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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 (마 20: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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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 (마 20:17~28)
  

이 시간,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를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때는 유대인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을 며칠 앞둔 때였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지난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애굽 왕 바로에게 보내셔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내보내라”고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로가 듣지 아니하고 더욱 더 이스라엘 자손을 학대하자 하나님께서는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셔서 바로와 애굽 사람들을 벌하셨습니다. 이 때 맨 마지막에 내리신 재앙이 장자가 죽는 재앙이었습니다. 위로 바로의 장자로부터 아래로 여종의 장자에 이르기까지 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이스라엘 자손의 집은 피해 갔습니다. 그것은 미리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발랐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이르러 문에 피가 칠해진 것을 보고는 그 집을 건너갔던 것입니다. 유월(逾越, Passover)이란 ‘지나간다’는 뜻입니다. 죽음이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피하여 지나간 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바로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이 되면 유대인 가운데 만 13세 이상의 남자들은 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절기를 지키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어디를 가나 유월절을 지내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이번 예루살렘 행은 예전의 유월절과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이에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기를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 것을 싫어합니다. 아무리 살기가 어려워도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죽을 것을, 그것도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죽기 위해 스스로 사지(死地)로 걸어가시는 예수님! 무엇이 주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의 죽음을 자초하게 하였을까요? 그 답이 28절에 나와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사람들의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공생애가 이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를 읽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얼마나 바쁘게 사셨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더욱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셨다는 것입니다. 

병든 자들을 고쳐주시고, 귀신에게 사로잡힌 자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굶주린 자들에게 떡을 나누어주셨고, 길 잃고 방황하는 자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최후에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고대에는 남에게 종 된 사람이나 타국에 포로 된 사람을 그 속박된 상태에서 해방하려면 정해진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종 된 사람의 가족이나 친척이나 또 그 누군가가 그의 몸값을 그의 상전에게 지불할 때 그 사람은 자유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들이 어떤 상태에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필요한 것일까요? 이에 대하여 성경은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라고 증언합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대한민국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죄인이 되었습니다. 국법에 의하면 범죄자가 아닌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법인 율법에 의하면 영락없이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 걸음 양보해서, 우리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보아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왔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할까요? 

그리고 죽음은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는다는 사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진실 가운데 하나입니다. 때와 모양은 달라도 누구나 한번 죽습니다. 부자도 죽고 가난한 사람도 죽습니다. 남자도 여자도 죽습니다. 죽음을 면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죽음을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본디부터 인간 세상에 죽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전에는 세상에 죽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고 증언합니다.

사람이 죽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서 한평생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이 죄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아무리 의학이 발달하더라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죄의 굴레에서 해방될 수 없다는 점에서, 사람은 누구나 죄의 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고 하셨습니다. 종은 자유가 없으며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사람은 순수한 본성을 갖고 태어나지만 성장 과정에서 사회의 부조리에 감염되어서 악해 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은 타락한 본성(本性)을 타고 났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우리 각 사람이 죄에서 해방될 방도는 없는 것일까요? 그것은 누군가가 우리의 죄 값을 치러주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대속입니다. 그러면 율법이 명하는 죄인을 대속하는 방법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의인이 죄인을 대신하여 죽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롬 6:23). 다시 말해서, 죄의 대가는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종 된 사람은 돈을 주고 속량할 수 있지만, 죄의 종이 된 사람은 돈으로 속량할 수 없습니다. 생명은 생명으로만 갚을 수 있습니다(출 21:23).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자손은 짐승의 피로써 속죄 제사를 드렸는데, 이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하신 레위기 17장 11절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짐승의 피로 드린 속죄 제사는 사람들의 죄를 영구히 없이할 수 없었고 임시방편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죄인은 죄인을 대속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무죄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로 인해 육체의 죽음 뿐 아니라 영원히 지옥에서 형벌 받아야 할 우리 인생들을 대신하여 죽기 위함이었습니다. 출애굽 당시에 장자가 죽는 재앙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건지기 위해 죽임 당한 어린 양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온 인류를 영원한 죽음에서 건지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신대로,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목숨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습니다. 그것도 억지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고, 자진해서 십자가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주님의 희생이 귀하고 거룩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는 이유는 그 분이 민족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바쳤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서 그같이 민족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요즘도 이따금 의로운 죽음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이수현 청년의 죽음을 기억합니다. 그는 대학생으로서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휴학을 하고 일본에 가서 지내던 중, 2001년 1월 26일 아르바이트를 마친 후 도쿄의 신주쿠 신오쿠보 역에서 전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한 취객이 반대편 선로 위로 추락한 것을 보고 구하려고 철로에 뛰어 들었는데, 그만 곧바로 진입하던 전차에 치여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때 이수현 청년의 나이는 26세 불과했습니다. 그의 의로운 죽음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흉악범을 대신해서 죽어준 사람이 있다는 말은 아직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그러한 죽음은 무가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특별한 죽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의인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고 영원한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이 같이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6-8)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이 위대한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 된 죄인들을 사랑하신 것이기에 위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뿐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와 사망에서 구원 받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주님의 보배로우신 피로 우리의 추하고 더러운 죄가 흰 눈같이, 양털 같이 깨끗하게 씻음 받게 됩니다. 그러기에 에베소서 1장 7절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보시고 그를 믿는 자들의 죄를 사하시고 의로운 자로 인정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사 43:25)고 하셨으며, 시편 103편 12절에 보니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용서는 확실하고 불변하는 용서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한다고 하면서도 그의 잘못을 잊지 못합니다. 

