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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사랑받고 싶은 아버지(3) (눅 15: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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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고 싶은 아버지(3) (눅 15:31~32)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 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지난 한주간은 김길태 이야기로 보냈습니다. 길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김길태라고 이름이 지어졌다고 합니다. 이 김길태가 아주 몹쓸 짓을 했습니다. 이 김길태가 이 시대의 대표적인 탕자입니다. 지난 두주에 걸쳐 탕자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작은 아들은 철없는 탕자였습니다. 아버지의 품과 그늘이 싫다고 집을 나갔습니다. 가출해서 탕진을 하고 마침내 병들어 집에 돌아왔습니다. 이 작은 아들은 철없는 탕자였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은 비정한 탕자였습니다. 동생이 병들어 집에 돌아왔는데도 쳐다보지 않고 무관심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위해서 잔치를 차렸다고 불평만 하고 집에 들어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큰 아들은 비정한 탕자였습니다. 이 두 아들 모두 탕자들입니다. 

오늘은 세 번째 사람인 아버지의 마음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작은 아들이 집을 나가겠다고 막무가내로 재산을 달라고 할 때 그때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집을 나가서 마침내 재산을 탕진하고 결국 병들어 집에 돌아왔을 때 그때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하였겠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탕자가 돌아왔을 때 큰 아들이 밖에서 시위를 하고 돌아온 동생은 처다 보지도 않고 잔치를 베풀었다고 아버지에게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하고 있을 때 큰 아들에게 아버지가 쩔쩔매면서 달래고 있을 때 그때 아버지는 무슨 심정이었을까요. 여기서 심각하게 고민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몹시 마음 아파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마음 아파하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지금 아버지가 마음 아파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알아야 본문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의도와 메시지를 알게 됩니다. 지금 이 아버지가 마음 아파하는 것은 작은 아들이 많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때문만은 아닙니다. 지금 아버지는 재산 따위는 문제도 아닙니다. 큰 아들이 불평하고 서운해서 고민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아버지가 정말 마음 아파하고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민하고 슬퍼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본문을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본문을 우리에게 주신 숨은 의도와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몇 가지 알 것이 있습니다. 

여기 아버지 - 하나님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이나 뜻을 세상에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당신 자신을 보여주고 계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습이나 마음이나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깊으신 뜻과 섭리를 탕자의 이야기 속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탕자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심정이 곧 세상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하나님의 오직 마음은 세상의 탕자들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탕자들이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고 십자가를 지게 하셨습니다. 그를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고 외치고 계십니다. 여기 아버지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너무 완벽하게 생각함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완벽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완벽하십니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못하실 일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감정도 눈물도 후회도 느끼지도 못하는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도 사랑을 받고 싶어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어 하십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해 달라고 얼마나 외치고 계십니까.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나만 사랑해 달라고 강조하십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믿지도 보지도 섬기지도 말라고 얼마나 강조하십니까. 너희가 사랑할 하나님은 나 외에 없다고 강조하십니다. 그 말은 나만 사랑해 달라는 외침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지 못해서 안달을 했습니다. 우상을 따라가 섬기고 절하고 이것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모습을 하나님이 보시고 선지자들을 보내 돌아오라고 호소하셨지만 백성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도 사랑받고 싶어 하십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아들들로부터 사랑받고 싶어 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들들이 아버지를 다 외면했습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 곁이 싫다고 멀리 떠나버렸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 심정은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입장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독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고독해 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흔히 아들 탕자만 볼뿐 더 타락한 큰아들이나 고독해 하시는 아버지는 보지 못합니다. 본문의 탕자 이야기에서 우리는 하나님도 사랑받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육신의 부모도 매양 주기만 하고 한량없이 이해만 하는 분이 아닙니다. 부모도 때로 자식들로부터 받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작은 선물 하나 받고서도 감격합니다. 그것이 부모이고 하나님의 마음이십니다. 

