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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버지의 큰 사랑 (눅 15: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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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큰 사랑 (눅 15:11~32)

 
백혈병에 걸린 다움이는 열 살의 어린 몸으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고 있습니다. 다움이 아빠는 실력은 있지만 그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시인입니다. 다움이 아빠의 적은 수입으로는 다움이의 치료비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엄마는 다움이가 여섯 살 때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의사 선생님이 다움이 아빠를 불러서 방사선 치료나 약물 치료는 한계에 도달했다고 말합니다. 이제 다움이를 살릴 수 있는 길은 오직 골수 이식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다움이에게 딱맞는 골수를 찾았지만 그 비용이 문제입니다. 

치료비 이천 만원은 다움이 아빠로서는 도저히 구할 수 없는 막대한 금액입니다. 그래서 다움이 아빠는 자신의 신장을 팔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검사 결과 다움이 아빠는 간암 말기라서 신장도 팔 수 없게 됩니다. 할 수 없이 눈의 각막을 팔기로 하고 육천 만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다움이를 고아로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다움이를 엄마에게 보냅니다. 이런 말과 함께...
"진희씨, 이런 말 알아? 사람은 말이야 아이를 세상에 남겨 놓은 이상 죽어도 아주 죽는 게 아니래..."

몇 년 전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던 「가시고기」라는 소설의 간추린 내용을 소개했습니다. 부성애, 즉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아주 잘 그린 소설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위대한 사랑이 여기 있습니다. 그 사랑은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도대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랑이기에 그토록 크고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첫째,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재산을 미리 나눠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버지가 죽기 전에는 재산을 나눠 주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죽은 후에 유산을 자식들에게 나눠 주는 것이 그들의 법이요 전통입니다. 때문에 그의 요구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아주 뻔뻔하고 염치없는 요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의 요구대로 재산을 나눠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재산을 나눠 주자 그는 며칠 안 되어 먼 나라로 가서 그 많은 재산을 다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은 재산을 다 탕진하고 말 것이라는 것도 아버지는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재산을 나눠 주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오직 아들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입장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그에게 재산을 나눠 줘야 합니까? 주지 말아야 합니까? 자식을 사랑한다면 주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재산을 나눠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돌아오기만 한다면 재산은 얼마든지 탕진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주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했습니다. 물론 아들이 재산보다 더 소중했습니다. 때문에 그 요구를 무조건 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도 그와 같이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 간절히 기다리시는 사랑입니다.

거리가 상당히 멀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보았습니다. 또한 세월이 흐르고 고생을 많이 해서 몰골이 험하게 변한 아들을 아버지가 금방 알아보았습니다.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아버지가 늘 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 아닙니까? 아버지는 식사를 하면서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심지어 잠을 자면서도 항상 집을 떠난 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집을 나간 그 아들은 객지에서 재산을 다 탕진한 후 무척 고생하며 지냈습니다.
집에서 아버지의 보호 아래 있을 때에는 정말 몰랐습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돼지를 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배가 고프면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얻어먹는 것이었습니다. 쥐엄 열매는 주로 짐승의 사료로 쓰이는 것인데 간혹 가난한 사람들이 따다가 먹기도 했다고 합니다. 서러움 중에 배고픈 서러움이 가장 크다고 하지 않습니까? 부잣집 아들이 거지가 되어 돼지가 먹는 것이나 얻어먹는 것처럼 비참한 일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그 아들은 인심이 그렇게 각박한 것도 미처 몰랐을 것입니다.
먹고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처음 알았을 것입니다. 그는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심했습니다. 이렇게 굶주릴 바에야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품꾼으로 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차마 아버지를 볼 면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품꾼으로라도 받아 주기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돌아갔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오는 그 아들의 모습을 보고 금방 알아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체면 불구하고 그를 향해서 달려갔습니다. 유대인들은 옛날 우리 양반들처럼 삼십 세가 넘으면 뛰지 않았습니다. 뛰는 것은 권위가 떨어지는 행동이기 때문에 결코 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달려가 그를 안고 그에게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도 그와 같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시는 사랑이라는 사실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용서해 주시는 사랑입니다.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는 전혀 그를 꾸짖지 않았습니다. 다만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웬만하면 탕진한 재산이 아깝고 또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괘씸해서라도 한 번쯤 호되게 야단을 쳤을 텐데 아버지는 그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오히려 그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그의 손에 가락지를 끼워 주고 그의 발에 신을 신겨 주라고 하인들에게 명령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이 돌아온 순간 모든 것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 그 자체를 귀하게 여기고 무조건 용서해 주었습니다. 다만 용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아들의 신분을 다시금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워 준 것이나 발에 신발을 신겨 준 것은 그가 더 이상 거지나 품꾼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임을 분명히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번 묻고 싶습니다. 그 아들이 회개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용서해 주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용서해 주었습니다. 회개했기 때문에 용서받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용서해 주었기 때문에 회개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돌아오기만 하면 모든 것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돌이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아들의 지위가 회복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조건 없이 용서하고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도 그와 같이 돌아오기만 하면 조건 없이 용서해 주시는 사랑이라는 사실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세상의 문제들이 모두 해결되었기 때문도 아니고 인간의 아픔과 고난이 다 끝났기 때문도 아니며 수많은 영혼이 이미 회심하여 당신의 선하심을 찬양하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녀 하나를 찾으신 것으로 크게 기뻐하신다."
칼 바르트도 그의 역작 「교회 교의학」을 집필한 후 하나님을 간단하지만 아주 명확하게 정의했습니다.
"하나님은 넘치는 사랑 그 자체이시다. 성경 66권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이 나를 아주 많이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멀리 떠나 있을수록 더욱 애타게 우리를 찾으십니다. 우리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동일하게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품으로 돌아올 그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우리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 넷째 주일을 맞으면서 여러분의 삶 속에 갈보리 십자가 위에 나타난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고 위대한 사랑이 분명히 새겨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사랑이며 한없이 기다리시는 사랑입니다. 또한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께 삶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 흉한 십자가를 지신 것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때문임을 분명히 기억하고 그 크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복되고 충성스러운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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