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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과거와 현재(1) (엡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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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과거와 현재(1) (엡 2:1~10)


요1:12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우리가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1.그리스도인의 과거.

①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였다.(1) 

여기의 허물과 죄는 학자들에 따라 그 해석이 분분하다. 
“허물”은 “종교적인 과실” 즉 원죄. “죄”는 “도덕적인 과실” 즉 자범죄,
“허물”은 하나님께 대한 범죄, 죄는 인간에 대한 범죄. 
Vincent=허물은 특수하고, 구체적인 죄를 의미하고, 죄는 일반적인 과오. 
Augustine=허물은 고의성이 없고, 부주의하여 지은 것, 죄는 고의성이 있는 것.  
Jerome=허물은 생각 속에 머물러 있는 죄이고, 죄는 실제 행동으로 이루어진 것.

“허물”의 원어적인 의미는 “옆으로 넘어지다”라는 뜻으로, “경계선을 넘어간 것”을 말한다. “죄”는 “과녁을 맞추지 못하다”는 의미로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에 이르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허물과 죄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표준에 이르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허물과 죄”는 우리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성경은 “죽었다”고 했다.  

“죽었다”는 말은 사람이나 물질세계의 모든 것과 단절함을 의미한다.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말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말이다. 
롬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다. 

② 이 세상풍조를 따랐다.(2)

“풍조”는 시대를 말한다.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인간들이 행하는 것과 같은 그런 방법으로 죄 가운데서 행동하며 살아왔다.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왔다. 세상풍습을 그대로 닮아가며 살았다.  

③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 갔다.(2)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사단”을 의미한다. 사단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자이다. 그래서 사단을 가리켜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하였다. 사단은 하나님께 대하여 순종하지 않는 자들 가운데서 역사하며, 그들을 지배하고, 그들 인생의 주인이 된다. 

우리는 모두 마귀에게 사로 잡혀 마귀가 시키는 대로 살았고, 마귀의 편에 서 있었고, 마귀를 더 즐겁게 하였다. 

④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다.(3)

욕심은 악한 주인이다. 약1:15에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다. 
⌜세네카는 그가 쓴 행복론에서 “만일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면 먼저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욕심부터 줄여주라”고 했다.⌟
인간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전에 그렇게 살았다.

⑤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던 자였다.(3)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내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거침없이 살았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하게 창조하셨으나, 인간이 타락한 뒤에는 모두가 다 부패성을 타고 나기 때문에 성품이 악하게 되었다. 그래서 기독교는 성선설(性善說)이 아니라, 성악설(性惡說)을 믿는다.


2. 그리스도인의 현재.

4절=“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즉 하나님이 우리를 “이대로 내어버려 두시지 않으셨다.”고 하였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다. 그리고 긍휼은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태도를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구속의 동기이며, 그의 목적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더 이상 무엇으로 설명할 수 없으므로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수학적 공리(數學的公理)”라는 말이 있다. 더 이상의 원리가 설명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1+1=2는 왜 그런 결과가 나오는지, 그 이유와 원리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게 바로 수학적 공리이다. 

하나님의 사랑도 우리가 그냥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했다.

① 다시 살게 되었다.(1, 5)

사형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돈도, 음식도, 명예나 권세가 아니라 죄를 용서받고, 사형을 면하는 것이다. 죽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도 역시 다시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다시 살려 주셨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주님과 같이 죄에 대해서는 죽었고,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오심으로 주님의 부활과 함께 나도 다시 살게 되었다.  

② 은혜로 구원받았다.(5, 8)

8절=“이것은”이라는 말은 “구원과 믿음” 모두를 가리킨다. 5절의 “구원을 받은 것” 또 8절의 “구원을 받았으니”라는 말은 현재 완료형으로 구원은 벌써 받았고, 지금도 계속적으로 받고 있다는 말이다.(8) (요5:24)

그러나 그 구원은 어디까지나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것”이다. 우리의 공로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에 근거한 것이다. 하나님의 단독사역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다. 우리는 구원을 받을 뿐이며, 빼앗을 수도 없고, 노력으로 쟁취할 수도 없고, 다른 어디에 가서 구할 수 없고, 만들어 낼 수도 없는 것이다.

구원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것이다. 값없이 주셨다는 것은 값으로 매길 수 없다는 말이다. 공기나 생명은 무상으로 받은 것이다. 그것을 위해 대가를 지불한 사람도 없고, 지불할 수도 없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결론.

하나님께서 이런 구원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10절을 보면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고 했다. “만드신 바”는 “생산품” “제조품” “작품”이라는 뜻이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 “하나님의 솜씨”라는 말이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고,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선한 일”은 인간이 범죄 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본래의 계획과 뜻을 말한다. 선한 일은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 구원의 목적이요, 결과이다.

구원을 나무에 비유한다면, 선행은 나무의 뿌리나 줄기가 아니라, 그 열매이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으니 감사해서 구원의 열매로 맺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전에 하나님이 미리 예비하신 것으로 하나님께서 전에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바로 이 선한 일을 위해서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하나님의 영광은 가리어지고,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사 본래의 창조목적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구원받기 이전의 옛 사람이 아니다. 신분이 달라지고, 위치가 달라졌다. 그러므로 이제는 신분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옛 사람의 일을 벗고, 새로운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엡4:22-24=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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