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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주를 따를까 (막 10: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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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주를 따를까 (막 10:17~52)


서론  

오늘 본문 말씀에는 크게 3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17절부터 31절까지는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만나는 내용이고, 32절부터 45절까지는 제자들 중에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님께 개인적으로 조용히 청탁을 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 중에 오시게 되면 한 사람은 오른쪽, 한 사람은 왼쪽에 자리하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46절부터 52절까지는 한 맹인 거지였던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뜨게 되는 장면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 3가지 사건은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에 나가실 때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예수님께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17절) 이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 ‘길’입니다. 
그리고 또, 32절을 보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셨습니다. 12제자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잡히시고 죽임 당하실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사건 역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일어났습니다. 
46절도 보면 그들이 여리고성에 도착했다가 나와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 곳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예수님의 도움에 힘입어서 곧 보게 되어서 ‘길’에서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52절) 

이 ‘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3종류의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질문을 하기도 하고 부탁하기도 하면서 각각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을 살펴보며 오늘 예수님의 제자이신 성도님들은 어떤 종류의 사람에 속해있는가 확인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I. 부자 청년 (10:17-31): 예수님께 달려왔지만 그 분을 따르기를 포기한 사람 

첫 번째 인물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길에 나가실 때 한 사람이 달려왔습니다.(17절)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보면 같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사람을 부자 청년이고, 관리라고 소개하였습니다.(마19:20,22, 눅18:18) 이 청년은 달려와서 예수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 청년은 예수님께 ‘달려와 무릎을 꿇을’ 만큼 예수님께 대해 큰 기대와 존경심을 가졌습니다. 또 이 청년은 예수님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굉장히 어려운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 청년은 요즘의 관점으로는 성공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영원한 삶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관심을 가졌습니다.(17절) 

그 때 예수님께서 답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18절)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19절)”고 하셨습니다. 바로 십계명에서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는 말씀, 계명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 청년은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고 대답하였습니다.(20절) 이 청년은 모범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이 사람은 예수님 따르기를 포기합니다. 마가복음에는 나오지 않으나 다른 복음서에는 이 청년이 예수님에게 “혹시 저에게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이 때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21절)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2가지를 분명히 교훈해 주셨습니다. 첫 번째는 영생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따를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21절 마지막에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또 한 가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예수님 대신에 의지하고 신뢰하고 자랑했던 것을 내려놓아야만 따라갈 수 있습니다. 이 부자 청년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재물을 의지하면서 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이 청년은 재물을 선택하고 예수님 따르기를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재물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갈 것인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재물이 많았고(22절), 그가 큰 부자였기 때문에(눅 18장) 재물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슬픈 기색을 띄고 근심하며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성도님 이 말씀을 통해서 꼭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움켜지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그 분만 따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움켜지고 있는 내려놓아야 됩니다. 
오늘 우리 교회 속에도 이 부자 청년처럼 살아가는 분이 많이 계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달려와서 영생에 대해서 질문을 던질 만큼 많은 관심이 있으며 진지한 고민이 있는 분들이 계시지만 지금까지 움켜지고 있는 것을 내려놓을 수 없어서 신앙인이라기보다 종교인으로 살아가는 분이 적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에 대한 염려 - 예수님 잘 믿으면 경제적으로 손실이 올 것 같기 때문에 예수님 따르기를 포기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려면 친구들과,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들을 잃을 것 같아서 교회는 오는데 예수님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술과 담배, 세상적인 쾌락이 방해물이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운동과 취미, 레저 활동이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방해가 됩니다. 

지금 이 말씀이 예수님을 잘 믿으려면 가난해야 되고, 모든 친구 관계도 다 끊고, 모든 취미, 레저 활동을 다 끊어야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은 우리 삶에 모든 분야 - 물질, 대인관계, 취미, 레저 등에서 내가 주인 되는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이 그 모든 분야에 주님이 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분야에서 내 방법이 아닌 예수님의 방법으로 그것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주도권을 예수님께 드리는 그 때부터 우리들의 삶에서 우리만 일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믿고 의지하고 우리들의 삶에 주인이 되신 하나님이 일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삶에서 지금까지 맛보지 못했던 참된 만족과 기쁨이 넘치게 하시고, 우리들의 삶에 하나님이 주시는 보화가 넘치게 됩니다. 

여러분 생각대로 돈을 벌고 사람들을 만나고 삶을 즐길 때 참된 만족이 있습니까? 평생 그렇게 살면 후회가 없겠습니까? 행복하시겠습니까? 
우리들의 삶에 참된 행복, 기쁨과 참된 의미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을 때 우리들에게 가장 귀하고 존귀한 것들까지도 내 뜻대로 하지 않고 예수님 앞에 내려놓아서 내 방법이 아니라 주님의 방법대로 그것을 사용하게 될 때 넘쳐나게 됩니다. 

