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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화과나무가 주는 교훈 (막 11: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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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가 주는 교훈 (막 11:12~25)


중국 당나라 때에 손사막이라는 명의가 살았습니다.  이 사람은 그 당시에 102세를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의 나이로서는 굉장히 오래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손사막이 '천금익방'이라는 책을 썼는데, 거기에 보면 사람이 오래 장수하면서 행복하게 살려면 다음의 몇 가지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생각을 많이 하지 말라는 겁니다.  두 번째는, 염려를 많이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리고 셋째는 말을 많이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생각이 많아지면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염려를 많이 하면 그 마음에 평강을 잃어버립니다.  말이 많아지면 그 말 때문에 화를 불러오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과 염려와 말이 많아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2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늘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들만을 생각하십시오.  결코 상처 나고 염려되는 땅의 것들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그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면 위의 것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확실하고도 분명하다면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우리가 거룩한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은혜로운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부르심의 상을 바라보면서 충성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이 땅에서 행복한 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이틀 동안에 되어 진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을 보면, 두 가지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사건입니다.  그런데 성전을 깨끗하게 한 기사가 무화과나무 기사 사이에 삽입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무화과나무 사건은 내용상으로는 하나이지만 그 되어진 사건은 시간적으로 전반부와 후반부가 다릅니다.  이 두 사건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 두 사건은 사실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건은 이렇게 전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예루살렘을 둘러보신 후에 베다니로 나가서 하룻밤을 지내셨습니다.  그 다음날 제자들과 함께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다가 무척 시장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침 멀리 있는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 나무에 열매가 있을 것 같아서 기대하고 갔는데 있어야 할 열매는 없고, 잎사귀만 무성합니다.  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저주하십니다.  "이제부터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결국 그 무화과나무는 뿌리부터 말라버렸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대하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시장하셨습니다.  그래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랬는데 그 나무에는 열매가 없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런데 13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화과나무 때도 아닌데 가서 열매를 기대했다.  그런데 열매가 없다고 해서 이 나무에서 다시는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고 저주하셨다.  여러분은 이해가 되십니까?  이것이 과연 상식으로 통하는 말입니까?  솔직히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철학자 버트랜드 럿셀이라는 사람이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는 책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럿셀은 말하기를 이 사건을 보면 예수님의 인격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았으면 그것은 농부 책임이지, 나무 책임이 아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때는 나무가 열매 맺을 철도 아닌데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무를 저주해서 말라죽게 했으니 그렇다면 예수의 인격에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런 비인격적인 예수를 신뢰할 수가 없어서 그리스도인 되기를 거부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사람이 잘못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사람이 무화과나무의 특징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먼저 이른 봄, 약 3월경에 푸른 열매가 나고 곧 바로 4월경에 잎이 납니다.  그리고 통상적으로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무화과나무 열매를 일년에 두 번 수확을 하는데, 6월과 8, 9월입니다.

그래서 그 지역 사람들은 4월경의 아직 익지 않은 푸른 열매를 '파가'라 하고, 6-8월경에 잘 익은 열매를 '비쿠라'라고 각기 다르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파가'라는 열매는 맛은 없지만 그 시기에는 다른 과일이 없었기 때문에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이 먹기도 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아직 때가 아니라는 표현은 아직 열매가 익을 때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 익은 '비쿠라'는 먹을 때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푸른 열매인 '파가'는 달려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보통 나무는 먼저 잎이 나고 그 후에 열매가 맺힙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무화과나무는 푸른 열매가 열린 뒤에 잎사귀가 나야했습니다.  그것이 무화과나무에 대한 상식입니다.  우리들 주위에도 그런 나무들이 있습니다.  이제 봄인데 얼마 지나지 않으면 벛꽃이 핍니다.  그런데 벛꽃은 꽃이 먼저 핍니다.  그리고 꽃이 다 지고 난 다음에 잎사귀가 납니다.  개나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무화과나무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매는 없이 잎사귀만 무성했다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무화과나무에 잎사귀가 있으면 당연히 열매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열매가 없었다.  그래서 비정상적인 나무, 이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기대처럼 열매를 맺어주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나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나무를 저주하신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시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데 대한 오해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주님의 의도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나무를 왜 저주하셨는가?  어떤 뜻을 가지고 했는가?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셨던 의미가 무엇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우리는 삶의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오늘 이 무화과나무의 사건을 통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교훈은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의의 열매가 없이 종교적인 형식에만 치우치고 있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의 메시지였습니다.