이는 그만큼 우리에게는 용서의 능력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번 용서하신 우리의 죄과를 기억조차 아니 하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행복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4장에 이르기를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죄책에 사로잡혀서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죄책으로 양심이 괴로움을 당하기 때문에 마음에 평안이나 기쁨을 누릴 겨를이 없습니다. 살인을 저지르고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항상 죄책에 억눌려서 지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지옥 불이 타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살인을 저지른 적이 없고, 남의 물건을 훔친 적이 없고, 남을 해친 적이 없다 할지라도, 사람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만약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왜 이 사회가 이토록 혼란한 것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죄의 종이 되어 죄가 시키는 대로 악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추노라는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데, 거기 보면 도망 노비들의 얼굴에 종 “노”(奴) 자가 화인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전서 4장 2절에 보니 믿음을 저버리고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켜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의 양심에는 죄의 종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죄에서 해방되어 의인이라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에 이르기를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사망에서 해방되어 영생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는, 이치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실지로 죄를 떠나 변화된 새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본디 일곱 귀신에 들렸던 여자였습니다. 일곱 귀신 들렸다는 말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귀신 일곱이 들어가 있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귀신에게 완전히 사로잡혀서 구제 불능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서 버림받고 자포자기하며 죽지 못해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 막달라 마리아는 귀신에게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여인에게서 일곱 귀신을 내쫓으시고 죄의 사슬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과 같이, 막달라 마리아는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전의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경건하고 헌신적인 성도가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하시는 주님의 곁을 지켰던 여인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새벽 미명에 무덤으로 맨 먼저 달려갔던 사람이요, 부활하신 주님을 맨 처음 만나 뵌 사람이기도 합니다. 후세 사람들은 그녀의 이름 앞에 성스러울 성(聖) 자를 붙여서 성․ 막달라 마리아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은 누구나 거룩한 무리 곧 성도(聖徒)가 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죄 사함 받은 것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과 불화하고 원수지간이었는데 이제 예수 믿고 나자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부모와 불화해도 마음이 괴로운데 하물며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불화하고서 어떻게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어떤 부유한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둘째가 아버지에게 와서 자기 몫의 재산을 달라고 졸랐습니다. 이에 아버지가 재산을 나누어주었더니 그 아들은 곧바로 재산을 정리해서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탕진했습니다. 드디어 가진 재산이 다 떨어지고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이 아들은 하는 수 없이 들판에서 돼지 치는 사람으로 취직했습니다. 그러나 무슨 보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돼지들이 먹는 쥐엄열매를 나누어 먹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나마 배불리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 곤고한 지경에서 비로소 이 아들은 떠나온 아버지 집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겠다. 가서 말하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옵소서 하리라.’ 그렇게 결심을 하고 일어서서 아버지 집을 향하여 걸음을 옮겼습니다. 거지몰골을 하고 부끄러운 생각에 얼굴을 들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면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상거가 아직 먼데 아버지가 이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와서 껴 앉고 입을 맞추고 환대하였습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옵소서.”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종들을 불러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 함께 먹고 마시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이야기는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난 사람의 비참함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의 행복을 잘 보여 줍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곧 하나님을 가리키고, 아들은 우리 인생들을 가리킵니다. 이 비유와 같이, 우리가 지난날에는 하나님과 불화하고 원수가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지금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 13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처럼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복 된 신분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마귀의 세력에서 해방된 사람입니다. 죄의 종 된 사람은 동시에 마귀의 종이기도 합니다. 마귀는 이 죄악 세상을 다스리는 왕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라”고 하신대로 마귀는 인간들의 삶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자랑하는 오늘날, 사람들의 심성은 조금도 개선된 것이 없습니다. 선량하게 변화되기 보다는 과거보다 더 흉악해져 가고 더 야만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과학 기술 문명은 발달하지만 인간의 영적 상태는 점점 더 암울해져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과거보다 죄악이 더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제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자기가 종으로 사로잡은 인생들을 그냥 놓아주는 법이 없습니다. 누군가 마귀보다 더 강한 자가 와서 마귀를 멸하고 사로잡힌 자들을 해방시켜 주어야 합니다. 바로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2장 14절 이하에 보니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대하여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패배의 장소가 아니고 승리의 장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마귀의 머리를 깨뜨리셨습니다. 이제 마귀는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적이 되었고,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영원한 불못에 던짐 받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은 마귀의 매임에서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마귀를 대적하고 제어할 능력을 소유한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눅 10:19)고 하셨고, 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17,18)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마귀를 두려워하지 마시고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을 두려워하여 피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우리는 교회력으로 사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지내는 기간입니다. 앞으로 두 주간이 남아 있습니다. 그 동안 여러분께서는 복음서를 한번 씩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주님께서 고난당하시는 장들을 깊이 묵상하면서 읽어 보십시오. 성령님께서 성도님들에게 대속의 은혜를 깊이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아무쪼록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하늘의 영광 보좌를 떠나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속하시기 위해 목숨을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온전히 깨달아 자원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충성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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