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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한 골육이라 (창 1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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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 골육이라 (창 13:1~17)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라고 했습니다(약 5:4). 우리는 어려서부터 돈이 말한다는 소리를 들어왔습니다. 
이 돈이 말하는 것을 들어 봅시다. "당신은 나를 손에 쥐고는 나를 당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의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내가 얼마나 쉽게 당신을 지배하는가 보시겠습니까? 나를 얻기 위해서 당신은 죽는 것 말고는 무엇이든 하려고 합니다. 나는 비처럼 값지며 물처럼 본질적입니다. 내가 없다면 사람도, 기관들도 모두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위한 생명력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보내지 않으면 아무데도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이 나를 이상한 친구들과 사귀게 합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괴롭습니다. 나 때문에 사람들은 인격을 무시하기도, 사랑하기도, 그리고 경멸하기도 합니다. 나는 성도들의 예배에, 자라나는 아이들의 교육에, 가난한 사람들이 굶을 때 육신을 위한 음식을 마련하는데도 사용됩니다. 나의 힘은 지대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꼭 가야 할 곳은 안 데려 갑니다. 난 그런 사람들을 싫어합니다. 내가 싫어하는 곳에는 나는 가지 않습니다. 내가 당신의 노예라기보다는 당신이 나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나를 조심스럽게 다루십시오."
돈이 자신을 의인화 시켜서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가게에는 "돈은 피보다 진하다"라고 쓴 액자를 걸어 놓은 곳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에게 인간을 준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만물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만물이 다 너희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 3:21-23).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아브람은 참 신앙의 길을 간 자입니다. 그는 첫 신앙의 고향 벧엘로 귀환한 후(13:1-4절)많은 가축 때문에 필연적으로 롯과의 영토 배분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이방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아브람은 롯에게 우리는 한 골육이니 서로 다투지 말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조카 롯에게 앞에 펼쳐진 땅을 먼저 선택하게 했습니다. 

사실 그는 이 문제에 있어서 조카 롯보다 좋은 것을 우선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마음을 두지 않고 기득권을 롯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는 이 땅의 것에 소망을 두는 대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기업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롯은 이웃의 이익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단지 눈앞에 보이는 행복과 부요에 눈이 멀어 죄악의 도성 소돔 근방을 선택했습니다. 사실 그가 선택한 목초지 자체는 기름지고 풍족한 땅이었습니다. 그 풍요한 땅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목초지를 선택한 인간의 마음이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그 선택은 큰 허물이 되었던 것입니다(눅 12:15). 

결국 롯이 포로와 유배, 재산상실, 아내의 죽음, 딸과의 불륜이라는 비극을 몰고 온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비록 많은 부를 소유하였더라도 그가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한다면 예외 없이 결국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는 교훈을 남겼습니다(눅 12:16-21). 
그래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했습니다(딤전 6:10).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우리는 한 골육이니 서로 다투지 말자고 했습니다. 

Ⅰ. 아브람은 재물보다 덕(德)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이 먼저였습니다. 

본문 13장 8절에 『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라고 했습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골육을 강조한 것은 주위 사람들에게 덕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종들과 조카의 종들이 서로 다투는 것은 곧 자신들의 다툼이기 때문에 아브람이 볼 때 입장이 난처했던 것입니다. 골육끼리의 불화는 먼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골육끼리 불화로 인해 원주민들에 의한 약탈로 말미암는 치명적인 손실은 예측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브람이 좋은 것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가 물질에 관심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물질에 관심이 없는 사람을 성자처럼 여기고 그 사람의 인격을 높이 평가해 주기도 합니다. 일견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록펠러에게서 천 오백 불짜리 수표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것을 현금으로 바꾸지 아니하고 책갈피에 넣어 두었습니다. 얼마 후 돈이 든 책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때 그는 "돈이 좋긴 좋은 모양이지? 책까지 돈을 보고 따라 갔으니∼"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가 한 번은 은행에서 온 송금 수표의 용도를 몰라서 불쏘시개를 한 일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아인슈타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경제 활동에 어느 정도 감각이 있어야 주위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재물보다는 덕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이 우선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3절에 『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라고 했습니다. 
덕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마음이 바르고 인간의 도리에 합당한 인격이라고 정의합니다. 덕에 대한 헬라어 '오이코도메이( )'는 '이웃들의 유익을 위한 배려'란 의미입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고전 6:12).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자유가 곧 무책임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율법은 '칭의'의 수단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했으나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규범에 따라 살 것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이라는 개념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범죄한 자들을 내버려 둘 수 있는 자유를 가진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들을 사랑해야 하는 새로운 윤리관이 형성됩니다. 율법에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살지만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덕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했습니다(고전 8:1). 
무엇보다도 자유를 통하여 진실과 사랑을 실천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방종을 다스리는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Ⅱ. 재물보다는 화목을 위한 배려(配慮)가 먼저였습니다. 

