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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의 일치 (행 15: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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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일치 (행 15:1~35)
 

사도행전의 주제는 1:8절에 있다고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구절에서 우리는, 특히 한국 교회는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권능’이라는 말에만 주목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권능이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권능은 항상 어떤 신비적인 은사의 나타남을 목표로 했던 것입니다. 방언과 예언, 병고침 등이 성령의 역사라고 인식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행전은 이적과 표적과 기사가 가득한 책으로 생각을 하였습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이나, 사도행전의 교회를 본받자는 표어는 대체적으로 이러한 생각을 기본으로 갖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 이 구절에서 ‘성령의 권능’을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는 전도에만 집중해 왔습니다. 성령의 권능은 반드시 그 최고의 목표가 전도에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교회가 오직 전도와 부흥에만 매달려 왔습니다. 물론 이러한 전도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의 권능을 오직 전도에만 한정시켜 생각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성령의 권능은 교회의 일치에 그 목표가 있다고 봅니다. 모든 표적과 기사로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주님께서 복음의 사역자들을 도우시고, 이방 땅으로 복음전도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핍박에도 불구하고 확장되었습니다. 이 일의 결과물이 바로 오늘 본문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의 하나됨, 즉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가 일치를 이루는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는 주로 교회의 일치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사도행전의 복음전파를 지리적으로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유대 땅과 이방 땅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유대 땅에 대한 복음전초기지로써 예루살렘 교회가 그 역할을 다하고, 이방 땅에 대한, 그 중에서도 아시아와 로마의 동반구는 안디옥 교회가 복음의 전초기지로써 그 역할을 맡았다고 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 두 사도가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이러한 전도사역을 최종 결론짓는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왜냐하면 바나바와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에 올라가 자신들이 이방인에게 전하였던 일을 다 보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5:12절입니다.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 

이렇게 바나바와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된 발단이 안디옥 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15:1-2절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안디옥교회에 일어난 일은 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자들이 안디옥교회에 와서 가르쳤는데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기 때문에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다툼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이 다툼과 변론에 대하여 확실한 결론을 얻지 못하자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안디옥 교회의 몇 사람을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예루살렘의 사도회의가 처음 열리게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전송을 받고 안디옥 교회의 사람들은 베니게와 사마리아를 통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면서 그들이 전하였던 복음전파에 대하여 증거했습니다.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니까 형제들이 다 크게 기뻐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바나바와 바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행한 일들을 다 고했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의 첫 사도회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예루살렘 교회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일어나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15:5절입니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이렇게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도 서로의 주장이 엇갈린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엇갈린 주장에 대하여 사도회의는 신속하게 결정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였고 많은 변론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토론을 많이 했었다는 겁니다. 


그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했습니다. 7-11절입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시니라.”

이러한 베드로의 의견은 다분히 고넬료를 두고 한 말입니다. 베드로도 사실 유대인이 이방인과 함께 교제하는 것이 위법인줄 알고 있었습니다. 고넬료의 가정에 들어가 여러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10:28-29절입니다.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뇨?” 

베드로에게 보이신 환상을 통해 고넬료의 가정에서 보낸 심부름 꾼들의 초청을 받아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 오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도중에 성령이 내려와 고넬료의 집에 모인 자들에게 임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사도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돌아와 할례자들이 그를 향하여 비난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11:3절입니다.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그래서 베드로는 고넬료의 가정에 일어났던 일을 설명했습니다. 11:15-17절입니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성령세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고넬료의 이방인 사람들을 자기 백성을 삼으시는데 어찌 베드로 자신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막을 수가 있겠느냐고 하니 이 말을 듣고 할례자들이 잠잠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말하기를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고 했습니다.

