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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염려를 주께 맡겨버리라 (마 6:2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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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를 주께 맡겨버리라 (마 6:24~34)


강도가 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몇 년째 잠을 편히 못 자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조그마한 소리만 들려도 한밤중에 곤히 자는 남편을 깨우는 통에 남편도 잠을 설치기 일쑤였습니다. 드디어 어느 날 밤, 자다가 집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해서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니 정말로 강도가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 남편은 강도를 향해 말했습니다. “안녕하시오. 만나서 반갑소. 위층에 올라가 내 아내를 좀 만나주시오. 10년째 당신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다오.” 

염려는 말썽이 생기기도 전에 말썽이 생길 거라고 믿는 잘못된 믿음이다. 염려 자체가 인간에게는 저주입니다.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어느 마을에 죽음의 사자가 찾아왔습니다. 죽음의 사자는 돌림병으로 200명을 죽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장이 죽음의 사자와 담판을 지어 100명으로 줄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700명이 죽었습니다. 죽음의 사자에게 이장이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죽음의 사자가 하는 말이 “나는 100명밖에 죽이지 않았어, 나머지 600명은 염려로 죽은 거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잠17:22에서는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근심의 독이 얼마나 강한지 뼈까지 마르게 만듭니다. 염려는 자기를 죽입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염려, 근심, 걱정 중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돈 문제입니다. 아마 여러분이 염려하고 걱정하고 근심하는 가장 큰 문제도 역시 돈 문제일 것입니다. 주님은 본문 앞부분에서 돈에 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 영적으로 밝은 눈을 갖고 싶으면 돈을 바로 사용하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돈과 하나님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라고 말씀하신 후에 염려에 관한 본문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크기는 다르지만 염려가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염려 없는 생활입니다. 남보다 염려가 작은 생활이 아니라 염려 없는 생활을 요구하십니다. 
오늘 설교는 크게 두 가지를 다루겠습니다. 먼저는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믿는 사람들이 염려하는 대신 해야 할 것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신자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염려는 해롭기 때문입니다.
‘염려’라고 하는 헬라어는 ‘메린나우’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메리조’라고 하는 단어와 ‘누스’라고 하는 단어가 합쳐진 것입니다. 이 ‘메리조’는 ‘나눈다’, ‘누스’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결국 염려를 하면 마음이 나누어집니다. 24절에 보면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을 말씀합니다. 염려하면 하나님만 섬겨야 할 사람의 마음이 둘로 나뉘어서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도 함께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습니다. 한 부인이 두 남편을 섬길 수 없듯이 하나님과 다른 어떤 것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눅21:34 말세에 성도들이 빠지기 쉬운 악 세 가지를 말합니다.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입니다. 사람들은 방탕함과 술 취함이 경건에 얼마나 해가 되는지 잘 알고 있지만 염려도 동일하게 해가된다는 사실은 잘 모릅니다. 주님은 방탕함과 술 취함이 해로운 것처럼 염려도 해롭다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마13:21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를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염려하는 사람은 말씀을 들어도 열매 맺지 못합니다. 가시의 기운이 씨앗의 기운을 빼앗아서 자리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염려는 신앙의 기운을 빼앗아서 열매맺지 못하게 하는 해로운 것입니다. 

‘걱정, 근심’은 영어로는 ‘Worry’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Worry’의 어원에는 ‘물어 뜯는다’, ‘짐승이 이빨로 목을 꽉 물어 질식해 죽인다’는 무서운 의미가 있습니다. 염려는 염려하는 사람을 질식시켜 버리는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17장 22절에는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국에서 어느 테니스 선수가 치과 치료를 받다가 쇼크를 받아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그가 죽은 이유는 두려움과 염려 때문입니다. 이 선수의 어머니가 치과에서 이를 치료 받다가 쇼크로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었는데 그 일로 이 선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후 이 선수는 아무리 이가 아파도 치과를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치과에 가면 꼭 죽을 것 같은 강박관념을 가졌습니다. 테니스선수쯤 되면 남달리 건강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빨을 치료하는 일은 죽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의 이빨이 몹시 아프기 시작했을 때 그는 심한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치과에 가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된 그는 하는 수 없이 치과에 갔습니다. 그는 치과에서 이를 치료 받다가 결국 그의 어머니와 같이 심장 마비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지나친 두려움으로 염려하다가 죽어 버린 것입니다. 염려는 해가 됩니다. 그러니 염려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2) 염려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에너지만 소비할 뿐입니다(27절).
주님의 표현이 기가 막힙니다. 키가 작은 사람이 염려한다고 키가 커지는 것이 아니듯 염려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제가 실제로 경험한 말씀입니다. 저는 중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큰 편에 속했는데 갑자기 성장이 멈추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키 때문에 염려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염려해도 키가 더 커지지 않았습니다. 제 염려는 키 크는데 도움이 안 된 것 뿐만아니라 저의 에너지만 소비했던 무익한 일이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염려하는 것은 자동차 기어를 중립에 놓고 가속페달을 밟는 것과 같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기어를 중립에 놓고 가속페달을 밟아보세요.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리 밟아도 자동차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엔진이 죽어라고 돌아가도 자동차는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소리는 요란하게 나고 기름은 소비되지만 자동차는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기어를 중립에 놓고 가속페달을 밟는 것은 무익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염려도 무익한 것입니다. 
  
