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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드로의 3단계 신앙고백 (마 16: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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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3단계 신앙고백 (마 16:13~16)


인도의 무저항 독립 운동가였던 간디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거리를 걷고 있을 때 한 할머니가 길에 엎드려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간디는 발걸음을 멈추고 주머니에서 수건을 꺼내 할머니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습니다. 
할머니, 모든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지만 나에게는 손이 모자라는군요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절절히 배여 있는 이 말 한 마디는 영국의 총칼에 눌려 자유를 잃고 식민 통치하에서 고생하고 있던 인도인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가난과 질병에 고통당하며 실의와 절망에 처했던 사람들은 큰 위로와 용기를 얻어 힘차게 독립을 외쳤고 마침내 그들은 영국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간디가 아무리 능력있는 민족의 지도자라 해도 그는 고통받는 자기 동족의 모든 눈물을 닦아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손이 모자란다고 한탄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기에 충분한 손을 가지신 분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그분은 우리에게 “수고 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가 나를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사람들이 예수를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세주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은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는 소리를 전하였습니다. (마 16:14)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하는 소리를 전하였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 라고 합니다.

세례 요한은 물론 하나님이 주의 길을 예비하게 하기위해 보낸 선지자였지만 당시 사람들의 사회적, 정치적 입장에서 볼 때 불의하고 타락한 독재정권에 반대하여 정의를 외치다가 불의한 권세에 의해 희생된 민중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죽었어도 백성들의 마음에 남아있는 민중 운동가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나 예레미아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정의를 외쳤던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예수님을 세례요한이나 엘리야, 예레미아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희망 사항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에 기대하였던 세례 요한이 힘 없이 헤롯의 칼날에 죽자 민중들이 세례요한을 대신하여 예수가 민중의 지도자가 되어주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심리에서 그를 죽었던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자신에 대하여 “민중”들이 무어라고 하는가에 있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사람들에게 인기를 누리려고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정치적 야심이나 야망이 있는 사람들은 다수의 목소리에 민감합니다. 군중들이 무엇이라고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론에 귀를 기울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을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여론을 만들어 기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다수의 입에 의해 무책임하게 떠다니는 여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한 영혼 한영혼의 개인적 고백이 중요합니다. 개인적 고백에는 자신의 인격과 책임감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오늘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고백해야 합니다. 
“누가 그러더라” “목사가 그러더라” 가 아닌 “나는 이렇다” 라고 확실하게 신앙을 나타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나는 믿습니다” 라고 정했습니다. 

믿음의 고백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어야지 남이 아무리 믿어도 내가 믿지 않으면 그것은 정말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믿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물론 너희는 이 말은 제자들을 두고 한 말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죄의 고백에 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신앙고백 즉 “믿습니다 주님...”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죄를 고백한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존재일까요?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 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고백은 예수가 구주라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에 대하여 고백할 신앙 고백은 예수가 구주라는 것입니다. 

첫째 예수가 나의 구세주 이십니다. 
예수는 구세주십니다. 나에게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내가 고백한 나의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신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향하여 나의 구세주시라고 고백해야합니다. 

기독교는 윤리와 도덕의 종교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윤리와 도덕적인 교훈과 가르침이 세상의 그 어느 책과 교훈 보다도 더 많이 언급되고 가르쳐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기독교는 윤리와 도덕을 중시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럼 무엇일까요?

기독교는 예수 믿는 종교입니다. 예수가 생명의 주님이라고 전하고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예수가 인류의 죄 값 아니 나의 죄 값을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가르치고 믿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값을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하셔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하늘 보좌에 올라가셨으며 세상 끝 날에 온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 재림하실 것을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를 구주로 믿는 종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종교의식을 거행하러 교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구주로 믿고 영접하였기 때문에 그를 찬양하며 감사하며 예배하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윤리적 가르침도 중요하고 축복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가 나의 구세주 이심을 확실하게 고백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이심을 확신하십시오. 그리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나의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주님 나의 죄를 대속한 나의 구제주 이십니다. 주님 당신은 내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나에게 용서와 은총을 허락하신 나의 주님이십니다.”
이 고백을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사람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왜냐면 롬10:10-11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고 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을 때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1차원적인 신앙고백일 뿐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구세주(구출자)로 고백할 뿐 아니라 주님(주인)으로 받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을 그분을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것과 그분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받아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처음 예수를 믿고 그분을 구세주로 고백했다면 그 다음 단계는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는 겁니다. 주라는 말은 주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가 나의 삶의 현장에 주인이 되게 합시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신자들 중에도 아직 온전히 성숙하지 못한 세 종류의 신자들이 있습니다. 
내가 나의 주인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나의 주인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헛된 것에 매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두 주인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눅 16:1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우리는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세상이 나의 주인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두 주인을 섬겨서도 안 됩니다. 오직 예수가 나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C.S.루이스는 “천국을 지향하면 세상을 덤으로 얻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지향하면 둘 다 잃을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아니라 천국을 목적하고 얻어야 합니다. 미련한 사람은 둘 다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두 주인을 섬기면 두 주인에게서 배반을 당합니다. 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여러분 인생의 주인으로 선택하고 그분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인이 아닌 잠간 다녀가는 손님처럼 섬겨서는 안됩니다. 
주인으로 오신 예수님이라는 제목의 글을 소개합니다. 

언제부터인가 당신은 나의 집에 오셨습니다. 처음엔 손님으로 오셨습니다. 나중엔 주인으로 오셨습니다. 손님으로 오셨을 땐 불편했지만 주인으로 오셨을 땐 기쁨이었습니다
조그만 집에는 당신을 위하여 향긋한 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노래와 찬미의 시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꽃과 벌과 새들의 향연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랑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바칠 무한한 사랑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나의 집은 당신이 잠깐 머물다 가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당신이 잠깐 쉬다 가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한번 오시면 영원히 떠날 수 없는 곳입니다. 가시라 해도 가실수 없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달콤한 밀어가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집은 당신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집은 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당신과 내가 사는 우리들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당신이 숨쉬고 내가 숨쉬는 우리들의 호흡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집은 당신의 집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습니까? 
그렇다면 이젠 예수님을 여러분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고 모시고 고백해야 합니다. “주여 당신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개 한 마리가 두 사람을 따라가는 상황에서 그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가는 동안에는 그 개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갈림길에 이르러서 한 사람은 이 길로 또 다른 사람은 저 길로 갈 때, 바로 그때 당신은 그 개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한 사람이 세상적이기도 하고 신앙 고백을 하기도 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주인이 하나님인지 그렇지 않으면 세상인지를 알아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갈림길에 이르기까지 기다리면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길로 부르시고 세상은 저 길로 부를 때, 그 사람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면 그는 세상 쪽을 버리고 신앙을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주인이 세상이라면 그는 하나님과 양심과 신앙을 버리고 세상과 욕심을 따를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부터 이렇게 고백합시다. 
예수님은 나의 생명의 구주 이십다. 예수님은 나의 주인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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