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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 안에서는 약자가 없습니다 (막 16: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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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안에서는 약자가 없습니다 (막 16:9~20)
  

지난 금요일 저녁 저는 마음이 많이 불편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너무도 죄송했습니다. 그 날 저녁 지역연합금요기도회가 있었는데, 지역에 55개나 되는 교회의 교우들이 연합으로 모인 기도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겨우 이삼 백 명뿐이었습니다. 서울의 어느 한 교회의 새벽기도회 참석 숫자만 해도 수만 명이나 된다는데, 지역교회들이 모두 연합을 한 것이 겨우 이삼 백 명뿐이라니 너무 초라했습니다. 아니 그런 큰 교회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이 우리 교회 교인만 다 참석해도 그 몇 배는 될 것입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왜 모이지 않는가? 우리는 왜 젖은 장작처럼 성령의 불이 붙지 않는가? 우리는 왜 하려고 하지 않는가? 우리는 왜 무관심한가?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초라함을 방치하고 있는가? 왜 우리는 답답해하지 않는가? 왜 이런 우리 자신에 대해 화를 내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정말 심각한 것은 왜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당연하게 여기는가?> 이런 생각이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여러분, 위대한 일은 특별한 사람들만의 것입니까? 우리는 언제까지 구경꾼으로만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열심히, 최선을 다해 모이는 이들과 우리는 DNA부터가 다른 것일까요?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잘 하도록 태어났고, 우리는 못하도록 태어난 것일까요? 본래 연합이란 잘 안 되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연약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정확하고 공평한 공통점입니다. 그분들도 혈과 육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분들도 병이 듭니다. 그분들도 쓰러집니다. 그분들도 피곤을 느낍니다. 그분들에게도 두려움이 있습니다. 다 똑같이 연약한데, 왜 우리는 잘 못하는 것일까요? 

지난 밴쿠버 동계올림픽은 우리 국민 모두를 흥분시켰습니다. 특히 김연아 선수의 금메달은 우리 모두를 기쁘게 했습니다. 다른 종목의 금메달보다 김연아 선수의 금메달이 우리에게 더 큰 기쁨을 가져다 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던 피겨라는 종목에서 금메달을 땄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피겨는 서구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지 우리 한국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종목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아예 우리는 처음부터 포기해 왔습니다. 선수 이름도 몰랐고, 규정도 몰랐습니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김연아 선수는 <우리는 못한다>는 무서운 선입견을 허물었습니다. 김연아 선수가 우리에게 준 최고의 선물은 금메달이 아니라, <우리도 할 수 있다. 아니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습니다. 이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값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지역에도 기적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이 될 씨앗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게 아닙니다. 

본문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어떤 분들입니까? 그 분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지도한 초대교회의 기둥들이었습니다. 이 제자들을 통해서 기독교 복음이 로마 세계로 확산되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 빌립, 도마 등, 얼마나 위대한 이름들입니까? 우리는 그 분들을 기억하고 흠모하고 존경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자들과 그 분들이 이룬 일들을 생각할 때 버려야 할 두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첫째로 제자들은 처음부터 우리와 달리 특별하고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이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제자들은 그렇게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설마 하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일반 무리들이 믿음이 부족하다면 이해가 되지만, 제자들이 믿음이 없다는 것은 얼핏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본문은 제자들이 믿음이 없었다고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다>, 이건 복음을 위해 일해야 할 제자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었습니다. 몸이 약하다, 돈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 약점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다는 것은 제자들에게는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예수님의 무덤에 갔던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달려와 전해 주었지만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또 13절을 보십시오.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던 두 사람이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돌아가서 제자들에게 전했지만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14절을 보면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제자들도 우리와 비슷하였습니다. 그분들도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그분들도 두려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들은 모두 도망해서 숨어 있었습니다. 위대한 복음의 역사를 이룩한 제자들도 우리와 같이 연약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처음부터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또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강한 사람, 믿음이 좋은 사람들에게만 사명이 주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 좋은 사람, 강한 사람만 큰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 증거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은 방금 전 14절에서 제자들의 믿음의 부족함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책망이 끝나자마자 바로 이어서 그들에게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사명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사명은 너무도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가까운 친구나 이웃 사람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믿음이 없어서 책망을 받은 그들에게 온 천하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구절을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는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믿음이 없어 책망 받은 그들에게 맡기기에는 너무 지나치게 큰 사명 아닙니까? 이것은 마치 덧셈도 못하는 아이에게 미적분 문제를 풀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힘도 없고 연약한 사람들에게 이토록 중차대한 사명을 주신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주님은 믿음이 없고 약한 사람들도 위대한 삶을 살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부족한 사람도 우뚝 일어서서 사명을 향해 달려가기를 원하시고, 그래서 존귀하고 빛나는 삶을 살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약한 사람들에게도 사명을 주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은 약한 우리도 사명자가 되길 원하십니다. 사명은 특정한 사람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으니까, 나는 믿음이 없으니까, 나는 약하니까 나는 사명을 받기에는 너무 부족해>

