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푯대를 향하여 (빌 3:10~14)

  • 잡초 잡초
  • 455
  • 0

첨부 1


푯대를 향하여
본   문 : 빌립보서 3:10~14
설교자 : 강석공 목사
일   시 : 2010년 3월 21일 설교

지난 3월 11일 법정 스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스님은 일찍이 해인사에 계실 때 팔만대장경을 “빨래판 같이 생긴 거요?”라고 묻는 어떤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아무리 뛰어난 가르침이라도 알아볼 수 없는 글자로 남아 있는 한 한낱 빨래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의 가르침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쉬운 말과 글로 전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무소유”, “텅 빈 충만”, “버리고 떠나기” 등의 책을 내게 되셨다고 합니다. 스님은 한 번도 종단 행정을 맡거나 사찰의 소임을 맡지 않고 홀로 조용히 살다 가셨습니다. 

다른 종교의 성직자들이 높은 직책을 맡고 나서부터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면 스님은 그런 것 없이 일개 수행자로 사셨지만 순수하게 스님의 인격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으셨습니다. 드러나는 것이 싫어서 숨어서 지내셨지만 그것이 오히려 스님을 더 드러나게 했던 것 같습니다. 스님은 산속에서 홀로 지내셨지만 주옥과 같은 글로 언제나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셨습니다. 법정 스님의 죽음 앞에서 솔직히 많이 부끄럽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먼저 하셨기 때문에 다만 부끄러울 뿐입니다.

사도 바울의 생애를 보면 전반부는 잘 달려서 그가 속한 그룹에서 으뜸이 되었습니다. 그는 유대교 전통 안에서 철저히 훈련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태어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대여섯 살 때부터 정규 교육 과정을 밟았습니다. 연령에 따라 필수 과목들을 빠짐없이 이수했습니다. 집에서는 부모님의 인도로 금요일 해가 떨어질 때부터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토요일이 되면 부모님의 손을 잡고 회당에 가서 기도하고 말씀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과 저녁 쉐마를 암송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교 신앙에 있어서 학문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매우 열정적인 인물로 성장했습니다. 그의 입장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을 미혹하는 옳지 못한 집단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를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했으며 온 힘을 다해서 초대 교회를 박멸하는 일에 앞장을 섰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과정에서 그는 매우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스데반 집사는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을 위해서 축복하며 승리자의 모습으로 하늘을 향해서 기도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로서는 난생 처음으로 겪는 매우 충격적인 경험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큰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열심히 달려왔던 삶의 목표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모세의 율법을 최고의 진리로 믿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이 가장 귀한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그의 삶의 목표도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그 동안 추구한 모든 것이 삶의 궁극적인 목표로서는 아무 가치도 없는 쓰레기와 같다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의 요구 조건을 실천해서 얻는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를 붙들고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율법으로 의에 이르려고 한 것은 죽음의 관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확실히 믿고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놀랍게도 자신이 아직 부족한 상태에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이 미완성 작품과 같은 상태라고 털어놓고 있습니다. 비록 그가 삶의 방향을 전환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지난 이십여 년 간 열심히 달려왔지만 아직은 아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본문 12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지속적인 성장의 필요성을 고백하는 사람은 대단히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발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힘을 다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가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본문 13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삶의 자세가 오늘 우리에게도 꼭 필요합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경주하는 사람은 푯대를 정해 놓고 달려야 좋은 성적으로 결승점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달리기 선수가 결승점을 바라보며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리듯이 사도 바울도 믿음의 경주에서 푯대를 향하여 열심을 다해서 달리고 있습니다. 그는 이전에 모세의 율법을 푯대로 삼았던 것을 미련 없이 떨쳐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로 삼고 그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사도 바울은 과거에 이룬 일이 달리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습니다. 뒤에 있는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고 분명히 그가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도 올바른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 끊임없이 옛 것을 버리고 비우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새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 과거의 모든 것은 지나간 것에 불과합니다. 때문에 그것이 오늘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하는 데 있어서 거치는 것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푯대, 하나님께서 위에서 부르시는 부름의 상을 위하여 오늘 우리도 열심을 다해서 믿음의 경주를 계속해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바라보는 푯대는 과연 무엇입니까? 혹시 멋드러진 예배당 건물을 소유하는 것입니까? 만약 그것이 우리의 목표라면 그 목표에 도달한 우리가 이제 무엇을 보고 달려야 합니까? 더 이상 목표가 없지 않습니까? 분명히 말하지만 그런 것은 단기적인 목표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궁극적인 목표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을 목표로 삼았으면 결국 실족하게 마련입니다. 교회뿐 아니라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아파트 갖기 위해서, 또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 또 자식을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서 살고 있지만 과연 그것이 삶의 궁극적인 목표, 진정한 푯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아더 밀러의 희곡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주인공으로 나오는 윌리 로먼의 꿈은 장사를 크게 하는 것, 모든 사람이 그를 좋아하게 만드는 것, 자기 자식들이 자기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은 하나씩 깨어졌습니다. 먼저 직장을 잃게 되었습니다. 다음에 자식들을 하나 같이 믿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주인공 윌리는 마침내 절망에 빠져 자살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의 무덤에서 한 아들이 하는 말로 끝납니다. “아버지는 잘못된 목표을 가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사도 바울의 솔직하고 또 충격적인 고백을 들으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올바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목표는 십자가를 넘어선 부활입니다. 때문에 개인이나 교회 공동체의 삶의 목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우리를 권고하고 있지 않습니까? 히브리서 12장 1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마침내 사도 바울의 마지막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십자가를 지고 앞서 가신 주님을 바라보고 지금 앉아 있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푯대를 향하여 끝까지 달려감으로 말미암아 장차 그 주님의 보좌 앞에 섰을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과 함께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상급으로 받아 쓰는 참으로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