이런 결론을 내렸어도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는 이방인들이 들어오는 것은 인정하였지만 그들이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들 중에 어떤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에 내려가서 자기들 주장과 생각대로 교회 사랆들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베드로 사도께서는 이러한 일을 예로 들며 자기를 사도로 택하신 목적이 바로 이방인들로 복음을 믿게 하시려고 불렀으며, 성령을 주시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셨으니 누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가 있느냐고 하면서 그의 주장의 핵심은 바로 9절과 11절에 있습니다. 저희 이방인들이나 우리 유대인들을 분간치 않으셨다는 것, 그리고 우리나 저희가 다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즉 한 마디로 말하면 유대인과 이방인이 이제 서로 차이가 없이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바나바와 바울의 선교보고가 다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신 표적과 기사들을 다 사도들과 장로들 앞에서 고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말을 마치자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인 야고보 사도가 일어나 발언을 했습니다. 그 발언은 사도 베드로의 증언이 선지자들이 증거한 말씀과 합하다고 한 것입니다. 교회의 대표인 베드로의 의견과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 선지자들의 말이 서로 일치한다고 하였습니다. 15:14-15절입니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그럼 선지자의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16-18절입니다.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이 말씀은 아모스 9:11-12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 내용은 다윗의 집이 무너졌었는데 그 집을 다시 짓는다는 것인데 그 집을 다시 일으키는 일에 남은 자들과 이방인들이 참여하여 함께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 나라가 바벨론에 망하였고 다시 돌아와 무너진 다윗의 나라를 재건하는 일에 남은 자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참여하여 주님의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따라서 야고보 사도의 주장은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옴이 마땅하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 야고보는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성경말씀으로 그 정당성을 말했습니다. 그 후에 자기 의견을 결론으로 제시합니다. 19-21절입니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야고보 사도는 할례를 받는 것과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이방인들을 괴롭게 하는 일은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면 일방적으로 바나바와 바울의 편만 옳다고 한 것인가? 아닙니다. 이방인이라도 멀리 해야 할 것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상의 더러운 것을 멀리 하라, 음행을 멀리 하라, 목메어 죽인 것을 멀리 하라, 피를 멀리 하라는 것을 제안했습니다. 왜 이것들을 제안했는가? 21절에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의 글을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읽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복음을 전하였던 곳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게 망한 이후로 흩어졌던 곳들입니다. 그 곳에 회당을 만들어 안식일마다 모여 모세의 글을 읽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유대인들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도록 다만 몇 가지만은 하지 말라고 권한 것입니다. 절대로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명령이나 헌법 조항이 아니라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4가지를 제정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그 의견이 좋다고 가결하였습니다. 22절입니다.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교회에서 파송한 사람들을 함께 안디옥 교회로 보냈습니다. 편지를 써서 보내었는데 예루살렘 교회가 모여 결의한 내용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23-29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가결하였노라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찌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예루살렘의 사도와 장로들의 결정을 보냈는데 안디옥 교회를 가리켜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전에 안디옥 교회에 바나바를 파송한 것처럼 공식적으로 파송하지 않은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에 내려가 시키지 않은 말로 교회를 가르쳐 미혹하게 했다고 지적하며 이제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공식적인 사람을 파송하기를 가결하였다고 말합니다. 그 가결은 만장일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공식으로 인정한 사람은 유다와 실라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편지를 전할 뿐만 아니라 말로도 전할 것입니다. 마치 특사를 보낸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예루살렘 교회의 일치가결한 것을 성령이 결정한 것과 같은 권위로 전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28절에 ‘성령과 우리는’이라는 말로 같은 위치에 두고 말씀합니다. 교회의 결정이 곧 성령의 결정인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의견을 낸 4 가지 외에는 아무 짐도 교회에 지우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하라고 권하였습니다. 이 4가지가 요긴한 것입니다. 왜 요긴한 것인가? 절대적 계명이기 때문에 요긴한 것인가? 그러한 관점이 아니라 교회가 평안함을 이루기 위해 요긴한 것입니다. 즉 교회의 일치를 위한 요긴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이런 가결사항을 갖고 사람들을 보내어 안디옥 교회에 전하니 교회가 기뻐했습니다. 다툼과 변론 때문에 힘들어 했었는데 이제 이런 결정을 듣고 또 위로의 말을 듣고 기뻐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파송한 유다와 실라도 안디옥 교회에 얼마 동안 머물며 여러 말로 형제들을 권면하여 굳게 하였습니다. 그런 후에 그들은 다시 안디옥 교회의 전송을 받고 예루살렘 교회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문제가 끝이 난 후에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 남아 여전히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했습니다.