또 하나님은 때로 위로받고 싶어 하십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아들이 속을 썩이고 있습니다. 집을 나가겠다고 떼를 씁니다. 자식들이 부모 곁이 싫다고 떠나겠다고 할 때 부모들이 얼마나 마음에 상처를 받는지 아십니까. 철없는 자식들이 그 심정을 알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너도 다음에 너 같은 자식을 낳아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큰 아들은 불평을 합니다. 아버지의 심정은 전혀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독합니다. 여기서 하나님도 때로 위로받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도 때로 위로받고 싶어 하십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겟세마네 산에 올라 기도하시다가 제자들에게 오셔서 “내가 죽게 생겼으니 나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나도 너희들이 하는 기도가 필요하다” 그 말입니다. 즉 “나도 위로받고 싶다”는 말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탕자가 마침내 집에 돌아왔습니다. 탕자가 지치고 병들고 남루한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탕자의 발걸음은 비틀 거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본문을 보면 탕자만 지친 것이 아니고 아버지는 더 지쳐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아버지는 더 피곤하고 더 지치고 더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집을 나간 자식은 부모를 잊고 살 수 있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밤에는 잠도 자지 못하고 아들 걱정을 하였습니다. 식사할 때에는 밥이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부모의 마음입니다. 아들도 지쳤겠지만 아버지는 더 지쳐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지친 모습을 티도 내지 않았고 표현도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때로 하나님도 위로받고 싶어 하십니다. 육신의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의 부모도 자식들로부터 사랑받고 싶고 위로받고 싶어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상의하고 싶어 하십니다. 아버지는 매사를 혼자서 결단하고 결정하고 그랬습니다. 아들이 속을 썩일 때에도 혼자서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이 이야기 속에 어머니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언제나 혼자였습니다. 언제나 아버지는 혼자서 고민하고 혼자서 걱정하였을 것입니다. 얼마나 고독한 존재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인생들을 부부가 함께 해서 살아가도록 짝을 지어주신 것일 것입니다. 어려울 때 서로 의지하고 의논하라고 말입니다. 함께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복입니다. 좋은 친구, 좋은 동반자, 좋은 이웃. 좋은 멘토가 있다면 좋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언제나 혼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도 때로는 상의하고 싶어 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도 마음을 헤아려 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이 너무 하나님을 완벽하게 돌과 나무처럼 감정 없는 존재로 이해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도 감정이 있고 서운함도 느끼십니다. 그래서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때로 화를 내시고 후회하시기도 하고 기뻐하시기도 하십니다. 사울이 불순종할 때에는 그를 선택하신 것을 후회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을 향해서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기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타락했을 때, 미리암이 주제넘은 짓을 했을 때에는 화를 내시고 벌을 내리기도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감정도 없는 너무 완벽한 존재로만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들이 헤아려 주시기를 기대하십니다. 

무엇이 헤아림인가 

그것은 아버지의 상한 마음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이 눈물입니다. 내 마음에 내 영혼을 찌르는 아픔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하나님 마음을 헤아리는 일입니다. 즉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철든 마음을 가지는 일입니다. 그렇게 철든 마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눈물로 이해하고 헤아리는 사람이 성경에 보면 몇 명이 나옵니다. 

하나는 사도바울입니다. 바울은 나에게는 큰 근심이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내 몸에 가시가 있었다고 했는데 그 가시를 우리는 몸에 있었던 질병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몸의 질병보다 더 큰 고통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동족의 복음화였습니다. 그래서 표현하기를 “내 골육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바라는 바이라”고 했습니다. 즉 “내가 지옥형벌을 받는 한이 있어도 내 형제 친척을 구원하여 주소서“라는 말입니다. 

이 기도가 영혼을 찌르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철든 기도이고 눈물의 기도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기도요 마음입니다. 그 바울의 기도가 하나님이 가장 바라시는 마음이고 목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기도에 흡족해 하시고 위로받으시고 기뻐하십니다. 