우리의 약함을 핑계 삼아 그 뒤에 숨지 맙시다. 믿음이 약해도 사명이 있습니다. 여건이 힘들어도 사명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충분히 준비된 후에 사명을 받겠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준비된 다음에 하려고 생각하면 평생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배운 다음에 하겠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배운 다음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믿음이 자란 후에 전도하는 게 아닙니다. 전도하면서 믿음이 자랍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한 분들도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그 사명은 준비된 사람, 오래 믿은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 가지로 부족한 우리들이 정말 잘 해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우리도 잘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믿음이 없었지만, 거둔 열매는 놀라웠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할렐루야! 제자들이 나가서 전파할 때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능력과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말씀을 확실하게 증거했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없는 사람, 약한 사람, 준비가 부족한 사람에게도 표적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없고 약한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열매를 거둘 수 있었을까요? 그 해답이 20절에 나옵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제자들이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셨고, 역사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마태복음 28장 18절을 보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입니다. 전능자입니다. 그 분은 우리처럼 약하지 않습니다. 우리처럼 무능하지 않습니다. 우리처럼 어리석지 않습니다. 우리처럼 지쳐 쓰러지지도 않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연약한 사람들이 사명을 향해 나갈 때 결코 혼자 두지 않습니다. 함께 하시고 역사하십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도 이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할렐루야! 여러분, 이 능력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 제가 믿음도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저와 함께 하신다면 제가 일어서겠습니다. 사명을 위해 나아가겠습니다!> 이런 결단이 있길 기원합니다. 

바로 여기 설교자의 용기가 있습니다. 저는 정말 부족한 사람입니다. 더구나 설교는 할수록 어렵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설교의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 말고 정확하게 전하는 데 있습니다. 또 알아듣기 쉬워야 합니다. 그리고 지루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능력이 있어서 뜨거운 감동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그래서 이를 위해 늘 기도합니다. 발음까지도 정확하게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설교를 준비합니다. 가급적 완벽한 설교가 되도록 토씨까지도 정확하게 해 보려고 합니다. 원고가 완성되고 나면 영어 예배팀에 보내 드립니다. 김선매 집사님, 박선분 사모님, 이봉만 집사님이 토요일 밤 늦게까지 영어로 번역합니다. 그 번역된 것을 가지고 3부 예배 중에 외국인들을 위해 영어로 동시통역을 합니다. 

그런데 막상 원고를 보내드리고 난 후 다시 읽어보면 이게 문제가 많습니다. 고쳐야 할 부분, 모자라는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그래서 주일 밤 동안에 수정을 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해도 늘 부족합니다. 그래서 통역하는 분들이 2부 예배에 오신다고 합니다. 2부 예배에 와 보면 제가 보낸 원고에 없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원고에 있는 것을 빼기도 하는데, 그것을 표시했다가 3부에 통역하신다고 합니다.

아무리 준비해도 모자란 것, 그게 설교입니다. 부족한 제가, 연약한 제가 부족한 설교를 들고 강단에 설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 저는 약하고 믿음이 적고, 준비도 덜 되었지만, 주님께서 저와 함께 하셔서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란 고백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을 믿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께서 저와, 제 입과, 제 영혼과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들과도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제자들 모두 믿음이 없고 약했지만, 주님 안에서 강자가 되었습니다. 주님 안에서는 약자가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는 믿음 없는 사람도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는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도 부잣집 아이들보다 더 아름답게 자라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 있으면 학벌이 부족한 사람도, 몸이 약한 사람도, 여건이 안 좋은 사람도,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도 다 위대하게 될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 안에는 약자가 없습니다. 

주님의 품안에, 그 능력 안에 있으면 보잘것없는 사람도 복을 받아 <담장을 넘는 가지>처럼 될 수 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의 노예였고, 후에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죄수가 되었지만. 하나님 안에 있으니 그는 담장을 넘는 가지처럼 번성하였고, 애굽의 총리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비록 믿음이 없고 약하지만 그렇게 되길 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드릴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셔서 역사하셨다고 했는데, 주님이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십니까? 주님이 무조건 모든 사람을 위해 일하시는 것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20절을 다시 보십시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이 말씀의 연결 고리를 잘 보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셨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나갔습니다. 가서 열정적으로 증거했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그들은 <주님, 우리는 믿음이 없습니다. 방금 전에도 믿음이 없다고 꾸중하지 않으셨습니까? 저희처럼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온 천하에 다니면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은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그들은 믿음이 부족하지만 순종했습니다. 나가서 전했습니다. 순종할 때. 행동할 때 주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주님은 결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지는 않으십니다. <나는 약해요, 믿음이 없어요>라고 말하면서 가만히 있으면 결코 그들을 통해 일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주님이 함께 하셔서 도우시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믿음이 없다고, 여건이 어렵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순종하십시오. 결단하십시오. 우리 모두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만 58년 전, 1952년 3월 10일에 우리 선배들은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60주년을 내다보면서 우리는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열심히 모여야 합니다. 장로님들, 안수집사님들, 권사님들, 집사님들, 모든 성도들 열심히 모여 보세요. 모여서 사명자로 살겠다고 결단 하십시오. 다가오는 지역 연합집회에 모두 개근하여 은혜를 받으십시오. 각 부서의 회장님들이 출석이라도 부르십시오. 연락하십시오. 그리고 모여서 의논해 보십시오. 우리가 믿음도 없고 약하지만 어떻게 한번 멋지게 할 수 있는지 머리를 맞대고 기도하십시오.

여러분, 약 오르지도 않습니까? 새벽에도 수만 명씩 모이는 이들도 있는데 같은 예수님을 믿고, 같은 성경책을 읽으면서 왜 우리는 그렇게 못합니까? 왜 우리는 주인공이 되지 못합니까? 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합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을 격려하길 원합니다. 또 우리 스스로를 격려하길 원합니다. 교우 여러분 각자가, 우리 교회가 기적을 이루게 되길 기원합니다. 우리 비록 약하지만, 믿음이 부족하지만, 여건이 좋지 않지만, 우리 한 번 해 봅시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인생의 모든 분야에서 주인공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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