이렇게 본문을 보면 교회 안에 어떤 분쟁이 생기고 다툼이 일어났을 때, 교회가 어떻게 이 일을 해결하고 처리하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어떻게 한 몸을 이루는가, 더 확대하면 안디옥교회와 예루살렘교회가 어떻게 하나인가를 말해줍니다.

민수기 32장에도 이런 일들이 나타났었습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의 떼가 있었고, 이미 점령한 요단 동편의 땅이 그들이 보기에 가축을 위하여 적당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 족장들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가 가축을 먹이기에 좋은 땅이니 자기들은 요단을 건너가 가나안 땅을 얻기 위한 싸움에 참여할 필요가 없이 머물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모세는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았고자 하느냐?”고 하며, 그렇게 되면 다른 지파의 형제들이 낙심하여 요단 건너 하나님께서 주신 땅으로 가려는 것을 막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예전에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였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이스라엘 자손이 거절함으로 광야 40년 동안에 다 죽고 오직 갈렙과 여호수아만 남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모세는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 하나님과 약속한 가나안 땅을 얻기를 거절하면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이제 다 멸망하게 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은 마음을 돌이켜 가나안 땅을 다 얻기까지 요단 동편 땅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리고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가 싸움의 선봉에 서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민수기 32장도 가나안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로 한 언약을 시내산에서 맺었는데 그 언약을 지키어 함께 하는 싸움에 모든 지파가 하나가 되어 요단을 건너 가나안 정복에 나서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구약의 이스라엘 나라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그 모태가 유월절에 있습니다. 유월절에 그 나라가 출생했다고 봅니다. 그럼 유월절에 그 나라의 모습이 무엇인가? 

그것은 어린 양의 고기를 먹음에 그 공동체의 성격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한 마리의 어린 양이 있으면 그 양을 먹을 가족이 세 사람만 있는데 그 고기의 양은 10인분 정도가 된다고 하면 다른 가족의 식구들을 데려다가 그 어린 양의 고기에 맞게 먹음으로 새로운 한 가족으로서의 공동체가 나타났음을 말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공동체를 나타내는 표지는 바로 어린 양의 한 마리에 맞게 식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출애굽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새로운 한 가족을 형성하였습니다. 가족이라 함은 한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 식사하는 공동체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스라엘 나라는 온전한 하나를 이루는 공동체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사단의 권세를 이기는 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표지는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신 유월절 전날 밤에 최후의 만찬에 그 정체성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떡과 잔을 주시면서 그의 살과 피를 주심이 곧 교회의 표지입니다. 교회의 출생은 새 유월절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먹었지만, 이제 제자들은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셨습니다. 그리하여 새 언약 공동체요, 새 생명의 공동체임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럼 이 상에 둘러앉아 함께 먹은 제자들은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어린 양이신 주님의 몸에 참여하여 한 몸을 이룬 새로운 공동체를 나타낸 자들은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거기에는 예수를 팔 자도 있었고, 예수를 세 번 부인할 수석 사도 베드로가 있었고, 예수님이 잡히시면 모두 도망갈 자들이었습니다.