무화과나무는 그 당시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이 무화과나무가 어떤 나무였습니까?  잎사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열매가 없었습니다.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었던 나무, 그것이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스라엘 종교의 상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상태가 껍데기만 있었고 내용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었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어디 남의 이야기이겠습니까?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보시고서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예배는 드립니다.  열심히 예배는 드립니다.  찬양도 잘합니다.  설교도 잘 듣습니다.  간혹 졸 때도 있지만 그래도 잘 듣습니다.  누가 보아도 우리는 종교 형식에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형식입니다.  여기까지는 다 형식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예배를 드렸다.  이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어떻게 달라졌느냐?  내 삶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느냐?  이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얼마나 참된 예배를 드렸느냐 하는 것은 예배 시간 가지고는 모릅니다.  예배가 끝나고 이 전을 떠나가면서 우리의 태도가 얼마나 달라졌느냐?  은혜 받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고 나는 이제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  하나님 말씀을 받았으니까 이 말씀대로 살겠다.  그렇게 결심하고 돌아가면서 뭔가 삶에 변화가 나타나야 합니다.  예배 드리기 전보다는 좀 더 친절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도를 대하는 모습도 보다 화사하고 밝은 모습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찬물 담그는 것이 싫어하던 모습이 주를 위하여 봉사하는 일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생각하고 누구보다 더 열심히 찬물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변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의 기초는 거기에 있습니다.  거기서부터 신앙 생활이 제대로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집으로 돌아가서 가정에서 남편을 향해서 아내를 향해서 어떤 태도로 대하십니까?  은혜 받은 사람답게 내가 내 아내를 사랑해야지, 내 남편을 사랑해야지, 우리 가정을 진리의 말씀 위에 세워야지….  예배의 결과가 거기서 나타나십니까?

또 내일 아침 직장에 가십니다.  오늘 주의 전에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답게 나는 비전을 얻고 용기를 얻고 새로운 힘을 얻었습니다.  그러면 직장 생활을 할 때에 태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답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주어진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고 빛을 드러내고 소금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직장생활의 현장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이 내용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무엇입니까?  그는 열매가 없는 잎사귀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책망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책망하지 않겠습니까?

형식은 있지만 내용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 이것을 우리는 15절부터 기록되고 있는 성전 청결 사건에서 해답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후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그 당시 성전에 제사를 드리러 오면 제사 제물을 사야 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제사장과 상인들이 짜고서 막대한 이익을 착취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외국에서 오는 유대인들이 헌금을 드려야 하는데 외국돈을 드리면 안 된다고 해서 돈을 바꿉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 이방의 뜰에는 환전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제사장과 상인들이 짜고서 막대한 이익을 착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제사장들이 제사를 집행하지만 머리 속에는 무슨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겠습니까?

중이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이 있다는 말처럼 그들의 머리 속에는 돈에 대한 생각만이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이런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소위 신앙의 행태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었겠습니까?  그들의 머리 속에는 이익밖에 없었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외면되고 잘못된 것들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예루살렘 종교의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저주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비슷한 상황은 오늘 우리들에게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 우리들에게서 얼마나 신앙의 본질이 강조되고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결과로써 내가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영광을 안고 우리의 삶을 통해서 얼마나 주 앞에 올바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얼마나 그리스도인 다운 제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목사인 저는 우리의 가장 커다란 관심이 우리가 주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서 삶이 얼마나 변화되었는가? 거기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관심이어야 합니다.  그것 이외에 우리 머리 속에 다른 생각이 있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책망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여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대로 사는 것, 이것이 우리들의 유일한 관심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의 변화된 삶을 이야기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잎사귀만 무성했던 무화과나무처럼 껍데기만 내비치는 내용 없는 삶이 된다면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본문을 통해서 오늘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엄숙한 경고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적어도 겉으로 볼 때는 마치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진정으로 기대했던 것은 화려하고 무성한 잎이 아니라 열매였습니다.  주님은 외형적인 성전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내면의 삶의 열매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들의 신실함을 기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의 무화과나무 저주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저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화과나무와 성전 청결의 사건은 별개의 두 사건이 아니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하나의 연속선상에 놓고 이해를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속에는 내용 없는 형식뿐인 종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사랑하는 그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서 아픈 마음으로 전달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의 모습은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형식은 있습니다.  이미 예배당 안에 들어와 있으니까 여러분들에게 형식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정말로 중요한 것은 열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얼마만큼의 열매를 맺고 있을까요?