본문 13장 9절에 『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고 했습니다. 
롯이 선점(先占)한 땅은 소돔과 고모라였습니다. 그곳은 멸망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다고 했습니다(13:10). 
여기 배려(配慮)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상대방을 위해 세심한 곳까지 이리저리 마음을 쓴다는 의미입니다.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선점(先占)권을 주었습니다. 
아브람은 롯에게 『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브람의 높은 인격과 물질 때문에 형제와 화목을 저버릴 수 없다는 차원 높은 절제 의식에서 한 말입니다. 

이것은 높이 평가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배려는 세속적 처세술(창 12:10-15)을 완전히 초월한, 오직 여호와 하나님 신앙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장 3-4절에 『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고 했습니다. 

아브람의 자기희생적 배려는 먼저 골육끼리의 불화의 틈을 탄 원주민들의 기습 공격의 위험성을 막았습니다. 다음은 골육과의 화평을 유지하므로 이방사회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브람이 하나님만 바라보게 됨으로 장차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영적 지위를 견고케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 공동체가 화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의 자기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모두를 살리는 십자가의 정신적 교훈을 얻게 됩니다. 

Ⅲ. 재물보다 골육을 사랑한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복을 내렸습니다. 

1) 갈라지는 복입니다. 
본문 13장 14절에 『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라고 했습니다. 
분쟁이 끝나고(창 13:8-9) 재산을 나눈 후를 말합니다. 롯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은 낙원을 택하고 아브람은 여호와 하나님을 택했습니다(창 13:10-12). 

2) 헤브론에 있는 복입니다. 
본문 13장 14절에 『 …너 있는 곳 』이라고 했습니다. 18절에 이곳을 헤브론이라고 했습니다. 헤브론은 그 이름처럼 아브람이 하나님과 친교하고 동행하는 곳입니다. 
오늘날 선택 받은 아브람 자손들이 온갖 세속과 어두움을 떠나서 교회로 나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와 동행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3) 우주적 축복입니다. 
본문 13장 14절에 『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고 했습니다. 
본문 13장 17절에 『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고 했습니다. 
여기 동서남북은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행 1:8)를 말합니다. 전 세계에 흩어진 오늘의 아브라함의 자손을 말합니다. 

4) 물질적 축복입니다. 
본문 13장 15절에 『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12장 7절의 말씀의 반복입니다. 그 후에도 창세기 15장 18-21절, 17장 7-9절에 재차 확인했습니다. 많은 물질의 축복입니다. 

5) 자손의 축복입니다. 
(1) 티끌 같은 자손입니다. 
본문 13장 16절에 『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찐대 네 자손도 세리라 』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 『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고 했습니다. 이 티끌은 대륙에 있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입니다. 

(2) 바닷가의 모래와 같은 자손입니다. 
창세기 22장 17절에 『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고 했습니다. 수많은 섬들과 바다 위와 장차 바다 아래에 있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입니다. 

(3) 하늘의 별과 같은 자손입니다. 
창세기 22장 17절에 『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라고 했습니다. 
별은 높은 곳에 있습니다. 별은 빛을 발합니다. 전 우주 공간에 있는 능력 있는 자손, 고상한 축복의 자손, 뛰어난 자손, 정복력이 있는 자손, 창세기 1장 28절에 『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고 한 말씀은 이 세상은 능력 있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찾는 무대들입니다. 이 사명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교가 여기서 끝날 수 없습니다. 오늘의 우리의 골육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따라 난 언약과 약속에 참예한 영적 이스라엘 자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 3절에 『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고 했습니다. 

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적 골육의 개념을 엄히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 48-50절에 『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3장 35절에 『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고 했습니다. 

② 예수님은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34절에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 27절에 『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고 했습니다. 

③ 제자들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했을 때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 29절에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라고 했습니다. 

④ 아버지의 뜻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39-40절에 『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아들, 곧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택자를 찾아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회개하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1장 28-31절에 『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야 천국에 갑니다(마 7:21). 
그 어떤 경우든지 형제끼리 불신법정에 송사할 수 없다는 것이 변함없는 성경의 주장입니다(고전 6:1-11). 

우리가 죽기까지 싸워야 할 것은 악의 세력들입니다. 
마태복음 10장 34-38절에 『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6절에 『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손봉호 교수의 '덕본 양보'라는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대학 본부에서 컴퓨터 네 대를 살 돈이 학과에 내려 왔는데 학과에 필요한 컴퓨터는 다섯 대였답니다. 그래서 손교수가 양보하겠노라고 했답니다. 다음 학기에 컴퓨터 한 대 살 돈이 다시 나왔는데 물어 볼 필요도 없이 신형 컴퓨터를 손교수가 갖게 되었답니다. 이것은 사소한 이익이고 더 큰 것은 거기서 얻는 교훈이라고 했습니다. "결코 작은 이익 때문에 쩨쩨하게 굴지 말라"는 "소탐대실(小貪大失)이란 옛말이 있지만 소양대득(小讓大得)도 말이 되더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35절에 『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한 골육입니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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