구약의 공동체의 하나됨과 신약의 공동체의 하나됨이 서로 달랐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신 최후만찬에서 잘 드러나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제자들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살과 피를 이 제자들을 위하여 주셨습니다.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는데 그 하나됨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자기 몸에 연합시키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린 짐승인 양 한 마리에 함께 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주님의 몸에 연합한 공동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죄의 용서가 필수적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배반하고 도망갈 자들을 위하여 ‘이것은 내 살이라, 이것은 너희를 위한 언약의 피’라고 하시면서 자기 몸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이러한 주님의 몸을 나타내는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겠습니까? 무조건적인 사랑을 해주어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5장을 보십시다. 1-8절입니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고린도교회 안에 음행이 일어났습니다.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계모를 취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음행한 당사자도 자기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알지 못하고, 그 교회 공동체도 이 일을 알면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 일에 대하여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바울은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라고 하며 책망했습니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하나님 보다 더 괜찮은 마음을 갖고 있는 자들이 고린도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이 음행을 그냥 넘어가시지 않는데 교회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 음행을 한 당사자와 자기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너는 죄를 지었을지라고 나만 죄를 짓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이 음행한 일에 대하여 사도는 교회 공동체 전체를 향하여 꾸짖고 있습니다. 교회는 새 유월절 덩어리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양으로 희생이 되신 공동체입니다. 어린 양이 희생이 된 이스라엘 유월절 양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 떡 덩어리 안에 악독한 누룩이 생겨나면 온 덩어리에 퍼져 다 먹지 못하는 상한 떡이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악한 누룩을 제거하지 않으면 주님이 희생이 되신 새 유월절 떡덩어리가 다 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월절 떡 덩어리를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해야 한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이런 음행에 대하여 수수방관하거나 잠잠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교회를 해치는 일이 됩니다. 교회는 용납되어야 할 일과 용납되지 아니할 일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교회의 일치를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이를테면 한국의 기독교는 금주를 아주 거룩한 표지로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절대적인 교회의 계명은 아닙니다. 즉 술 먹으면 그리스도인 아님이라는 등식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어디까지나 한국 교회의 금주에 대한 엄격함은 선교상황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에 선교사들이 들어가면 무엇을 금지할까요? 아편입니다. 

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보니 술을 먹는 사회였던 것입니다. 사실 그들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조그만 위스키 잔에나 조금씩 따라 홀짝 홀짝 마시는데 한국 사람들은 어디에 따라서 마십니까? 그렇지요, 막걸리를 사발에다 부어 마십니다. 그러니 그들 눈으로 보면 한국 사회는 술에 미친 것으로 비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오늘 사도행전에서 말하듯이 예루살렘 교회가 가결한 내용은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이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전부터, 바벨론 포로 이후로부터 이방 땅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각 처에 회당을 세웠고 거기서 안식일마다 모세의 글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성경에 문안하면서 입맞추라고 하니까 우리 나라 신자들도 서로 입을 맞춘다고 하면 아마 큰 일이 벌어질 겁니다. 예수믿는 자들은 아주 문란한 자들이라고 단박에 안 믿는 사람들이 공격할 겁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성경에 입맞추라고 명령문이 있다 해도 우리는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그게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반드시 지켜야 될 것, 그렇지 않아도 될 일이 있는 것입니다. 생명을 걸고 물러서지 않으며 지켜야 할 것과 선교적인 상황과 같이 어떤 부수적인 상황으로 인하여 지켜야 할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율법주의에 젖어 있어요. 항상 우리의 신앙생활 기준은 해야 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양분하면서 삽니다. 먹어야 될 것,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딱 구분하는 것이 아주 옳은 신앙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찬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저희 교회가 성찬이 예배의 핵심이다라고 가르치니까 단박에 성찬 안하면 교회가 아니다 라는 것에 빠집니다. 마치 사도신경하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공격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합니다. 물론 교회에 예배가 가장 중요하고 성찬이 핵심입니다. 그러나 성찬하지 않으면 교회 아님으로까지 달려가는 것은 지나치지 않나 돌아보아야 합니다. 십일조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 입장에서 보면 십일조 헌금 항목이 없으면 진짜 교회, 십일조 헌금 항목이 있으면 가짜 교회 이렇게 나누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판단은 우리가 죄의 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죄인의 본성이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자기에게 무슨 특별한 장난감이 생겨났거나, 다른 친구가 가지지 아니한 좋은 물건이 있으면 제일 먼저 하고픈 일이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고 싶어 합니다. 이 자랑을 통해서 어린 아이가 나타내고자 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너는 가지지 못했는데 나는 갖고 있다.’라는 것 아닙니까! 그리해서 자기 친구와 자신이 다름을 증명하고자 하고 자기가 친구보다 우월함을 보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전반적인 사고도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다르다는 것 아닙니까? 구속사 복음도 우리가 들으면서 뭐를 가장 드러내고 싶어 하냐면 ‘너희가 듣는 것은 가짜고 나는 진짜다.’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무언가 새로 알게 되는 일이나 물건이 전부 다른 사람과 분리시키는 도구로 사용하려 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래도 자기가 가진 것으로 자랑하니 조금 낫습니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상대를 낮추고 비하하여 자기를 높이려는 쪽으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은 항상 상대방의 허물만 보이고 비판거리만 찾게 됩니다. 그런 말을 올리기를 너무 좋아합니다. 그런 말을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새 유월절 떡 덩어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최후만찬의 식사 자리에 둘러앉은 제자들이 주님을 팔 자요, 부인할 자요, 배신할 자들인데 그들을 사랑하셔서 자기 몸을 주심으로 용서의 공동체로 교회가 출생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 계명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처럼 ‘하라! 하지 말라!’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로 주어졌습니다. 즉 계명 조차도 둘로 나누어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계명입니다. 오직 주님을 사랑함에서 우리의 모든 삶의 윤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에 함께 하는 성령의 권능은 어떤 성령의 은사가 신비롭게 나타났는가에 그 목표가 있지 않습니다. 또한 성령의 권능은 복음전도가 얼마나 다 잘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최종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선교목표도 실상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는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복음에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는데 유대인과 헬라인이 차별이 없다고 말합니다. 성령의 권능은 교회가 한 진리 안에서 어떻게 유월절 떡 한 덩어리를 이루는가가 그 목표요 나타남입니다. 그런데도 교회 안의 형제들의 잘못을 함부로 이야기하거나 심지어 남의 잘못을 일일이 수집하러 다니기까지 한다면 이는 정말 교회도 주님도 모르는 자의 소치입니다. 바로 이런 자들이 교회를 분란에 빠지게 하고 무너지게 합니다.

