취요, 예언의 성취다. 구원을 완성하는 예언의 성취다. 누가복음은 사실 십자가의 길을 계속 보여준다. 

눅2:34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예수는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된다.

눅9:22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눅9:31, 51, 12:50, 13:32~33 모두 다 십자가가 예언된다.

눅17:25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바로 십자가다. 

눅18:32~33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십자가에 매달아 못 박아 죽이는 예언들이다. 

우리는 여기서 외면을 당하신 예수, 이 세대들에게 구경거리, 비웃음거리, 희롱거리, 비방거리가 된 십자가가 구원을 가져다 준 예언의 성취임을 본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의로운 분이요, 죄 없는 분이라는 고백을 퍼뜨리는 행악자는 십자가가 죄인을 위해 대신 죽으시는 구원을 위한 사건임을 알려주고 있다.

둘째, 십자가에 달린 자신을 심판 받을 죄인으로 고백한다. (눅23:41上)

눅23:41上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십자가에 매달린 이유는 극악한 내 죄 때문이다. 예수는 의인이지만 나는 심판 받을 죄인이기에 못 박힌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사형틀이 아니다. 대신 죄를 짊어진 화목 제물의 자리다. 나의 십자가는 수치의 십자가이지만 예수가 매달린 십자가는 화목의 십자가다. 죄를 모르는 자는 구원에서 멀다. 죄를 깨닫지 못하는 자는 구원의 필요성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죄인이고 죄 때문에 죽게 되었고 죄로 인해 심판 받는 것을 아는 자는 구원을 찾아 헤맨다. 하나님과 화목해지는 길을 찾는다. 

죄에서 구원받을 길은 없는가? 그러므로 죄인임을 아는 자는 구원에 목마른 자요, 죄 없는 예수께서 매달린 십자가를 바라보게 된다.

셋째, 십자가 위에서 삶을 위탁하는 순간, 구원이 주어진다. (눅23:42~43)

행악자는 삶을 맡긴다. 주님의 십자가에 맡긴다. 눅23:42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이 때 눅23:43에서의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이 놀랍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죄인이 예수님께 삶을 위탁할 때 예수님은 구원을 제시하신다. 도대체 행악자가 낙원에 있겠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우리의 윤리와 도덕의 판단으로는 볼 때 그들은 거부당해야 한다. 낙원이 왜 약속되는가? 그러나 낙원을 허락하신다.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다. 구원은 은혜로 주어진다.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것은 사람들의 죄다. 그러나 예수는 저들을 다 용서하시고 나무에 달려 죽어 주신다. 대신 죽어 주신다. 

이것을 아는 자, 이것을 깨닫고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그동안 살아온 행함을 뛰어넘어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라고 베드로가 고백하였다.

고후5:21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도 베드로처럼 고백하였다.

낙원에 들어가는 보장을 받고 십자가에서 구원 받는 강도의 말씀은 오늘 우리 크리스챤들이 구원의 은혜를 감격해야 할 십자가 신학이다. 십자가의 능력이다. 이 십자가를 바라보면 힘이 온다. 안식이 온다. 평화가 온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언제나 양면성이 있다. 구원 얻지 못할 이들에게 십자가는 그저 나무 토막일 뿐이다. 내 삶에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나 구원을 확신하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갚을 수 없는 보화다.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다. 하지만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다.(고후1:18)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 감격한다. 십자가를 자랑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 십자가의 도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모든 것의 더하기 표다. 곱하기 표다. 거기서 회복되고 치유되고 소망을 지니고 거기서 길을 얻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십자가, 거기서 만만세를 누린다. 낙원에 가는 것이다. 천국에 이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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