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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염려의 늪에서 벗어나는 삶 (빌 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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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의 늪에서 벗어나는 삶 (빌 4:6~9)


사람은 평생 동안 염려의 늪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이 없다고 늘 상상력이 멈추지 않는 한 염려거리는 늘 있습니다. 이 염려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창조적 염려와 파괴적 염려입니다. 성경에 보면 오늘 말씀처럼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파괴적 염려를 말합니다. 성경에는 염려를 긍적적으로 말씀하는 내용도 나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성경에 여러 차례 나옵니다. 

고전7:34에 보면 “주의 일을 염려하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바울은 주의 일을 위해 염려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11:28절에서는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라고 말씀합니다. 교회를 위해 염려하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3:12절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딤전 3:7절에서는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염려는 창조적인 염려입니다. 신앙적인 염려입니다. 영적인 염려입니다.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염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은 파괴적인 염려를 말씀합니다.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 박사이자 상담가인 베벌리 포터는 그의 책 [쓸데없는 걱정 현명한 걱정]에서 파괴적인 염려를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말합니다. 이 쓸데 없는 염려는 마약과도 같은 중독성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쓸데없는 걱정부터 중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파괴적인 염려는 세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삼 부 즉 세가지 부에 의해 생깁니다. 

첫째는 부정적인 경험입니다. 둘째는 부정확한 미래입니다. 셋째는 부정적 상상(가정)입니다. 

위가 조금 아프면 어머니가 위암으로 돌아가신 부정적인 경험이 있는 아직 진찰도 받아 보지 않았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자신도 위암으로 죽을 것이라고 부정적인 상상을 합니다. 그리고 염려의 늪으로 들어갑니다. “자신이 죽으면 아이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남편은 새장가를 갈 것인가?” “아이들 결혼식 때 어머니 자리에 누가 서 있을 것인가?” 쓸데없는 염려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면 그 염려는 반드시 세가지 “불”을 가지고 오게 되어 있습니다. “불안, 불익, 불신”입니다. 마음이 불안합니다. 감정적 마음은 파국을 상상하고는 마치 그것이 실제 상황인 양 반응하게 합니다. 

불안한 감정적 마음이 우리 몸으로 신호를 보내어 위험과 위협이 있노라고 알리면, 몸은 이에 대비하게 되는데, 신체적 긴장을 감지한 감정적 마음은 더 많은 불안과 걱정을 유발하여 불안을 고조시키는 악순환을 작동시킵니다. 질병에 대한 저항력을 파괴하고, 소화불량, 신경쇠약, 궤양, 두통, 발진, 초조해지고 숨이 가쁘며, 잠을 못 이루고, 쉽게 피곤해하며, 식욕을 잃게 하고, 소변을 자주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며, 혈압을 높이며, 혈액 속의 화학적인 변화를 일으키며, 성격을 조급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

불익을 가져다 줍니다.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영적 성정을 저해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마 13:22)
예수님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마 6:27)” 

파괴적인 염려는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 냅니다.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욥 3:25)“

불신을 가져다 줍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파괴해 버립니다. 믿음을 약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미래란 소망과 기대로 주었는데 미래를 염려의 대상으로 삼아 버립니다. 쓸데없이 염려는 사람을 극단으로 치닫게 합니다. 조마조마한 염려 속에서 조그만 위험의 징조를 유심히 살피고는, 이를 곧 닥쳐올 불행으로 확대해석하고 그 발생 가능성을 과대평가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세 가지입니다. 심사숙고하고 반성하며 분석하고 계획하는 '이성적 마음(rational mind)'과 직관적이고 반사적이며 논리적이지 않은 '감정적 마음(emotional mind)' 모든 것을 절대적인 하나님을 신뢰하고 신앙적으로 해석하는 신앙적 마음입니다. 일상적일 때는 이성적 마음이 우위를 차지하므로, 생각이 감정에 앞섭니다. 하지만 위급 상황에서는 감정을 관장하는 뇌가 우세해지므로, 힘의 균형이 신속하게 감정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쓸데없는 염려를 하면 만성적으로 신체적 스트레스를 받고 사고력은 감퇴하고 판단을 흐리게 하여, 평소 같으면 하지 않았을 방식으로 행동하게 하여, 성취도도 떨어지고 학습능력을 저해하고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을 왜곡시킨다는 것입니다. 신앙적 마음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가 이런 파괴적인 염려의 늪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말씀이 그 처방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1. 우리가 파괴적인 염려의 늪에서 벗어나려면 염려란 자신을 황폐화시키는 심각한 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염려란 무엇입니까? 우리말 큰 사전에 "앞 일을 이리저리 헤아려 걱정함. 또는 그런 걱정"이라고 설명해 놓았습니다. 이것은 미래에 대하여 계획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어떤 일을 곰곰이 생각하며 신경을 쓰고 안달하며 속을 썩이는 걱정을 뜻합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에 대하여 골똘히 생각하며 부정적으로 상상하고 걱정하는 것입니다. 

