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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극히 큰 상급과 믿음 (창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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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큰 상급과 믿음 (창 15:1~6)


(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방패요 상급이신 하나님

우리 신체에 바이오리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략 한 달을 주기로 신체리듬이나 감정리듬이 파도처럼 사이클을 그리며 상승과 하강 곡선을 그립니다. 상승 상태에 있을 때는 컨디션이 좋고 하강 상태에 있을 때는 컨디션이 좋지 않습니다. 산을 오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르막 길과 내리막 길이 교차합니다. 운동선수도 그렇습니다. 항상 컨디션이 좋을 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슬럼프일 때도 있습니다. 탁월한 운동선수는 슬펌프를 잘 이겨냅니다. 기본기에 충실하면서 슬럼프를 관리하다 보면 다시 컨디션이 회복됩니다. 야구선수나 골프 선수는 하루에 수백번식 기본 스윙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슬럼프 기간을 잘 관리하지 못하면 그 기간이 오래 걸리고 다시 정상에 서지 못할 경우도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도 싸이클을 그립니다. 신앙의 컨디션이 좋을 때도 있고 슬럼프일 때도 있습니다. 상승과 하강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처음 가나안 땅을 향하여 출발했을 때는 신앙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오고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피난가면서 슬럼프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험한 꼴은 면했지만 잘못했으면 아내를 잃을 뻔 하였습니다. 이후 재산이 풍부해 돌아왔지만(상승) 이 때문에 조카 롯과 헤어져야만 했습니다(하강). 조카 롯과 헤어진 후 힘을 길러 자기 집안에 318명의 사병을 두고 주변 왕국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용맹함을 보입니다(상승).

그러나 15장에는 아브라함에게 다시 신앙의 슬럼프가 찾아왔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두려워하고 있으며 낙망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이 항상 좋을 수만은 없습니다. 풍부한 때도 있고 빈곤한 때도 있습니다. 풍요로운 때는 주님의 일을 활발히 하고 빈곤할 때는 내적으로 다져야 할 때고 잘 견뎌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두려워하고 있고 또 한편 지쳐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말씀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두려움은 14장의 도시 왕국들과의 전쟁이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병 300여 명을 거느린 일개 부족장에 불과하고 상대는 시날 왕, 엘람 왕이라 불리는 왕국들입니다. 갑작스런 기습으로 인하여 아브라함에게 당했지만 나중에 자기를 급습한 세력이 일개 부족장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 왕들의 분노가 어떠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이 일 때문에 염려하고 전전긍긍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려워 말라 내가 너에 방패가 되어 주겠다고 말씀하시며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싸울 때 방패는 매우 중요한 방어수단입니다. 

적들의 칼과 화살을 막아냅니다. 하나님이 방패가 되어 아브라함을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은 기근에서 아브라함을 지켜주셨고, 애굽에서는 바로의 권력과 탐욕으로부터 아내 사라와 자기 목숨을 지켜주셨습니다. 왕국들과의 싸움에서는 아브라함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셨을 뿐만 아니라 승리케 하셨습니다. 이제 그 하나님이 두려워하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다시 내가 너의 든든한 방패임을 확인시켜줍니다. 

우리 생명과 안전을 지켜주는 것은 사람이나 세력이나 무기나 자기 용맹이나 지혜가 아닙니다. 물론 이것들도 필요하지만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대적들은 우리보다 강하고 또 언제 갑작스럽게 공격해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공격에 쉽게 넘어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만 기도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방패가 되셔서 모든 어둠의 세력과 사람들과 질병들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시도록 말입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 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시3:5-6)고 고백합니다. 다윗이 수많은 전쟁터에서도 편안히 누워 자고 깰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방패가 되어서 다윗을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을 갖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염려와 두려움만이 가득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또한 아브라함에게 줄 상급이 지극히 크다고 하시며 아브라함을 위로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지쳐가고 있습니다. 몸은 늙어 가는데 아들은 태어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약속의 땅에 온 지도 한참이 되었건만 자기 소유로 등록된 땅이 한 평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도 가물가물해져 갑니다. 이 길을 괜히 나선 것은 아닌가 하는 후회도 듭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줄 상급은 시시하지 않으며 지극히 크다고 말씀합니다. 