그래도 우리가 예수를 믿으니까 세상 사람들에게서 손가락질은 당하지 않을는지도 모릅니다.  나름대로는 욕을 먹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잎사귀입니다.  그 열매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정말로 주님 앞에 내 놓아야 할 열매는 무엇입니까?

기억하십시오.  열매 없는 성도는 주님 앞에서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열매 없는 교회는 주님 앞에서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그 동안 수고해서 거둬들인 열매를 내 놓아 보거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주님 앞에 어떤 열매를 내 놓을 수 있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무화과나무 사건을 통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두 번째 교훈은, 우리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 속에 있어야 할 열매에 대한 교훈, 그것이 본문의 사건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무화과나무라는 것은 시각적으로 별로 아름다운 나무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무슨 땔감이나 재목용, 건축용으로는 전혀 사용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꽃도 별로 입니다.  무화과나무는 꼭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만 존재합니다.  무엇입니까?  열매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위해서만 존재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존재하는 목적, 하나님의 백성들이 존재하는 목적,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유일한 목적은 꽃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근사한 폼이나 잡으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서 대접받으려고 예수를 믿고 직분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서 이 땅에 존재하는 진정한 목적은 열매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열매, 그 열매를 통해서 주께 영광을 돌리고,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은 바로 열매를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떻게 열매를 맺습니까?  오늘 내 신앙이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교회 나온지 몇 년 되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어떤 열매를 맺고 계십니까?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해서 그가 반드시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다고 해서 열매 맺는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솔직히 우리들 주위에는 신앙생활의 연륜은 계속되고 있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주의 일에 힘쓰며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지만 무기력한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가 교회에 나오고 직분을 받아서 사람들이 보기에는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겉으로는 그럴듯하면서 화려해 보이지만 그러나 그 내면은 불신자보다 더 완악한 심령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거짓된 삶을 거부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가정에서 직장에서 생활을 하는 내 모습은 무기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실패하고 자꾸만 넘어집니다.  내 모습은 왜 이렇게 무기력합니까?  왜 열매를 맺지 못합니까?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달라질 것입니다.  내가 정말로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내가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것이 첫 번째 열매를 맺는 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그리고 20절은 그 이튿날의 사건입니다.  본문 20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그 이튿날 아침에 보니까 말랐습니다.  그러니까 말씀한대로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21절에 베드로가 주님께 말합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이때 22절에서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말한 대로 되지 않았느냐?  너는 말씀을 믿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묻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십니까?  이 말씀이 진리라고 믿으십니까?  생명이라고 믿으십니까?  능력이라고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더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시기를 바랍니다.  네 하나님을 믿으라.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라.  그래야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면 열매가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데도 열매가 없다고 호소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하는데 열매가 없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정말 신뢰한다면 여러분이 신뢰하는 하나님께 여러분의 삶의 문제를 가지고 나와서 기도하고 계십니까?  문제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23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리고 24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데도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기도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살아 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다면 그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왜 내 삶이 무기력해 졌는가?  왜 내 삶에 열매가 없는가?  왜 기쁨이 없는가?  왜 능력이 없는가?  왜 활력이 없는가?  왜 내 삶이 생동하지 못하는가?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내 삶에서 기도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에게 기도 생활이 왜 필요합니까?  내 이성과 내 계획과 내 지식을 초월한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에 보다 나은 세상과 세계를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발견하고 깨달은 일은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한 사명을 맡겨서 그 사람에게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기어이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이루고 맙니다.  하나님은 물러설 줄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 세움을 받았을 때에는 부족한 저를 통해서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바른 믿음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기가 막힐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기가 막힐 때에 기도합니다.  기가 막힐 때 기도하면 열립니다.  기억하십시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킵니다.  기도는 역사를 일으킵니다.  기도는 기적을 가져옵니다.  기도는 놀랍게도 하나님의 비밀의 공개 통로입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있어서 제일 무서운 죄악이 무엇입니까?  시험에 들기 전에 기도를 놓친 것입니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죄 이전에 짓는 죄가 무엇입니까?  기도를 하지 않는 죄입니다.  활동과 행동과 참여는 많은데 기도가 없는 것입니다.  영감이 없으니까 실수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니까 인간적인 것이 자꾸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위치가 커질수록, 여러분이 참여하는 회의가 많을수록, 여러분이 하는 일이 많아질수록 기도하십시오.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대로 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쫓아다니다 보면 엉뚱한 짓들을 많이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일을 하다 보면 인간적인 감정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래서 왠지 섭섭해집니다.  그래서 불평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엎드리는 순간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지하게 기도하는 순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기도하는 사람이 세워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는 기도하는 일꾼들이 모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진실한 기도의 사람들이 만든 역사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다 시험에 듭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에는 다 시험에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만이 하나님의 비밀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기도의 제목을 제한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도의 영역을 제한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무엇이든지 구하면 이루어진다.  세상에 이것보다 신바람 나는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이루어진다.  눈이 안 돌아갑니까?  로또 복권도 확실한 로또 복권이 아닙니까?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이루어진다.  이것이 얼마나 위대한 사건입니까?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내 삶이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의 부요를,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면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는 순간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기도하려고 애를 쓰는데도 기도의 응답이 없다고 말할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그렇게 열심히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믿고 기도했는데도 맹맹하다고 하소연하는 분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기도가 막혔는지도 모릅니다.  기도의 통로가 막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기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과 갈등관계에 있다면 그것이 기도를 막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이웃을 향한 미움이 있다면 그것이 기도를 막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기도를 막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25절의 말씀입니다.  25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너희가 기도해도 어떤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럴는지도 모른다.  그들을 용서하라.  그리하면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용서하여 주시리라.