헬라어는 ‘메림나오’입니다. "나누다"라는 의미의 메리조와 "마음"이라는 의미의 “누스”라는 두 개의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어원적 의미로 염려란 "마음을 나눈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염려하면 그 마음이 분열되어 갈라지기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생각이 드는가 하면 저런 생각이 들게 되고 또 다른 생각이 들어 마음은 안정을 잃게 되고 불안하고 걱정과 근심에 싸여 안절부절하게 됩니다. 염려는 하나님과 갈라놓고 이웃과 갈라놓고 자기 자신의 마음까지 갈라놓기 때문에 항상 평안이 없고 불안하고 초조해 지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염려의 늪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사람은 의식이 멈추는 순간까지 끝임 없이 크고 작은 염려로부터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며 살다가 염려할 수 없는 의식의 상태로 염려 덩어리로 쌓인 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심리학자 Bridges 에 의하면 유아는 생후 3 개월이되면 쾌. 불쾌를 느낀다고 합니다. 6개월이 되면 분노. 혐오. 두려움 등의 감정이 생긴다고 합니다. 염려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을 때부터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와 살다가 상상할 수 없을 때 떠납니다. 그런데 파괴적인 염려는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의도적으로 하지 말아야 할 죄입니다. 

1)염려는 불신앙의 죄입니다.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

예수님과 함께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를 건너갈 때 폭풍으로 배에 물이 들어왔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두려워하며 염려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염려하는 그들을 향하여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였습니다. 염려의 근본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입니다. 약속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의심은 염려를 낳고 염려는 마음을 분열시켜 하나님에 대한 신뢰마저도 불신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속입니다. 

2)염려는 마음에 질병을 가져다 주는 죄입니다. 

염려는 사람의 심령과 육체를 상하게 하고 병들게 하는 파괴적 위력으로 나타납니다. 염려가 어디에서 일어납니까? 7절에 보십시오. 마음과 생각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데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통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우리 마음대로 다스리기란 어렵습니다. 마음은 인격의 좌소를 말합니다. 생각은 사고를 말합니다. 마음은 지적인 것이 있습니다. 마음은 감정이 있습니다. 마음은 의지적인 것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병이 걸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마음은 곧 지적인 사고를 발동하게 되고 감정을 갖게 됩니다. 우리의 사랑과 관심 자체가 근심의 원인이 됩니다. 아마 우리가 부모님에 대하여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면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부모님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이 생각을 상상의 날개를 달고 날아갑니다. "이 병으로 어떻게 될까? 돌아가지지 않을까?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우리는 어떻게 살까?" 이런 상상을 몇 시간씩 하며 괴로워합니다. 

이것이 염려입니다. 염려는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킵니다. 올바른 판단을 못하도록 합니다. 지나치면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을 시도하게 합니다. 지나친 걱정은 신경과민, 신경쇠약에 걸리게 합니다. 염려는 육체의 건강을 앗아가고 수명을 단축시킵니다. 염려라는 말은 ‘질식시키다’ 또는 ‘목을 조이다’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염려는 삶의 기쁨을 질식시키고 희망을 질식시킵니다.