어느 정도 큰가? 5절에서 하나님은 자손이 소수가 아니라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18절에서는 땅 몇 평 정도가 아니라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줄” 것이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시고자 하는 상급이 너무 크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지금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큰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매우 현실적인 분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줄 상급은 내세에 받게 될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현실에서 받게 될 땅과 자녀의 축복이었습니다. 예수님도 마가복음 10장 29절과 3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들에게 내세의 약속뿐만 아니라 금세에 그 100배로 갚아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금세라고 하였습니다. 이게 무슨 말씀일까?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주님 말씀이 맞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100배의 형제자매들을 주셨습니다. 교회 우리 식구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친척들보다 더 자주 만나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서로를 사랑합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 교회 식구들이 함께 하고 도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땅도 100배로 갚아주시겠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무소유를 지향하는 불교와 기독교의 길이 다른 것 같습니다. 지난 주간에는 『무소유』란 책과 그런 삶으로 유명하셨던 법정 스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무소유에 대해서 이분은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은 예화를 들고 있습니다. 법정 스님이 난을 키우게 되었습니다. 뜨거운 태양을 가려주고 비도 적당히 맞게 하면서 정성껏 길렀습니다. 어느 장마철 외출할 때 비 좀 맞으라고 난을 밖에 놔두고 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햇볕이 쨍쨍 내려쬐기 시작했습니다. 

뜨거운 햇볕을 받아 시들어 있을 난을 생각하니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아서 바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때 법정 스님이 깨달은 것이 바로 무소유의 자유함이었습니다.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그 만큼 얽히는 것이고 부자유한 일입니다. 스님은 그 길로 돌아와서 난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 버렸다고 합니다. 불교는 이처럼 집착을 떠나 무소유를 지향합니다. 법정 스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뜻이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많은 재산,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권리가 많아지지만 그에 비례해 염려도 더 많아지고 스트레스도 더 많아집니다. 될 수 있으면 많이 버리고 비울수록 우리는 행복해집니다. 

이와 달리 기독교는 얽히고 소유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서로 얽히는 것을 사랑이라 합니다. 하나님은 귀찮을 정도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의 일에 간섭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필요를 위해서 물질을 만드셨고 인간이 이 물질을 소유하길 원합니다. 다만 그것이 탐욕으로 흐르지 않고 잘 사용되기를 원하십니다. 그 사랑하는 자에게는 더 많은 물질을 주시려 하시고 그 물질로 다른 사람들을 복되게 하는 복의 근원이 되라 말씀하십니다. 무소유나 비움이 필요한 이유는 선한 물질의 관리자가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길을 선택하고 싶습니까? 각각은 나름의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은 가난한 자에게 물질의 축복을 약속하시고 부유한 자들에게는 절제와 나눔, 선한 관리를 요청합니다. 지금 가난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지극히 큰 상급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의 항의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아브라함의 항의입니다. 2절과 3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매우 화가 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극히 큰 상급을 줄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이 회의적인 태도로 묻습니다.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하시는데 도대체 무엇을 주시겠다는 것입니까? 나는 큰 것은 바라지 않고 자식 하나만 필요할 뿐입니다. 나는 지금 무자합니다. 그러니 나의 유산이나 하나님의 약속은 내가 부리던 종들 중의 하나인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은 3절에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하며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신성모독에 가까운 항의입니다. “상급이요? 웃기네요!” 하는 태도입니다.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기도 응답이 더딜 때 또 내 인생이 꼬일 때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듣고 계신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가? 하는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재미있는 것은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하나님께 항의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하나님이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고 물을 때 가인은 뻔뻔하게도 “내가 네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하고 대답합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회개의 말씀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자기 생각과 맞지 않다고 하여 멀리 다시스로 달아나려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갈멜 산의 승리 이후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하나님께 자기는 자기 열조보다 못하다고 하며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합니다(왕상19:4). 

욥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의롭게 살았지만 자기 재산을 다 잃고 자기 자녀들이 다 죽고 자기 몸에는 악창이 나고 친구들은 자기 죄를 책망하자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항상 살기를 원치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욥17:16)하고 기도합니다.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욥7:19) 하고 주님께서는 더 이상 내 인생에 간섭하지 말라며 불만을 표출합니다. 

피조물이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이렇게 만만히 대해도 되는 것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의 이런 회의와 불만을 그대로 받으십니다. 성경이 여러 차례 그대로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느 경전이든지 신 앞에는 절대적인 순종만이 요구됩니다. 잘못되었다면 인간이 잘못했기에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만은 유달리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탄식으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원망을 그대로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인간의 삶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엄격한 자연의 법칙이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이시기에 자식들의 푸념을 그대로 듣습니다. 마치 시집살이 힘들다고 하며 푸념하는 딸의 하소연을 듣는 친정어머니와 같은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게 이처럼 탄식하고 때로는 원망하는 이유는 그분이 살아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향한 우리의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원망이라도 해야 속에 있는 답답함이 풀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원망하고 탄식하는 것에 대해서 죄송스러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도 인정하고 하나님도 기꺼이 받아주실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주의 병에 담으시는 분입니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시편56:8) 원망과 한숨에 대해서 자신이 책임지려 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기쁨과 찬양으로 바꾸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실 것이다”(사61:3)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근심과 원망을 하늘의 별을 보여주심으로서 위로하시고 새 희망을 품게 하십니다.