성도님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런 장애물을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정말 부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23-26절)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27절) 이 말씀을 통해서 성도님 마음속에 “예수님, 저에게 주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 있습니다. 주님의 손만을 붙잡는 것을 막는 방해물이 있습니다. 하나님, 이것을 주님께 맡깁니다. 저의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이것을 사용하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제목이 생기셨으면 좋겠습니다. 

II. 제자들 (10:35-43절): 예수님과 같이 걸어가지만 자신의 야망에 지배되어 있는 사람들 

이어지는 말씀을 보시면 이제 두 번째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앞장서서 가시니깐 제자들이 놀라게 됩니다. 제자들은 직감적으로 예수님 사역에 있어서 결정적인 순간이 가까워 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분이 예루살렘에 가셔서 잡히시고 죽임 당하실 것을 거듭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이 말씀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은 길을 가고 있었지만 자신의 야망에 지배되어져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두 번째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했던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부탁하고 있습니다.(35절)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37절) 그 때 대화를 들은 나머지 10제자가 화를 내게 됩니다.(41절) 
지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그 길을 같이 가고 있었지만 누가 가장 크냐? 누가 가장 큰 영광을 차지할 수 있느냐? 논쟁하며 자신의 야망에 지배되어 있었습니다.(9:33-35, 10:35-41) 

이런 모습을 보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어지는 42-45절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교훈을 주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45절)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습이, 좁게는 지금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 이렇지 않습니까? 서로를 섬기며 높여 주기보다는 사람들 가운데 내가 큰 자로 인정받고 높임을 받으려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분노하고 다투지 않습니까? 교회 밖의 사람들은 ‘당신들이나 우리나 무엇이 다르냐? 우리는 세상 속에서 우리들의 야망을 성취하고자 하고, 당신들은 교회 속에서 당신들의 야망을 성취하고자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라고 비웃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 이 세상에서 가지려고 했던 야망이 헛된 것이라고 믿고 내려놓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나아왔고 교회에 속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가서 교회에 헌신하고 충성하고 봉사하다보면 세상 속에서 내려놓았던 야망을 교회 속에서 성취하고자 하는 위험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관심은 하나님을 떠난 우리를 살리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대접 대신 모든 수치와 고통을 우리를 위해 담당하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고 있지만 딴 생각, 자기 야망에 사로잡히는 잘못에 빠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저와 우리 성도님들이 이 말씀을 통해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하나님, 사람들을 만날 때 그들이 나를 제대로 대접해주지 않는다고,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마음 상하지 않게 하옵소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셔서 겸손히 섬기게 하옵소서. 
저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들 상처받고 분노하며 미워하는 일에 허비하지 않게 하옵소서.  
대신 저의 짧은 삶을 섬기며 사랑하는 일을 위해 온전히 사용되게 하옵소서.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바로 이런 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Ⅲ. 소경 거지 바디매오 (10:46-52): 감격과 기쁨으로 예수님을 길에서 따라간 사람 

마지막으로 46-52절을 보면 세 번째 인물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데 맹인 거지 바디매오를 만나게 됩니다.(46절) 그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아 있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 때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지릅니다.(47절) 여기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시여, 하나님이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구원자시여라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꾸짖고 잠잠하라고 하지만 바디매오는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때 예수님께서 머물러 서서 사람들에게 그를 불러오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 맹인을 보고 “안심하고 일어나라. 예수님께서 너를 부르신다.”고 하였을 때,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50절) 그냥 예수님이 너를 부른다는 말을 들었을 뿐인데 바디매오는 마치 자신의 눈이 뜨게 된 것과 같이 기쁘게 일어나서 겉옷을 버리고 예수님께 나아오게 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맹인이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하였고,(51절) 예수님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니깐 그가 즉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디매오는 예수를 길에서 따르게 되었습니다.(52절) 바디매오가 예수를 따를 때 그 마음에는 믿음과 감격과 기쁨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을 길에서, 예루살렘 십자가를 향해서 가는 길에 따라가게 됩니다. 

성도님들, 예수님을 향해 기쁨과 감격으로 그 길을 따른 사람은 부자 청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했지만 자신의 야망에 지배되었던 제자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그의 삶은 비참했지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그 삶을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질러 예수님의 도우심을 입은 한 맹인 거지가 기쁨으로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성도님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기쁨으로 따라가는 사람들은 부자 청년이 아닙니다. 제자들도 아닙니다. 교회에 있지만 자신의 야망에 지배된 사람들도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직시하면서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부르짖고 예수님의 도우심에 힘입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쁨과 감격으로 따라갈 수 있습니다. 

