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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롬 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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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롬 4:3~8)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인생에게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계시종교, 혹은 타율종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 시대 여러 모양으로 자신을 그의 백성들에게 계시하셨습니다. 족장시대 이전에는 하나님 자신이 직접 나타나는 계시 형태를 취하였습니다. 

족장시대 이후에는 이적과 꿈과 환상 등으로 자기를 계시하였습니다. 왕정시대로 접어들면서 주로 선지자들의 입의 예언을 통하여 자기를 계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를 계시함으로 예수 자신이 모든 이적의 최절정으로 모든 예언의 성취자가 되었습니다. 
오순절의 성령강림과 함께 우주적 교회시대가 열렸습니다. 곧 선교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선교시대는 성령께서 그의 사도들에게 영감을 통한 계시를 책이라는 기록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반복하고 있습니다(계 22:10, 18, 19).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속 계시를 책에 기록하여 우리에게 주신 목적은, 첫째는 다량의 계시 내용을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둘째는 정확한 전달과 확실한 보존과 계승을 위함입니다. 셋째는 보다 효과적인 복음 선교를 위함입니다. 
따라서 책의 기록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승된 이 성경은 단순한 옛날 기사가 아니라 언제나 살아계신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빙크(H. Bavink) 박사는 "기록된 성경은 언제나 하늘과 땅 사이를 연결짓는 예수님의 음성이며 그의 피조물에게 주시는 편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벵겔(Bengel)은 "성경은 기록될 때만 하나님께서 저자들에게 감동하신 것이 아니고 그것을 읽을 때도 영감을 주시는 것인데, 성경은 그때 하나님을 알게 하는 기운을 우리에게 불어 넣어준다."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은 『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라고 했습니다. 

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이 그의 의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본문 4장 3절에 『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 기록된 말은 창세기 15장 6절에 『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라고 한 말씀을 두고 한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것은 창세기 15장 5절에 『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고 한 약속에 대한 그의 믿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그의 신격에 대한 능력을 신뢰한 것입니다. 아브라함 자신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약속을 성취시킬 뿐이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신뢰를 두었을 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루어진 약속의 성취는 그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믿음을 통해서 값없이 주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이해를 필요로 하는 성경이 있습니다. 먼저 야고보서 2장 21절에 『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라고 한 말씀입니다. 

루터(Luther)는 믿음을 강조한 나머지 야고보서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루터의 오해입니다. 
야고보서 2장 21절은 창세기 26장 5절에 『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 』고 기록한 말씀과 병행해서 보아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믿음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따르는 행위에 중점을 둔 것입니다. 

본문에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는 말은 의롭다 여김을 받은 수동적 행위를 의미합니다. 즉 '의롭게 만들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단지 '그렇게 평가해 주었다'라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의롭다 여김을 받을 정도로 인격(personality)에 변화가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과의 신분적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지위를 부여 받았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결코 행위에 의해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랑은 인간의 주장이나 능력, 즉 인간의 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그리스도가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사건을 통하여 행위와 믿음이라는 선택의 상황에서 단호하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게 여기신다고 했습니다(5절). 예컨대 일하는 자는 그 품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4절). 고용주가 노동의 대가를 치르는 행위는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노동자에게 있어서 보수는 당연히 요구해야 할 권리이며 고용주는 빚진 채무자와 같습니다(레 19:13; 마 10:10). 이와 마찬가지로 만일 사람이 행함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그 행위에 대하여 대가를 지불한 것이 되기 때문에 그 의는 하나님의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를 의의 근거로 내세우는 유대인들의 사고(思考)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서든 자기를 자랑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어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존재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 신구약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바울은 이신득의의 진리를 확증하기 위하여 또 한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다윗을 들고 있습니다. 다윗은 족장 시대의 아브라함과는 달리 모세 율법이 적용되던 시대의 인물이었습니다(삼상 16:12, 13; 대상 28:4). 당시에 의로운 사람으로 칭송받던 다윗이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함으로 마땅히 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삼하 11:1-17).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의롭다 여겨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구약 성경의 말씀 시편 32편 1절은 시편 51편과 더불어 율법의 지배 아래 살았던 다윗이 '일한 것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6절)'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 범죄한 후에는 인간의 행위가 얼마나 무력하고 무능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자신의 행위로서 범죄 행위를 도말할 수가 없었습니다(시 51:1-5).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죄 사함의 은총만이 그를 죄로부터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죄로 간주하지 않으셨으니 곧 다윗은 그의 행위에 관계없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죄 사함과 칭의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는 행복하다고 거듭 고백하고 있습니다(8절). 죄 사함의 은총, 즉 칭의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최대의 복입니다. 인간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 하나님께 의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과 의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구원과 칭의(稱義)의 수단입니다. 그러나 또한 이 믿음은 인간이 마음대로 소유하거나 바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데에 그 절대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엡 2:8)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택하신 자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Ⅱ. 율법과 믿음이 공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30-31절에 『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고 했습니다. 

