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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께 왔다가 떠나는 이유 (막 10: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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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 왔다가 떠나는 이유  (막 10:17~22)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후에, 필리핀 만다나오 산악지대에 숨어있는 일본군인들에게, 저공비행을 하면서, 종전방송을 했다. 전쟁이 끝났다고 알리는 방송이었다. '전쟁은 끝났으니 항복하고 나와라. 당신들의 조국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산악지대에 숨어있던 많은 일본군인은, 연합군전술로 오해했다. 그래서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은신했다. 종전 후 30년 동안, 동굴 속에 있다가 발견된, '오노다 히로'는 1974년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것은 오해 때문에, 30년 세월을 잃어버린 비극이라 할 수 있다. 

본문에도 오해로 인한, 참 안타깝고 슬픈, 비극이 기록되고 있다. 예수님께 달려나왔지만, 스스로 떠난 안타까운 사건이다.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 새, 한 사람이 달려왔다…"고 했다. 그 사람은 '한 청년'(마19:20)이라고 했다. '관리'(눅18:18)라고 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부자였다. 

이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17下)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예수님께 나왔다. 이 땅에 속한 문제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신령한 문제를 들고 나왔다. 청년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천국과 영생의 문제를, 인생을 다 살은 노인들이나 원하는,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관리로 사회에서 성공했지만, 천국과 영생의 문제를, 실패한 사람의 정신적 도피처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부자였지만, 천국과 영생을 가난한 사람들의, 보상심리 속에 존재하는, 나라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천국과 영생의 문제를 소중하게 여기고, 해결할 수 있는 예수님께 달려나왔다. 

달려왔다는 말은, 그 문제가 그만큼 절박했다는 뜻이다. 또 예수께 꿇어앉아 이야기를 했다. 그만큼 겸손한 사람이었다. 돈도 있고, 권세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교만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도 본문은 비극적 사건으로 끝난다.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했다. 이 사람은 재물이 많은 부자였기에, 예수님을 떠나갔다고 쉽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가 예수님을 떠난 진짜 이유는 오해 때문이다. 어떤 오해를 했는가? 

1. 예수님이 누구냐에 대한 오해다(17中). 
"…달려나와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그는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불렀다. 유대교에서는 랍비를 '선한 선생'이라고 부른 적이 없으니, 최대의 찬사가 아닐 수 없다. 

이 호칭은 아첨에 가까운 칭찬인데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하셨다. 이 말씀도 피상적으로 보고, '예수님은 자신이 선하심을 부인하셨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안 된다. 

예수님의 말씀은 나를 사람으로만 보지 말라. 사람들 가운데는, 선한 이가 없다는 말이다. 인간의 선함이, 구원의 조건일수 없고, 자신의 선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씀이다. (롬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고 했다. 

인간의 선은, 상대적인 선에 불과하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보실 때, 자신의 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기에 "선한 자는 하나님밖에 없다."고 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는, 본문을 통해 예수님은 "내가 하나님이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나는 선한 차원의 선생이 아니라, '하나님이다.'라는 선언이다. 지금도 예수님을, 부처와 공자처럼 위대한 사람의 모델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위대한 종교 개혁가, 또는 종교적 천재, 아니면 훌륭한 영성 운동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인간성에는 후한 점수를 준다. 그러나 하나님이 되심은,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라고 하셨기에, 유대인에게 죽으셨다. 만일 예수님의 인격을 믿는다면, 그 분의 말씀도 믿어야 한다. 예수님은 정신병자이거나,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좋으신 분으로, 인간적으로만 해석할 뿐, 하나님으로 믿으려 들지 않는다. 이는 불신앙이다.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관점이 절대 아니다. 예수님은 스승 이상이 되시는 하나님이요, 인간을 구원할 구세주다. 위대한 인간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구세주는 될 수 없다. 

옥스퍼드와 캠브리지에서 가르쳤던, C.S 루이스는 채플에서 '예수의 구주 되심'이란 주제로 설교를 했다. 설교가 끝난 뒤, 한 학생이 C.S 루이스 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오늘 선생님이, 예수는 본받아야 할 위대한 스승이라고 말했다면, 우리는 선생님에게 박수를 쳤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구세주다. 이런 케케묵은 기독교 교리를 말함으로, 우리는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자네는 정말 예수가, 완벽한 모델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이지요.'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완벽한 모델이신, 예수를 따라가는 것이, 중요한 삶이라고 믿는가?" 그렇지요. 

"그러면 학생은 완벽한 도덕적 모델이신 예수를, 온전히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는 깊이 생각하다가 완전히는 따라 갈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면 학생도 도덕적 실패를 인정하는군! 자네의 삶에 실수가 있고, 죄가 있음을 인정하는가?" 인정이지요. 