또 모세의 기도입니다. 죄를 짓는 백성들을 보시고 하나님이 저들을 멸망시키시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모세가 백성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하였습니다. “이 백성을 사 하소서, 이 백성이 언제는 선했습니까, 언제는 의로웠습니다, 언제나 악한 이 백성이었지만 그럼에도 오늘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는데 지금 와서 이 백성을 멸망시키시겠다고 하면 이방인들이 그리고 애굽인들이 하나님을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이 백성을 사하여 주소서, 만일 이 백성을 사하지 않으시면 나도 이 백성과 함께 죽을 테니 주의 생명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주소서.” 

모세는 정말 내 이름을 지워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가 철든 기도이고 눈물의 기도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기도입니다. 그때 모세가 철이 없어 보십시오. 그러면 그런 기도가 나왔겠습니까. 또 하나님께서 멸하시겠다고 했지만 정말 멸하시려고 그랬겠습니까. 모세는 그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이해하였습니다. 자기가 보아도 이 백성들은 멸망 받아 마땅한 백성입니다. 자기가 보아도 이 백성은 너무 타락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그런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서 중보를 하고 있습니다. “이 백성을 용서하소서, 만일 용서하지 않고 멸하신다면 생명책에서 내 이름도 지워 버리소서.” 모세가 그 기도를 할 때 그냥 하였겠습니까. 그때 모세는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 기도가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그 기도가 철든 기도이고 그 기도 속에 눈물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기도입니다. 

또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3년 사역은 눈물의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살리고 고치고 눈을 뜨게 하고 물위를 걷고 귀신들린 자를 온전하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어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왜 나를 믿지 않느냐”고 눈물로 하소연하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고 눈물도 흘리셨습니다. 

얼마 후 멸망해 버릴 도성에 살면서도 그런 미래를 전혀 모르고 생각 없이 살아가는 백성들 모습을 보시며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십자가 행렬을 따라오며 눈물짓는 여인들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당부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통곡의 사역이었습다. “내가 너희를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는데 왜 나를 믿지 않느냐”고 한탄하셨습니다. 슬퍼하셨습니다.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직전에는 감람산에 올라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하고 통곡하시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마음입니다. 

오늘은 이 눈물이 없는 시대입니다. 오늘은 눈물의 기도가 없는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설교를 듣고 변화가 없고 아픔이 없는 것입니다. 전도를 해도 응답자가 없습니다. 어찌할꼬 하고 탄식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눈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혼을 위하여 눈물짓는 기도가 없고 철든 기도가 없고 응답 있는 기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고 헤아리는 신앙이 철든 신앙이고 성숙한 믿음입니다. 

김길태가 큰 사건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저지른 사건보다 더 큰 사건은 그가 눈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를 주어다 기른 그 부모들이 더 마음이 상하는 것입니다. 피해자 가족들이 더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 국민 과 나라 전체가 분노하고 이 시대가 분노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눈물이 없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성경에 나오는 두 탕자들도 눈물을 흘리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작은 탕자는 배가 고프니까 집에 돌아왔습니다. 미안하니까 일꾼 중 하나로 여겨달라고 했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마음이 전무하였습니다. 온통 마음에는 동생이 재산 탕진한 것만 생각하였고 또 내게 주어진 몫에서 동생에게 얼마나 또 떼어주어야 하는가 해서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누가 탕자입니까. 물질을 탕진했다고 다 탕자는 아닙니다. 집을 나갔다고 해서 모두 탕자는 아닙니다. 오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탕자들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눈물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헤아림이 없으니까 그 눈에 눈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안타까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위로 받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도 사랑받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어디서 알 수 있는가 하면 그런 하나님의 모습을 탕자의 비유 속에 서 발견하게 됩니다. 탕자의 비유는 두 아들이 방탕하였다는 것이 내용은 아닙니다. 아버지를 몰랐다는 것이 내용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탕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는 그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탕자입니다. 

사순절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기간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로하는 기간입니다. 예수를 세상에 보내 십자가에서 죽이면서까지 세상을 사랑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외로운 결단을 이해하고 숙연한 마음과 철든 생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위로하는 시간이 사순절 기간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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