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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전 안의 딴 재미 (마 2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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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안의 딴 재미 (마 21:12~17)


요즘은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고난을 당하셨는데 누가,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하였는지 여러분은 구체적으로 알고 계십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은 빌라도도 아니고 로마군인도 아닙니다. 저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생각이 본래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게 한 사람들은 로마사람들이 아니라 유대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 중에서도 교회의 지도자였던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제사장과 같은 사람들 이었습니다.

왜 저들은 예수님을 싫어하고 종국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려고까지 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이 저들에게 불편하였기 때문입니다. 왜 저들은 예수님이 불편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오늘 본문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동전 바꾸는 사람, 양 파는 사람, 비둘기 파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 드리러 오는 사람들에게 돈을 바꾸어 주고, 제물인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이권이 딸려 있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대로 말하자면 성전 안에서 딴 재미를 보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전 안에 있는 진정한 의미의 재미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고 제사 드리는 재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공부하는 재미 등등. 그러나 성전 안에는 그와는 전혀 다른 딴 재미들도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장사꾼들의 상을 들러 엎으셨습니다. 저들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다가 저들의 미움을 받게 되셨습니다. 그러다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된 것입니다.

저는 71년도에 신학교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20명이 정원이었는데 12명이 지원이었으니 미달이었던 셈입니다. 그 때 신학교는 그랬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입학하였던 해 다니던 교회의 장로 선거가 있었습니다. 장로에 피선된 집사님 한 분이 극구 사양하시다가 결국에는 교회를 떠나셨습니다.

요즘은 우리 교단 신대원 입학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올해도 아마 6대 1 정도의 경쟁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희 때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신학교의 문이 좁아지면서 함께 나타난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마다 장로선거가 과열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왜 전에는 신학교에 가지 않으려 하고 장로가 할 수 있는 대로 되지 않으려고 했는데 요즘은 반대가 된 것일까요? 너무 부정적인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지만 그 이유는 전에 비교해서 목사와 장로가 된다는 것이 십자가 보다는 면류관이 더 많기 때문이 아닐까요?

물론 아직도 작은 교회가 많고 그 작은 교회에서 시무하시는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은 여전히 고생하시고 힘드시지만, 전반적으로 교회가 제가 신학교에 갈 때보다는 많이 부흥하고 성장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출석교인이 500명만 넘으면 큰 교회 취급을 받았는데 요즘은 2,000명이 넘어도 큰 소리 칠 수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커지고 부흥하게 되자 교회 안에 이런 저런 인간적인 재미가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미국 이민 교회 집회를 꽤 여러 해 동안 하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직분이 명예가 되어가고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권력으로 까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이민 온 교민들은 대개 교육 수준이 높고 또 부지런하여 고생들은 하였지만 보편적으로 볼 때 미국에서 제법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대개 집도 큰 집에서 살고 타고 다니는 자동차들도 보면 만만치 않습니다. 돈은 좀 벌어 어느 정도 성공하였지만 사람은 돈만 가지고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지위가 필요한데 미국에서 그것은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의 직분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가 작았을 때에는 모르겠는데 이민 교회 중에서도 꽤 큰 교회가 생겨나게 되면서부터 그런 교회의 장로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신분 상승의 효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목사와 장로와 권사와 집사는 교회와 교인들을 섬기는 직분인데 교회 안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직분은 계급이 되고 말았습니다. 권력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자리가 되고 권력이 되다보니 가능한한 그 자리와 권력을 오래 동안 붙잡고 있으려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원로, 은퇴, 명예, 공로, 증경과 같은 타이틀이었습니다. 인정받고 대접받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재미에 빠져 정작 중요한 예수 믿는 재미를 놓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부터 교회는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약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에 기득권층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그 기득권층에 줄을 대어 교회 안에서의 신분상승을 꾀하는 무리들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심각하게 세속화되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일은 처음부터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거의 누구나 다 소명과 충성심에서부터 출발을 합니다. 교회 사랑하고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변질됩니다. 충성은 이기적인 마음으로 소명은 인간적인 야망으로 바뀝니다. 그것을 조심하지 않으면 성전에 좌판을 깔아 놓고 장사하는 교회의 기득권층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91년도 동안교회 담임목사가 되었을 때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교회가 거래하는 은행 지점장이 인사차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거의 정기적으로 저를 찾아와 인사를 하셨습니다. 말로는 지나다 들르셨다고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었습니다. 오실 때 빈손으로 오시는 법은 없었습니다. 추석에는 갈비를 들고 오신 적도 있었습니다. 