3) 염려는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34절에 보면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은 사람들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가불해서 걱정한다는 것입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미리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 건강한데 미리 병들 것을 걱정합니다. 지금 힘이 있는데 미리 피곤할 것을 걱정합니다. 지금 넉넉한데 미리 궁핍할 것을 걱정합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아서 랭커라고 하는 사람은 조그만 사업을 했는데, 사업이 잘 안됐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매일 불안하고 걱정으로 하루하루 고민하며 사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미래가 밝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내가 이렇게 매일매일 염려에 시달리며 살게 아니라, 염려하는 날을 정해서 그 날만 염려를 한꺼번에 하고 평소에는 염려를 하지 말아야 되겠다’ 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랭커’는 한 주간의 수요일을 염려하는 날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수요일 염려하는 날 박스’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평소에 염려거리가 생기면 그 염려의 내용과 그 염려가 생긴 날짜를 쓴 카드를 그 함에 집어넣었습니다. 당장 염려가 되지만, 수요일에 한꺼번에 염려하기로 하고 그 쪽지를 집어넣고 잊어버리는 겁니다. 날마다 그렇게 하고 수요일이 되면 함을 열고 자신의 염려거리가 뭔지 한꺼번에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불과 일주일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거의 다 이미 해결이 됐거나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문제로 변화된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는 겁니다. 아서랭커와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염려하지 않아도 될 만한 일로 염려하고 살고 있으니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염려 대신 우리가 할 것은 무엇입니까?

노벨 의학상을 받은 카렐 박사는 “근심과 싸우는 방법을 모르는 사업가는 일찍 죽는다.”는 말을 했습니다. 염려와 근심, 걱정을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하게 살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염려와 근심, 걱정을 처리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1) 사람의 가치를 아는 것입니다(26,28,29절).
공중의 새를 보십시오.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먹이십니다. 들의 백합화를 생각해 보십시오. 수고도 하지 아니하고 길쌈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입히십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입히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겠습니까? 

막5장에 보면 주님께서는 귀신들린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돼지 2천 마리를 희생시키셨습니다. 왜냐하면 돼지 2천 마리보다 한 사람이 더 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그렇게 귀한 존재로 보시는데 염려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귀신에게 사로잡혀서 무덤 사이에 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돌로 제 몸을 상하게 해서 보기에도 징그러운 사람입니다. 먼지를 뒤집어 쓴데다가 씻지 않아서 머리카락은 떡지고 입에서는 썩는 냄새가 가득하고 피부는 거북이 등짝처럼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이라고 하기보다는 짐승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를 살리기 위하여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셨습니다. 그 사람을 치료하신 후에 다시 갈릴리 바다를 건너셨습니다. 

짐승같은 그 사람도 주님께서 귀하게 여기시고 그를 찾아가셔서 치료해 주셨다면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는 얼마나 귀하게 보시겠습니까! 사람이 존귀한 존재이지만 특별히 신자는 더 존귀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않고 주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며 우리의 죄 값을 치르게 하셨고 그 결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까지 얻게 하셨습니다. 롬8:32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까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귀한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자동차를 사준다면 키를 주지 않겠습니까? 집을 사주면서 복비를 안주겠습니까?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하나님께서 먹을 것 입을 것 쓸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주시죠. 당연히 채워주시죠!
  