안디옥 교회에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을 때 어찌 보면 바나바와 바울이 그들에게 나타난 성령의 권능으로 그냥 묵살하고 무시해도 좋을 뻔 하였을 것입니다. 정말 그들이 복음을 전파할 때 나타났던 놀라운 이적과 표적과 기사들은 그 경험과 체험으로 바울과 바나바에게 얼마나 큰 확신을 주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바울과 바나바와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가를 보자는 말입니다. 그냥 자기 생각이 맞고 자기 경험한 것이 분명하니까 더 이상 논의하려 하지 않고 무조건 결정을 내리는 것과 얼마나 차이가 많습니까! 설령 자기가 본 것이 아무리 확실하고 분명한 것이어도 교회의 결정을 따라 움직이려 한 점을 보시라는 말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이 문제를 내어놓고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추구하는 이런 모습을 교회가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 안디옥 교회에 내려온 ‘어떤 사람들’을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바나바는 안디옥교회가 생겨났을 때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공식으로 파송된 자입니다. 또한 여기 예루살렘 사도회의 결정을 편지로 갖고 안디옥교회로 파송을 받은 유다와 실라도 예루살렘 교회가 공식적인 권위를 준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런 점을 주의하셔야 합니다.

목사는 공동의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서명을 받아 청빙을 받은 자입니다. 어떻게요? 말씀을 통해 가르치고 진리로 다스리도록 청함을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왜 아무 집사님의 말을 듣고 그대로 따라갑니까? 그 집사의 판단을 믿고 그것이 옳다고 하는 것입니까? 이건 아주 어리석은 일입니다. 교회의 대표인 장로님을 모셨으면 그에게 이런 저런 일을 알려야 하고 당연히 판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자기를 위하고 자신만을 생각하는 결정을 내리기가 쉽습니다. 내 마음이 상하거나 기분이 나쁘면 모든 것이 좋지 않게 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런 일에 매우 조심하여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서 자기를 위한 결정을 하지 말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한 결정이 나와야 합니다. 그게 새 백성으로 사는 길입니다. 

바나바와 바울 그리고 안디옥교회의 행보를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절대적으로 거부해야 할 할례와 율법의 가르침, 그리고 교회가 선교적인 덕을 위하여 지켜야 할 것을 결정하되 이 교회의 결정이 곧 성령의 행하심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권능은 그 최종 목표가 교회의 일치에 있다는 점을 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목표는 순전함과 진실함으로 새 유월절 떡 덩어리를 만드는데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성령을 주셔서 여러 지체가 다르고 여러 은사가 달라도 사랑으로 서로 연합하는 복된 교회를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여러분의 삶이 이처럼 교회와 가정과 직장에서 주님 안에 일치됨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일을 실천하는 복된 것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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