교회 건축 때 은행의 융자를 받아야만 했었습니다. 융자를 받을 때 제가 은행에 가서 서류를 꾸미지 않았습니다. 직원이 서류를 다 꾸며가지고 제 사무실에 와서 도장을 받아 갔습니다. 목사님 바쁘신데 오실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동안 교회 규모가 지금 우리 평광교회 보다 크지 않았을 때인데도 그 세도(?)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노회에 가면 은근히 노회에서 제일 큰 교회의 담임목사라는 대접을 받았습니다. 시샘도 있었지만 그 시샘 조차 기분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들이 말하자면 오늘 설교의 제목인 성전 즉 교회 안에 있는 딴 재미들이었습니다.

그런 재미는 담임목사만 보는 것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장로님들도 상당히 보시는 것 같았고 안수 집사님과 권사님들도 제법 누리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것이 교회를 건강하게 하지 못한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이 성전에서 쓸데없는 재미 보는 사람들을 쫓아내시며 성전을 청결케 하시듯 부족하지만 교회 개혁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습니다. 동안교회에서 그 일을 다 마칠 수 없어서 새롭게 높은 뜻 숭의 교회를 개척하기도 하였습니다. 개혁의 내용과 목표는 교회 안에 있는 쓸데없는 재미를 없이하는 것이었습니다. 자리와 권력과 지나친 영향력을 배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동안교회에서 시작하고 높은 뜻 숭의교회에서 좀 더 발전이 되었습니다.

현재 높은 뜻 교회 정관에 의해 시행되고 있는 것들을 소개해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교회의 정년을 65세로 하였습니다. 둘째, 원로제도를 없이하였습니다. 셋째, 목회자는 6년마다 교인들의 재신임을 묻도록 하였습니다. 만일 재신임을 얻지 못하면 일 년 안식년 후 교회를 사임하는 것으로 하였습니다. 

넷째, 시무장로는 6년 단임제로 하였습니다. 다섯째, 당회와 제직회의 기능을 분리하여 독립적인 기관이 되게 하였습니다. 당회와 당회원이 하는 일과 제직회와 제직회원들이 하는 일이 구별되었습니다. 정책은 당회가 세우고 집행은 제직회가 하도록 하였습니다. 당회원은 일을 집행하는 일에 어떤 모양으로든지 결재권을 갖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대신 당회원들은 교회의 감독이 되어 제직들이 집행한 일을 감독하고 감사하는 일을 맡게 하였습니다. 좀 답답하고 불편한 점은 있었지만 권력이 한 쪽으로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제도에도 문제점이 있습니다. 사람이 만든 제도에 완전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제도를 고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 안의 흐름을 좀 빠르게 하자는 것입니다. 너무 특정한 사람의 영향력이 교회 안에 오래 있도록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권력이 어느 한 사람이나 기관에 집중되지 않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기득권층이 생기지 않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지나친 권력이 형성이 되어 교인들로 하여금 쓸데없는 딴 재미에 빠지지 않게 하자는 것입니다.

동안교회에서 이와 같은 개혁을 부르짖을 때 제 나이는 40대 중반이었습니다. 그래서 연세드신 어른들로부터 많은 오해도 받았습니다. ‘너도 나이 들어 내 나이 되어봐라’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 이젠 저도 60대가 되었습니다. 제가 40대에 부르짖던 개혁이 제 발목을 잡는 나이가 벌써 되었습니다. 제 나이도 이제는 보수를 외쳐야 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저희 높은 뜻 교회에서 제 임기는 이제 6년 남았습니다. 은퇴하면 높은 뜻 교회 연합의 대표도 될 수 없고, 재단의 이사장도 될 수 없습니다. 원로도 될 수 없습니다. 생각하면 좀 섭섭한 면도 있고 불안한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도 나를 위해서는 별로 좋은 제도가 아니지만 교회를 위해서는 그것이 옳은 일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은퇴하게 되면 목사라는 타이틀도 할 수 있으면 떼고 그냥 좋은 교인노릇하고 싶습니다. 할 수 있는대로 최선을 다하여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볼 작정입니다. 제 오래 적부터의 꿈인 있으나마나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제 스승이신 임택진 목사님이 그런 분이셨습니다. 목사님은 시무하셨을 때보다 은퇴하신 후가 더 훌륭하시고 근사하셨습니다. 은퇴하신 후 거의 시무하시던 교회에 나가시지도 않으셨습니다. 교회의 이런저런 일에 어떤 영향력도 끼치지 않으시려고 무척이나 노력하셨습니다.