"그렇다면 자네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적 모델 예수가 아니네 도덕적인 실패와 죄에서 구원할 수 있는, 구세주 예수가 먼저 필요하다네. 죄인에게는 위인 예수가 아니라, 구세주 예수가 필요하다네.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 비로소 그 분은 자네의 모델이 될 수 있다네."라고 했다. 

이 관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한 선생수준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나에게 맞지 않는다고 판단되자 떠났다. 그가 떠난 진짜 이유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가 하나님이요,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구주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나요? 

2. 영생을 행위로 얻을 수 있다는 오해다(17下).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여기서 얻는다는 말은 클레로노메오(          )인데, '상속자가 된다'는 말이다. 

그는 영생을 얻으려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엇을 해야만 한다는 잘못된 전제를 가지고 나왔다. 권력자 이명박 대통령의 자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 이명박 대통령에게, 얼마나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얼마나 돈을 드리면, 자녀로 삼아줄까?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하고, 돈을 드리고, 예쁘고 착해도 자녀로 삼아주지 않는다. 자녀가 될 수 있는 방법은, 그 분이 자녀로 삼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수락할 때,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이 아무리 원한다고 해도, 우리가 원하지 않으면, 자녀가 될 수 없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주님께서 연약하지만 나를 자녀 삼고 싶은 마음이 있고,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 청년은, 내가 무엇을 하고, 굉장한 업적을 세워야, 하나님이 나를 자녀로 삼고, 영생과 천국을 주신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보편적인 선입견 또는 편견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청년의 잘못된 생각을 파괴시키기 위하여, 계속 질문하신다.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즉 "너의 선을 들고, 하나님 앞에 접근할 수 있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 정도로 네가 선하다고 생각하느냐?"는 반문이다. 그리고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즉 너는 이대로 행하고 있느냐는 말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청년은, 이렇게 대답한다. (20)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청년은 도덕적으로 볼 때, 정말 자신 있었다. 그래서 저는, 이런 계명들을 다 지키면서 살아왔다고 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 말씀을 비약시켜, 구원 얻기 위해서는 재산을 다 팔아야 한다고, 오해하지 말라.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이 청년은 아직도, 죄인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야,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게 된다. 그래서 그가 숨기고 있던, 아픈 곳을 예수님이 찔렀다. 

재물에 대한 탐심을 찔렀다. 이 한 가지를 통해, 그의 죄인 됨을 보여주셨다. 한 가지 부족한 점을 통해, 죄인 된 그의 모습을 주님은 보여주셨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기 위해서는, 많은 계명을 깨뜨릴 필요 없다. 단 하나의 계명의 파기로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충분히 죄인이다. 

우리는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피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의 죄를 보지 못하고, 남의 죄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살인자와 강간한 자 두 사람이, 붙잡혀 왔다고 가정해 보자. 살인자는 강간한 자에게,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나는 흥분하고 열이 올라 사람을 죽였지만, 나는 여자는 건드리지 않는다. 나는 그런 치사한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러나 강간한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니 어떻게 신성하고 거룩한 사람의 생명을 해칠 수가 있느냐? 나는 절대 생명은 해치지 않는다. 이렇게 자기를 합리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약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하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충분히 죄인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이렇게 반문하는 분이 있을지 모른다. 

이렇게 청년과 예수님의 대화를 옆에서, 엿듣고 있었던 제자들이 이렇게 질문했다. (26)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나? 

(27)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주님은 그렇기에 사람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사람들의 어떤 최선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이웃을 돕는 어떤 자선행위도, 이웃을 구원할 수 없다. 동정할 수는 있고, 일시적 도움을 베풀 수 있지만, 구원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다 죄인이고, 다 잘못된 길로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원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실 때, 인간의 행함에 근거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을,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신다. 구원은 선물이다.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선을, 자랑할 자가 없기에, 구원은 선물로 주신다. 

이것이 복음이고, 기독교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서,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 그러면 선물은 어떻게 받는가? 그냥 받는다. 
선물을 제일 잘 받는 사람이 누구인가?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선물을 주면, 잘 받는다. 어른들은 선물을 주면, '무슨 의도가 뒤에 있는가?'하고, 잘 받지 않는다. 이 청년이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의 선물을 받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는, 어린 아이의 마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본문 바로 직전에,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어린 아이와 같은 자,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다. 어린아이들은 잘 받아들인다. 그러나 청년은 아직까지, 자기의 자기 행위에 매달린다. 

내가 그래도 무엇을 해야지 하던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을 때, 자기 전 재산을 내어 줄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별 수 없이 예수님에게서, 돌이킬 수밖에 없었다. 오늘 우리는 어떤가? 내 힘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오해는 없나요? 