2)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입니다(25-32절).
사람은 자기 염려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염려를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공중에 나는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입히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부모가 자식의 필요를 알고 그 필요를 채워주는 것처럼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술을 마시면 흥이 나서 시(詩)를 쓸 수 있었다는 중국 당나라의 시인 이백(李白)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도단수수경유 거배소수수경수’(刀斷水水更流 擧杯消愁愁更愁) 이 시의 뜻은 ‘칼로 흐르는 물을 내리쳐도 물은 끊이지 않고 계속 흐르듯이 잔을 들어 술 마시며 걱정을 씻으려 해도 걱정은 더욱 쌓여만 간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힘으로는 염려, 근심, 걱정을 해결할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의 말대로 사람의 힘으로는 걱정을 이길 수 없으니 염려하는 대신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14:1에 보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합니다. 염려와 근심 대신에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부모가 없는 아이들은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염려하지만 정상적인 부모가 있는 아이들은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다 알아서 공급해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십니다. 어린 아이는 자라면서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모르고 자랍니다. 그런데 부모는 아이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서 때에 맡게 공급해 줍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아이가 아버지에게 와서 근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아버지, 내일 먹을 양식 있어요?”라고 묻는다면 아버지께서 “너는 왜 이렇게 쓸데없는 소리를 하냐 공부나 열심히 해”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셔놓고 만약에 이런 말을 한다고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고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까? 
제가 아이들과 여행을 할 때 우리 아이들은 돈 걱정하지 않고 여행을 합니다. 비행기 값도, 숙박비도, 식사비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 걱정하지 않을까요? 아빠를 믿기 때문입니다. 아빠가 비행기 값도, 숙박비도, 식사비도 다 해결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제가 가진 것이 더 많을까요 하나님이 가진 것이 더 많을까요? 제 능력이 더 클까요 하나님의 능력이 더 클까요? 당연히 하나님이 가진 것이 더 많고 하나님의 능력이 더 크죠. 제가 가진 것이나 제가 가진 능력은 하나님의 것과는 비교될 수 없이 초라한 것입니다. 제가 가진 것은 태양 앞에 촛불보다 더 초라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이 저를 믿는 것보다 신자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작아서야 되겠습니까!

벧전 5:7에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 앞에 우리의 염려를 맡길 수 있는 이유는 주님이 우리를 돌봐주시기 때문입니다. 
제 아들이 무거운 가방을 들고 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제가 가방을 들어주려고 하는데 아들이 제게 가방을 맡기면 우리 아들은 무거운 가방으로부터 자유합니다. 만약 가방을 제게 맡기지 않으면 그 가방의 무게로 고생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무거운 짐도 하나님께 맡겨버립시다. 우리의 염려도 다 주께 맡겨버립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염려하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분입니다. 문제는 내가 맡기느냐 맡기지 않느냐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정말 중심으로 우리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겨봅시다. 
중국 내지 선교사로 헌신했던 허드슨테일러의 간증입니다. 그가 하는 일이 점점 많아지면서 협력자와 선교비가 필요했지만 그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정신적 부담으로 고민하다가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15:5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는 말씀을 읽고 ‘주님은 포도나무이고 나는 가지인데 내가 걱정할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주님께서 수분과 양분을 공급해 주는 나무이므로 가지인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데, 가지인 내가 수분과 양분을 공급하려고 애쓰고 있다니 어리석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엎드려서 “주님! 이 시간부터는 염려와 근심을 주님께 맡기겠사오니 책임져 주시옵소서”라고 기도 한 후 염려하지 않았더니 주님께서 그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셨다는 간증입니다.

노만 빈센트 필 박사님이 첫 목회를 할 때 후두염에 걸려 말도 제대로 못할 지경이 되어 병원에 갔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걱정이 많으시군요.”, “예, 걱정이 많습니다.”, “무슨 걱정이 그리 많으십니까?”, “설교 걱정이지요. 주일 설교, 주중 설교, 이런 설교, 저런 설교, 설교, 설교, 설교……, 그 많은 설교를 어떻게 감당할지 자나 깨나 걱정입니다.”, “목사님, 설교 준비하는 일에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께 집중하십시오.” 그때 노만 빈센트 필 박사가 정신이 들었다고 합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가 새 힘을 얻는 것입니다. 

설교, 주일 설교, 수요일 설교, 설교를 생각하면 ‘한평생 설교를 어찌하나?’라는 생각에 눌리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면 새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주시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니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걱정 없이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노만 빈센트 필 박사님은 모든 짐을 하나님께 맡기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니 강한 사람, 긍정적인 사람, 세계 만민에게 긍정적인 힘을 주는 목사님이 되신 것입니다. 

이 중표 목사님이 거제도에 있는 해금강이라는 곳을 가게 되었습니다. 배를 타고 해금강을 관광하는데 갑자기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생에 처음으로 배가 파도 속으로 지나가는 것을 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면서 방향을 틀어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때 선장이 “방향을 돌리면 배가 뒤집어져서 다 죽습니다. 그냥 이대로 밀고 나가야 되니까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앉아 계십시오. 파도가 쳐도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으십시오.”라고 말하고는 앞으로 계속 나아갔답니다. 

그 때 목사님은 너무 겁이 나서 얼굴이 노랗게 질려가고 있는데 저쪽 한쪽에서 어머니의 품에 안긴 어린아이 얼굴을 보니 너무나 편안하더랍니다. 그 아이는 위험한 풍랑 속에서도 어머니 품에 있으니까 걱정이 하나도 없는데 목사님은 무능한 어머니보다 능력이 뛰어나신 하나님 아버지 품에 있으면서도 두려움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염려를 하나님 아버지께 맡깁시다. 아버지가 도와주십니다. 
  