후임 목사님이 오셔서 제가 보기엔 멀쩡한 예배당을 허물고 새 예배당을 지으시려 하셨습니다. 저는 그것이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되어 임 목사님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그것을 불평하였습니다. 저는 그러면 목사님도 제 생각에 맞장구를 쳐 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으로부터 나온 말씀은 참으로 엉뚱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엉뚱한 말씀을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내 교횐가 뭐?>

남들이 들으면 오해하기 쉬운 말입니다. 그러나 뜻은 그런게 아닙니다. 목사님처럼 교회 사랑하고 충성하신 분도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퇴하신 후에 목사님은 그 사실 조차 잊으시려고 하는 듯 싶었습니다. 당신은 은퇴를 하셨기 때문에 후임 목사가 예배당을 허물든 짓든 상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직은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만 분립된 높은 뜻 교회에 만일 이런 저런 문제가 생기면, 혹시 당회원이나 교인 중에 담임목사에게 불만이 생기면 저에게 찾아와 하소연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구관이 명관이라면 제가 있을 때가 좋았다고 이야기 할는지도 모릅니다. 그 때 저는 우리 목사님처럼 대답하렵니다. <내 교횐가 뭐?>

교회를 분립하고 담임목사 자리를 내 놓으려고 할 때 많은 목회자들이 저에게 그러다가 뒷방 늙은이 된다고 경고해 주었습니다. 저도 뒷방 늙은이가 되면 섭섭할 겁니다. 그러나 저는 교회를 위하여 그 섭섭함을 이겨내야 된다고 믿습니다.

양재동에 있는 어는 미션 스쿨 채플에 갔었을 때 중학교 교장이셨던 장로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을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있으나 마나한 교장이 되려고 힘씁니다.’ 충격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없어서는 아니 될 사람 다음 단계를 말씀하는 것이었습니다. 없어서는 아니 될 사람이 되면 좋지만 거기에 머물게 되면 그 교회는 그 사람이 없으면 안 되는 교회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위해서는 없어서는 아니 될 사람이 되는 것이 좋지만 교회를 위해서는 그것을 내려놓고 스스로 있으나마나한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뒷방 늙은이가 되어야만 합니다. 교회를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내려놓고 스스로 있으나마나한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저는 정말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동안교회 담임목사가 되었을 때 영락교회 글씨를 잘 쓰시는 장로님으로부터 내가 살면 교회가 죽고, 내가 죽으면 교회가 산다는 뜻에 我生敎會死 我死敎會生이라는 글씨를 받았습니다. 저는 그 말씀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초대교회때 교회의 목회자와 장로님들은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가 이만큼 부흥하고 성장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그 본을 본받아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죽이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과 야망을 위하여 교회를 이용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우리 평광교회는 목사 장로 집사 권사 되는 것이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작은 교회가 아닙니다. 평광교회의 목사 장로 집사 권사가 된다는 것은 세상적인 매력이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아셔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평광 교회에는 먹을 것이 많습니다. 누릴 것이 많습니다. 재미 볼 것이 많습니다. 우리 평광교회도 교회안에 딴 재미 볼 것이 제법 많은 교회라는 것을 아셔야만 합니다. 거기에 맛 들여서 실수하게 되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에게 혼이 났던 사람 같이 되기 쉽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성전안의 참 재미를 모르고 성전안의 딴 재미를 보다가 예수님께 책망을 받고 자기를 책망하는 예수님에게 반감을 갖게 되어 나중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앞장 선 사람들은 성전 밖의 로마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성전 안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 중에도 바리새인과 제사장 그리고 율법사와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평광교회 교인들도 오늘 설교를 심각하게 들으셔야만 합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 평광교회도 오늘 이 설교에 대하여 자유로운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쉽지 않은 설교이고 사탄이 틈을 타기 아주 쉬운 설교입니다. 그러므로 조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많이 기도하시면서 이 설교를 소화해 내실 수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이 쉽지 않은 설교에 은혜를 받아 모든 교인들이 아멘 할 수 있다면 저는 우리 평광교회의 앞날이 지금보다 훨씬 더 밝아지고 건강해 지리라고 확신합니다.

오늘 말씀은 돌과 같은 말씀입니다. 딱딱한 말씀입니다. 받기 힘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1장 44절에 보면 이런 무서운 말씀이 있습니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이 돌과 같은 말씀이 여러분 위에 떨어지지 않도록, 그리고 여러분이 이 돌과 같은 말씀위에 함부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역사와 은혜로 이 돌과 같은 말씀이 심령 골수를 쪼개는 말씀이 되어 자신과 교회를 구하는 복된 말씀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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