별을 바라보라

한바탕의 항의가 끝나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장막 밖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5절에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이 말씀이 얼마나 친근한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손을 잡고 장막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장면을 한 번 그려보십시오. 아마 아브라함은 기도 중에 하나님을 만났던 듯합니다. 좁은 장막 안에서는 우리의 생각도 좁아집니다. 넓은 하늘을 볼 때 우리 마음도 넓어집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늘을 우러러보라고 합니다. 하늘에 별을 셀 수 있냐고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여러분 하늘의 별을 셀 수 있습니까? 하늘의 별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분이 사방을 둘러보며 별을 세더니 하늘의 별의 숫자가 840개라고 하였습니다. 이 분의 계산은 이렇습니다. 동쪽을 보아도 별이 ‘백 백’하고 서쪽도 ‘백 백’하고 남쪽도 북쪽도 마찬가지로 ‘백 백’하더랍니다. 그러니 각 방향으로 백이 두 번씩 사방이니까 800 개입니다. 그리고 하늘 중앙을 보니 별들이 ‘스물 스물’하더랍니다. 그래서 스물이 두 번이니까 40 개, 도합 840개라고 합니다. 웃자고 한 소리입니다. 별은 정말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온 해변과 사막 등 온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모래 알갱이보다 열 배 많은 것이 별의 숫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아주 시청각적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냥 네 자손이 많다는 것과 실제 별을 보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며 보여주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별을 보며 새 희망을 품습니다. 별을 볼 때마다 자기 자녀들을 그리며 새 힘이 돋습니다. 신앙은 이처럼 별을 보는 것입니다. 막연한 미래의 희망이 아니라 별처럼 생생한 희망을 품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일 대학교 야로 슬라프 펠리칸 박사는 “땅을 바라보면 비관주의자가 되고 하늘을 바라보면 낙관주의자가 된다. 땅을 바라보면 우울한 사람이 되고 하늘을 바라보면 밝고 즐거운 사람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가끔 하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인은 눈앞의 현실을 보는 자들이 아닙니다. 미래를 보며 달려갑니다. 그러나 그 미래는 마치 손에 잡힐 듯한 미래입니다. 

그래서 환상이 필요합니다. 자기 인생의 목표가 마치 그림처럼 그려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비전처럼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온 물이 발목을 적시고, 무릎을 적시고, 허리까지 차고, 창일한 물이 되어 도도한 강물을 이르고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모든 고기들이 살고, 이 물이 사해바다로 흘러가 죽은 바다를 살리는 환상을 그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새로운 그림을 주셨습니다. 전에는 동서남북을 바라보게 하고 땅의 티끌을 만지며 꿈을 품게 하시더니 이제는 하늘의 별을 보며 새로운 꿈을 꾸게 만드십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하나님의 의

이런 아브라함을 보며 하나님은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성경에서 의인이라고 할 때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의롭다 의인이다고 할 때 도덕적으로 완벽한 성인군자를 떠올립니다. 그런 의인은 성경과 관련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의롭다는 말은 법정적인 의를 말합니다. 법정적인 의라고 하는 것은 서로 싸우고 있는 둘 사이에서 판단하여 한 쪽 사람이 옳다고 선언할 때의 의입니다. 그러니 도덕적 완전성이나 흠이 없는 것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이 의는 동시에 관계적 의라고 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서로에게 부과된 요구를 잘 수행할 때 상대방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인정하신 것은 그의 인격을 보고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 잡은 것은 없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아버지를 신뢰하고 있는 어린 자녀의 모습과 같다 할 것입니다. 자녀가 인격적으로 성숙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신뢰하는 모습을 보고 그 아버지는 기뻐하고 자녀를 사랑합니다. 이것이 의롭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어려운 것이나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그분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지만 그 분의 계획과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이 하는 일을 지켜 볼 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주신 것도 그래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 것도,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대하20:20)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사30:15) 하나님을 신뢰할 때 문제를 돌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때 눈이 열리고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승리하고 축복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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