3)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33).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염려하던 모든 것을 해결해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찰스 휴멜은 “우리들이 삶에서 만나는 온갖 딜레마들은 시간과 물질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일의 우선순위를 잘못 선택함에서 온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삶에서 만나는 딜레마들 역시 시간과 물질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먼저가 되지 않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록펠러의 일화입니다. 그는 쉰 세 살에 세계에서 제일 큰 부자가 됐습니다. 하루에도 백만 달러씩 벌었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알록피셔라는 병에 걸려서 머리와 눈썹이 막 빠지고, 몸이 바싹바싹 말라 들어가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면 뭐합니까? 자기가 지금 죽어 가는데, 매일 병에 시달리면서 잠도 자지 못하고 밥맛이 없어서 밥을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의사는 1년을 넘길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날 그에게 ‘내가 이렇게 많은 소유를 가지면 뭐하나.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돈은 아무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신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더니 침대 밑에 내려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기 시작하는데, 밤새도록 기도하고 그 다음 날 새벽을 맞이했습니다. 그 날 밤이 록펠러가 완전히 변화되는 순간이었어요. 그날 밤 이후에 그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됐습니다.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부터 예배 생활이 달라졌습니다. 가장 앞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 예배를 통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 내가 성전을 지어 바쳐서 새성전에서 예배를 드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어 바친 성전이 뉴욕에 있는 리버사이드 교회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록펠러 재단을 만들어서 돈이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등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돈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밥맛이 나고 잠이 잘 오고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넘치는 겁니다. 일 년 밖에 못산다는 사람이 98세까지 살았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였더니, 어느새 근심과 병이 사라지고 록펠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4) 염려를 기도로 바꾸는 것입니다. 
빌4:6,7에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쥐는 설치류(rodent)에 속하는 동물입니다. 설치류는 땅 위나 땅 속에서는 살 수 있지만 하늘 높이 올라가면 죽습니다. 설치류에 속하는 쥐가 비행기 안에 들어가서 기계의 전선 하나라도 긁어먹으면 큰일 납니다. 오래 전에 한 비행사가 비행을 하다가 비행기 안에 쥐가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비행사는 재치를 발휘해서 2만 피트나 되는 높은 곳으로 비행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곧 쥐가 죽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생활에서 염려의 쥐를 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행기가 추락하듯이 신앙이 추락할 수 있습니다. 염려의 쥐를 잡으려면 기도를 많이 해서 영적인 고도를 높이십시오. 영적인 고도가 높아지면 염려의 쥐는 즉각적으로 죽고 말 것입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으로 알려진 제이시 페니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페니는 사업을 시작했지만 실패하고 많은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빚쟁이들에게 시달리고 심한 재정난을 겪으면서 그의 걱정과 근심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건강이 최고로 악화되면서 페니는 미시간 주 배틀크릭에 있는 격리병원에 수용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지치고 낙심한 그에게 바람을 타고 찬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소리 나는 곳을 간신히 찾아갔더니 어떤 작은 건물에서 기도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뒷자리에 가서 앉았는데 매우 친숙한 찬송 “너 근심 걱정 말아라”가 연주되고 있었습니다. 그 찬송은 그의 마음속에 가득한 염려를 몰아내었고 큰 확신을 주었습니다. 그는 외치기 시작했습니다.“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제 지쳤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세요” 그 후에 그는 고백하기를 “나는 무한히 어두운 공간에서 찬란한 태양빛으로 옮겨지는 느낌이었고 마음속의 무거운 짐이 옮겨져서 그 방을 나올 때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술회합니다. 그 후에 그는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용기를 내어 사업을 시작한 결과 성공하였으며 미국의 대 백화점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영국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뮬러는 수천 명의 고아를 키우면서 돈도 없고, 든든한 후원재단도 없었기에 먹는 문제에 봉착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고 기도했습니다. 결국 기도할 때마다 응답을 받아서 일생 5만 번 이상의 기도를 응답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항상 말했습니다. “염려의 시작은 신앙의 끝이고 신앙의 시작은 염려의 끝입니다.” 염려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염려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 걸쳐서 '염려하지 말라'는 말이 365번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루마니아의 살아있는 순교자 범브란트라는 분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감옥에 있으면서 마음이 늘 불안하니까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염려하지 말라'는 말이 들어있는 성경구절만 찾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읽다가 '염려하지 말라'는 말이 성경 전체에 365번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365일 날마다 염려하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구나!’ 생각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별명처럼 자기 이름 앞에 ‘티테디오스’라는 말을 붙이고 다녔습니다. 티테디오스는 염려에서 해방된 사람을 뜻합니다. 그래서 ‘티테디오스 요한’이라고 하면 ‘염려에서 해방된 요한’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초대교회성도들처럼 하나님을 모시고 삽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티테디오스 신자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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