3. 인생의 우선순위에 오해가 있었다. 
우선순위는,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의 순서를 말한다. 행복은 우선순위를 따라, 살아갈 때 이루어진다. 불행은 우선순위를 지키지 못할 때, 불행이 생긴다. 
이 사람은 우선순위가 잘못되었다. 이 사람이 영생을 얻는 구원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나? 안 했나? 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 왔다.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있었나? 없었나? 있었다. 예수님에 대한 관심도 있었고, 영생의 문제에 관해서도, 진지한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예수님보다, 영생보다 더 중요한 관심은, 재물이었다. 그는 예수님이 중요하고, 영생도 중요함을 알았다. 그러나 그를 지배하고 있던, 가장 중요한 관심은, 재물에 대한 탐심이었다. 자기의 재산을 늘리고, 재물을 축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이었다. 

결국 우선순위에서, 예수님은 밀려났고, 영생의 문제도 밀려났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예수님을 등지고 떠날 수밖에 없던, 슬픔의 주인공이 되었다. 지금도 교회에 나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우선순위의 혼란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인생의 우선순위를 올바로 설정하시기 바란다. 
어떤 부모가 자기 아이가, 교회 잘 안나가니까, 아이들에게 교회 나가라고 막 꼬시고, 달래도 잘 안 나가자, 어느 날 돈으로 흥정했다. "너 교회에 가면 만원 줄께. 너 만원 가지고 극장도 가고, 네가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지 않아?" 정말이야 엄마? "그럼 약속해." 교회 가겠다고 아이가 말하자, 

교회가면 헌금도 내라. 꼭 잊어버리지 말고, 그러면서 자기 아이의 손에다, 헌금 천 원을 주었다.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 아이는, 교회는 천 원짜리, 극장은 만 원짜리라는 메시지를 받는다. 우선순위의 혼란이라는 메시지를, 잘못 주었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우선 순위가 어디에 있나? 
이 사람은 예수님도, 영생도 다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재물이 훨씬 더 중요했다. 그것이 우상이다. 우상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끼어 들어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올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우상이다. 그는 이 우상을 극복하지 못했다. 

영국이 전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던, 시절에 일어났던 얘기다. 아프리카에서 영국 무역선 하나가, 영국해역에 거의 다 와서, 그 해역근처에서 조난 당해 파선하게 되었다. 그래서 구조선을 보냈지만, 파도가 너무 높아, 구조선들이 조난 당한 큰배에 접근을 못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로프를 던지고, 사람들에게 그 구조선까지, 헤엄쳐 오라고 하였다. 여러 사람이 헤엄쳐 그 로프를 붙잡고 살았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죽었다. 죽은 사람들은, 그 이유가 다양하다. 물론 어떤 사람은 수영을 못해, 미처 그 로프를 잡지 못해 죽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죽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배에서 뛰어 내리는 과정에 있어서, 아프리카에서 오는 그 배에는, 금괘가 많이 있었다. 금괘를 배에 막 차고, 오다가, 그 금괘의 무게 때문에, 다 빠져 죽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인생인가! 

(막8: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했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 판단이 흐려졌기 때문이다. 오늘 내 생애에서, 무엇이 중요한가?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분이 있는가?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믿는가? 

예수님은 나의 구주요, 주님이시다. 나를 구원하신 분, 나의 전 일생을 다스리고,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그렇다면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분이 없어야 한다. 구원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어디 있을까? 

우리가 인생에서 성공했다고 하지만, 구원을 얻지 못했다면, 그는 끝없이 영원을 고통을, 타오르는 지옥에서 보내야 한다. 그러니 구원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는가? 내가 예수님을 믿고 나왔을 때, 예수님은 나를 용서하시고,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흘리신 피로, 감싸주신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온 나에게, 그 거룩한 사랑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던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 그래서 나는 영생을 얻었다. 이보다 더 위대한 축복이 어디 있는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행복을 확인하시기 바란다. 

오늘 우리 가운데, 아직 예수님을 모르고, 아직도 구원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우선순위를 바꿔라. 나의 최선도 나의 노력도, 나를 구원할 수 없었다면, 이제 십자가 앞에 겸손히 서라. 그리고 주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생각해 보라. 

나의 허물과 죄를 짊어지시고, 피 흘려주신 십자가, 그리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의 주인 되심을 고백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손길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 

결론이다. 이 부자 관리 청년은, 인생의 너무 귀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 달려나왔다. 그러나 주님을 결국 떠나고 말았다. 오해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선한 선생으로 생각했다. 올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생을 행위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생의 우선순위를 올바로 설정하지 못했기에, 주님을 떠나고 말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누구로 생각하는가? 행위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인생의 우선 순위는 올바로 설정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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