그렇습니다.  내가 이웃을 용서할 때 기도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나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그를 향한 미운 마음을 포기하고 용서하기 시작하면 그 순간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것입니다.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내 삶은 생동하기 시작합니다.  주의 능력이 우리의 삶 속에 역사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자가 없는 하나님께서 열린 문을 우리 앞에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십시오.  기도해도 그 기도가 막혔거든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쓴뿌리를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내 삶의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내 이웃들을 돌아보십시오.  용서하지 못한 사람, 내가 가슴으로 품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그를 깨끗이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그를 사랑하십시오.  그 순간부터 여러분의 기도는 살아 움직일 것입니다.  내 삶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여러분, 신앙이 살아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그것은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존재할 필요가 없으면 다 끝난 것이 아닙니까?

아주 깊은 동굴에 조그만 호수가 있습니다.  어떤 동물학자가 그 호수 안에 고기들을 연구해 보니까 그 고기 중에서 보지 못하는 고기가 그렇게 많더랍니다.  그 이유를 연구해 보니까 깊은 동굴 속에서는 빛을 보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은 이 고기는 세월이 흘러가면서 점차 장님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보아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눈이 있어도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존재할 필요가 없는 인생은 다 끝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과 이웃들 앞에서 얼마나 존재할 가치가 있는 인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 앞에 영광을 돌리고 이웃들에게 필요한 인생, 쓰임을 받는 인생, 열매를 맺는 인생….  여러분은 이런 인생을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 나아와 굴복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습니까?  내 삶을 돌아보고 내가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살펴보고 그를 용서하십시오.  그 순간 하늘의 문이 열리고 주의 능력이 쏟아질 것입니다.  내 삶이 살아 움직일 것입니다.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만약 내 인생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잎사귀만 무성한 나무라면 주님은 내 인생의 나무 앞에 오셔서 나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존재할 필요가 없느니라.  너로부터 영원히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 저주가 두렵거든 열매를 맺는 인생을 향해서 새롭게 태어나십시오.  기억하십시오.  종교적 형식주의는 위선을 낳게 됩니다.  그러한 종교는 그 시대에서 아무런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그러한 것들의 마지막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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