(잠15:13)"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잠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


3) 염려는 염려의 상황을 결국 만들어 가는 죄입니다.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욥 3:25)“

주님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하라는 것 하지 않고 하지 말라하는 것을 하면 죄입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살인하면 그것 역시 죄입니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거짓말 하는 것 역시 죄입니다. 염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거짓말은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 염려는 적당히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하는 것은 명백히 죄이며 계속적으로 염려하면 그 죄의 삯은 사망으로 나타납니다. 

어니 J 젤린스키는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사건에 대한 것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 22%는 사소한 사건들, 그리고 4%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사건들이다. 나머지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진짜 사건들"이라고 말했습니다. 96%의 염려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귀중한 인생을 황폐화시켜서는 안됩니다.


2. 우리가 파괴적인 염려로부터 벗어나려면 기도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맡겨야 합니다.

염려가 죄라는 사실을 알고 "염려하지 말아야지"라고 결심하고 각오한다고 염려의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염려는 우리 마음으로 제어하기 힘드는 것입니다. 이 염려는 스스로 염려하지 않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단지 "염려하지 말라"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씀합니다. 기도(prayer), 간구(supplication)로 감사함으로 아뢰하고 했습니다. 

1)기도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기도하라는 말은 예배하고 경배하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과 대면한다는 말을 포함합니다. 염려가 있으면 마음은 하나님께 나오기 보다 그 염려의 쓰레기 통으로 먼저 가게 됩니다. 문제의 해결점은 하나님께 나오는데 있습니다. 염려 거리가 없다면 사람들이 하나님께 잘 나오겠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겠습니까? 

염려는 하나님께 나오는 도구입니다. 아이 못난 한나가 브린나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힘없는 다윗이 골리앗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병 환자가 나병 때문에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혈루증 여인이 혈루증 때문에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간구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정직하고 진솔하며 진지하게, 애절하게, 절박하게 나의 염려 문제를 나 혼자 해결하지 말고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7절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실망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방황하십니까 주님앞에 무릎 꿇고 간구해보세요 마음을 정결하게 뜻을 다하여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2)무엇보다도 그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 원망하는 마음이 아니라 감사하는 것입니다.

염려의 문제로 인해 내 신앙이 성장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더욱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처럼 감사함으로 아뢰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를 죽이려는 음모를 다니엘이 알고 있습니다. 염려거리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한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단 6:10)”였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벧전 5:7)”

문제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 전체를 맡기는 것입니다. 문제만 맡겨 놓고 또다른 염려는 하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 전체를 맡겨버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37:5)”신다고 말씀합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55:22)”

우리 인생의 무거운 짐을 우리 하나님께 맡기면 우리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고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흔들리지 않게 해 주십니다. 
복잡한 문제가 있으면 복잡할수록 여호와께 맡겨야 합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잠 16:3)”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렘 17:7-8)”

내일은 염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소망과 기대의 대상입니다.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기도로 여호와께 맡겨버려야 합니다. 


3. 염려의 늪에서 벗어나려면 생각 자체를 복음적 생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기도하고 계속 마음은 상상의 날개를 펴서 염려의 쓰레기 통을 뒤지고 다니면 안됩니다. 기도하고 끝내면 안됩니다. 컵에 검은 물을 넣고 아무리 흔들어도 물은 맑아지지 않습니다. 맑은 물을 컵에 넘치도록 부어야 합니다. 부정적 가능성을 상상하며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 가능성을 상상하며 기대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6가지 나와 있습니다. 무엇에든지 “참됨, 경건, 옳음, 정결, 사랑받을 만함, 칭창받을 만함” 파괴적인 염려 거리가 생기면 이 여섯가지 생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적 생각입니다. 신앙적 생각입니다. 생각은 행동을 만들고 행동은 습관을 만들고 습관은 결국 인생을 만드는 것입니다. 생각이 중요합니다. 어둠은 결코 어둠으로 물리칠 수가 없습니다. 작은 빛이지만 빛이 들어오면 어둠은 물러가는 것입니다. 