결론  

이 말씀을 통해 몇 가지 권면을 드리고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고통 속에 있는 성도님입니다. 
마치 자신의 처지가 바디매오와 같은 사람들, 앞도 보지 못하고 거지이고 절망적이지만 바디매오가 예수님께 부르짖었던 것처럼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 앞에 부르짖으십시오. 그러면 예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의 도우심을 입고 그 분을 기쁨으로 따라가는 주님의 신실한 제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는 중산층의 모범적인 삶을 사는 성도님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한 가지의 문제점은 교회가 점점 중산층의 교회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오늘날 중산층을 대표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여 물질도 있고, 배웠으며 고위 관리였으며 진지했고 말씀을 쫓아 모범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교회의 축복이지만 동시에 교회의 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중산층의 교회가 되면서 교회가 가장 조심해야 되는 것이 주님의 십자가가 교회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모범적인 삶을 살고, 진지하게 살아가고,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함께 모이게 되면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성경에 대해 질문하고 고민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부자 청년처럼 예수님만이 알고 있는 그 장애물에 갇혀서 꼼작 못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거시적으로 이런 위험에 빠져 있습니다. 교회의 많은 성도님들도 어쩌면 부자 청년과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바디매오가 부르짖었던 것처럼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중산층의 모범적인 삶을 살아가는 성도님들의 기도가 되어야 됩니다. 
성도님들 이 기도를 드리게 될 때 예수님 대신에 우리가 붙잡고 의지하는 것들, 정상적인 눈에는 보이지 않고 성령님이 조명해주셔야만 보일 수 있는 그 방해물을 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성도님들, 우리가 이 기도를 드리게 될 때 오직 예수님과 그 분의 십자가만 붙들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할 때 성도님들의 삶에는 이 세상의 성공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기쁨과 만족과 부유함으로 가득 찰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저를 포함해서 교회를 앞장서서 섬기는 지도자들입니다. 
교회를 앞장서서 섬기는 지도자들이 언제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부르짖으셔야 됩니다. 
제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이기도 합니다. 저도 청년 시절에 방황하고 수렁에 빠졌다고 생각할 때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드렸습니다.. 그리고 사역자로서 초년병이었을 때에도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를 하면서 주님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관점에서 안정이 되고 자리 잡게 되었을 때 이 기도는 쉽게 드릴 수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성자라고 이야기하는 프란체스코가 밤새 기도했을 때, 제자들이 밤새 기도드리는 스승이 궁금하여 옆에서 들어보았습니다. 프란체스코가 밤새 기도한 것은 “주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이 한 마디를 가지고 밤새도록 기도하고 고백하면서 하나님과 씨름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는 그 자리에 서 있어야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을 수가 있는데, 이제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출세도 하고 성공하고 안정이 되면 어느새 우리는 내가 죄인이었다는 사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나되게 하였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어느새 교만하여 남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려고 하는 잘못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그때부터 사람은 추락하기 시작합니다. 프란체스코는 이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밤새우면서 기도하였습니다. “주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저를 포함해서 모든 사역자들, 중직자들, 앞선 분들이 주님 앞에 밤새워 씨름하면서 “주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이 고백이 입술로부터 시작해서 어느새 영혼에서 흘러나오게 될 때,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외에는 내가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 우리들 영혼의 고백이 될 때 우리 교회 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성도님들, 앞선 분들이 이 기도를 드리면서 우리 영혼을 차지하려고 하는 교만과 헛된 야망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 기도를 드리면서 예수님에 대한 첫사랑을 회복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위대한 교회가 된다고 해서 우리에게 기쁨이 되겠습니까? 우리 영혼의 가장 큰 기쁨은 예수님에 대한 첫사랑을 회복하게 되었을 때, 정말 내가 주님 앞에 죄인이었고 십자가의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내 영혼이 구원받고 새롭게 됨을 입었을 때의 기쁨입니다. 그 기쁨을 무엇이 줄 수 있겠습니까? 성도님들, 우리 영혼에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기쁨, 천국의 기쁨은 바로 첫사랑을 회복할 때,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기도드릴 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기도를 드리면서 상처와 분노에서 벗어나서 섬김과 희생을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원합니다. 

성도님들 우리의 각자의 삶을 다르지만 예수님만 의지하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드리며 이제 주님의 도우심을 힘입어서 우리에게 주어진 짧은 인생을 믿음과 기쁨, 감격에 넘쳐서 주님을 따라가는 성도님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나누었던 말씀을 기억하면서 이 시간에 함께 기도드리기를 원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삶의 곤경 가운데 있는 성도님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자신이 부자 청년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영생은 예수님을 따를 때 주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 손을 내려놓아야 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의 십자가만 붙들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교회를 앞장서서 섬기시는 많은 헌신된 성도님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항상 우리들의 가슴에 하나님을 향한 첫사랑이 넘치게 되고, 상처와 분노와 미움 내려놓고 섬김과 희생의 삶을 살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헛된 야망과 교만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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