성급한 결론을 내린다면 유업을 이을 자는 오직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 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1장 10-12절에 『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고 했습니다. 
하갈의 소생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했습니다. 그것은 불신앙, 시기, 교만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스마엘의 이와 같은 행동을 가리켜 이삭에 대한 핍박이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29절에 『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여종(하갈)과 그 아들(이스마엘)을 내어 쫓으라고 했습니다. 사라의 요구는 정당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이스마엘은 본래 약속된 기업을 누릴 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육체를 따라 난 자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대조시켰습니다.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을 육체에 속한 자로 비유했고, 사라에게서 난 이삭을 성령에 속한 자로 비유했습니다. 유업을 이을 자는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 곧 이삭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율법과 믿음이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믿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유업을 이을 자가 궁극적으로 유대인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방인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믿는 자들에게만 제한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4장 5절에 『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종노릇으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자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4장 7-8절에 『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믿음으로 율법의 정죄를 면하고 영적 자유를 얻어서 영원한 천국을 기업으로 누릴 자들이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 35절에 『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혈통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사라와 하갈의 비유'를 언급한 것은 한마디로 율법주의에 대하여 종지부를 찍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당시 율법주의자들이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가운데 바울이 '율법'을 '종'으로, '복음'을 '자유'로 비유한 표현은 혁명적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은 본문의 비유를 들어 율법주의에 일대 경종을 울리고 복음에서 떠난 자들에게 속히 돌아올 것을 촉구하였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4절에 『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라고 했습니다. 

Ⅲ. 성경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에 『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 즉 성경을 상고 하면서도 예수를 배척하는 율법주의자들의 모순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사실상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주의자들인 동시에 형식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 두 가지 일에 힘썼습니다. 그 첫 번째는 선행이었습니다. 그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 최소한 한 가지 이상의 선행을 행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16절에 『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성경을 보고 연구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율법준수 여부에 따라 생과 사, 복과 화를 취하게 된다고 믿었습니다(신 30:15-20). 따라서 성경을 묵상하는 일이야 말로 경건한 유대인들의 일과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시 1:1-2). 이러한 사실은 쿰란 공동체가 금욕적인 삶과 함께 성경 연구를 가장 중요시했던 데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B. C. 586년 솔로몬의 성전이 파괴된 후 포로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유대인 학자들은 성전의식과 희생제물을 드리지 못하게 된 대신에 열심히 성경을 상고하였으며 회당을 지어 가르쳤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모든 삶의 기준일 뿐 아니라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었습니다(시 119:93).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그들은 성경을 읽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구원과 영생을 이룰 수 있는 도구를 찾으려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루터(Luther)는 "성경 어디에서나 예수 그리스도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성경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눅 24:27, 44). 예수는 성경이 그의 희생(요 3:14, 15)과 고난을 기록하고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요 12:14, 15; 18:9; 19:24, 28, 36). 만약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생략되거나 무시된다면 그것은 한낱 이스라엘의 역사와 고전 문학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영생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예수에게 이르게 한 후에 자신의 역할을 마치는 몽학선생이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4-25절에 『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고 율법의 조문에만 국한한다면 그것은 사망입니다. 로마서 7장 10절에 『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라고 했습니다. 

모르간(Morgan)은 "성경 자체에는 결코 생명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성경이 가리키는 대로 따른다면 성경은 우리를 예수에게로 데려다 줄 것이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생명을 발견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성경과 예수 그리고 구원의 관계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56절에 『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3-14절에 『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신입니다(삼상 2:2; 사 45:5-6; 46:9). 이사야 45장 21절에 『 너희는 고하며 진술하고 또 피차 상의하여 보라 이 일을 이전부터 보인 자가 누구냐 예로부터 고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구원 얻는 길은 오직 예수 뿐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고 했습니다. 

구약의 사람들이나 신약의 사람들에게 예수 이름 외에는 구원 얻을 이름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형식이나 타성에 젖은 율법주의자들을 책망했습니다. 지나친 형식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가 지나친 형식이나 복잡한 절차나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는 것은 생명력이 없는 형식주의 예배입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의 형식주의 예배를 경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칭의와 믿음을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의는 믿어야 할 의가 있고 행해야 할 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두 가지 의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어떤 것이 우선이냐 차등을 두어서도 안 됩니다. 다만 이것은 믿음에 따르는 행위를 두고 한 말입니다. 성경은 율법과 믿음이 공존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을 완성하심으로 율법에 종노릇 하는 우리를 율법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이제 우리는 율법의 정죄 아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사죄의 은총과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이 부여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행함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얻은 구원에 대한 감사와 행복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오실 예수를 기록한 책입니다. 신약 성경은 오신 예수를 기록한 책입니다. 그래서 신구약 성경은 예수에 대한 기록입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상고 하는데도 예수를 메시야로 믿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예수를 배척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시고 예언을 성취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했습니다(요 19:30). 예수님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했습니다(요 4:32). 그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했습니다(요 4:34). 제자들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느냐고 할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했습니다(요 6:29). 성경은 우리에게 믿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예수 믿기 위해 왔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우리 인생의 의의요, 목적이요, 가치요, 인생의 완성입니다. 우리 일생의 삶은 예수 믿기 위한 목적에 따르는 수단이라는 말에 이의가 없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하면 아무런 가치 없는 인생입니다. 이것은 양보나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기독교의 절대 진리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성경은 이신득구이지 이행득구는 아니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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