창의력 개발 전문가인 에드워드 드 보노는 그의 저서『여섯 가지 유형의 사고 모자(The Six Thinking Hats)』에서, 객관적· 감정적· 지지적· 가능성· 비판적· 전략적 사고라는 여섯 가지 기본 사고 유형을 말합니다. 각각의 사고 유형에는 그에 상응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무엇이 사실인가(객관적 사고),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감정적 사고), 무엇이 실제적인가(지지적 사고), 현재 가능한 것은 무엇인가(가능성 사고),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비판적 사고),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전략적 사고)- 등입니다. 

염려의 상황이 오면 이 여섯 가지 사고 유형이라는 각기 다른 렌즈를 통해 바라봄으로써, 습관화된 비판적 사고를 깨뜨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습은 염려스러운 상황을 자꾸 더 깊이 파고들어 비극으로 몰아가지 않도록 해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학자들의 견해도 참고해야 하지만 말씀을 더욱 처방전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 염려하고 있는 것이 참된 것인가를 물어 보고 참되지 않으면 참된 것으로 채웁니다. 경건한가를 물러보고 경건하지 않으면 경건한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옳은가 확인해 보고 옳지 않으면 옳은 생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정결한가 확인해 보고 정결한 생각이 아니면 정결한 생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사랑받을 만한가 확인해보고 사랑받을 수 없는 것이라면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칭찬받을 만한 생각인가 확인해 보고 칭찬 받지 못한 생각은 바꾸는 것입니다. 

기도해도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부정적인 생각, 절망적인 생각, 두려운 생각, 걱정 거리를 복음적인 생각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좋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복음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입니다. 죽어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 말고 다른 세상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롬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4. 우리가 파괴적인 염려의 늪에서 벗어나려면 예수님으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여야 합니다.
이렇게까지 하면 염려 문제가 완전히 해결됩니까? 이제 진정한 평강이 마음을 사로잡게 됩니까? 오늘 본문은 한 가지를 더 첨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라는 것입니다. 염려의 문제가 있으면 기도하고 마음만 바꾸고 방에 주저 앉아 있으면 안됩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행동해야 합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세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문제를 정의하는 것입니다. 문제와 그에 따르는 위험이나 한계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선택 사항과 대안 마련을 하는 것입니다. 해결책을 구체화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단계는 해결책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염려만하고 있으면 홍해는 갈라지지 않습니다. 여호수아가 요단 강 앞에서 염려만하고 여리고 성 앞에서 염려만 하고 있었다면 요단강을 건널 수 없었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같지만 지팡이를 내밀고 법궤를 메고 들어가고 침묵하며 도는 것입니다. 이럴 때 염려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 복음적인 요소가 추가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복음이 전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단순히 일상생활의 수정이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삶으로 출발해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동일한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똑같이 살지 않습니다. 복음적으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과는 조건이 충족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무조건적이지만 우리에게 오는 삶의 축복은 조건적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출 20:12)" 장수는 부모 공경으로 오는 축복이라고 말씀합니다. 축복과 저주에 대하여 (신11:13)은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약 8복을 보십시오. 조건적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복있습니다. 아무나 복이 있는 것 아니고 심령 가난 그리고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지식에 만족하고 교리에 만족하는 위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약 1:25)”

"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요 13:17)" 
실행하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마7:24 경고를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 7:24)"

순종이 없다면 우리는 성령의 축복을 기대할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복음에 의해 지배된다고 해서 모든 걱정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합니다. 기도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기도해 놓고 다 끝났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행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해 주십니까?
9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평강의 하나님이 지켜 주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신다는 말입니다. 지키신다는 말은 “수비하다. 경계하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삶의 성벽과 망대 주위를 돌아가면서 지켜 주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에 있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의 활동들은 외부로부터 불안과 근심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마음과 생각이 가출하여 시궁창으로 돌아다니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마음과 생각이 쓰레기통을 돌아다니며 잡다한 것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그 모든 것을 지켜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 안에서 완전한 평강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입니다. 이 평강을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세상이 줄수 없는 세상이 알수도 없는 평안 평안 평안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염려가 있습니까? 염려는 죄입니다. 염려가 있을 때 기도하십시오. 그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기도함으로 끝내지 말고 염려하는 마음을 복음적인 마음으로 바꾸십시오. 그리고 복음적인 삶을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염려는 사라지고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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