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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꿀보다 달도다정금보다 사모할 것이며 (시 19: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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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보다 달도다정금보다 사모할 것이며 (시 19:7~10)
  

제가 미국에서 신학 공부를 하던 중 언젠가 우리나라에 다니러 왔을 때에 마침 당시의 당회장이셨던 원로목사님의 새 승용차를 타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차의 인테리어를 보니까 아직도 여기저기에 비닐 커버들이 씌워져 있기에 당시 원로목사님의 차를 운전하시던 집사님께 물어 보았더니 새 가죽에 때가 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좀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만약 가죽에 때가 타는 것이 그렇게 걱정된다면 아예 처음부터 비닐로 인테리어가 되어 있는 차를 사면 그런 마음고생을 할 필요가 없고 돈도 더 싸게 들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비닐 커버들은 어디까지나 자동차가 판매되기 전 운반 과정에서 무슨 손상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씌워져 있는 것이며, 일단 차를 사고 나면 그것을 벗겨내고 그 가죽의 색깔과 감촉을 마음껏 즐겨야 할 터인데도 몇 달이 지나도록 도통 그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런 심리는 우리 모두가 다 조금씩은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좋은 물건이 생기면 그것을 마음껏 쓰고 싶은데 그렇게 하다가는 그것이 상하고 소모될 것이 두려워서 그런 해프닝을 벌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다윗은 정말 귀하고 좋은 것이면서도 또한 마음껏 즐겨 사용할 수 있는 것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본문 10절에서 다윗이 "10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금'이란 '순수한 금(fine gold)'을 뜻하며 '사모하다'라고 번역된 말은 '흠모하다'나 '그리워하다'는 뜻이 아니라 '탐을 내다, 아주 가지고 싶어 하다(desirable)'라는 뜻입니다.
금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싶어 하는 귀금속이지만 더욱이 그것이 순도 100퍼센트의 순금이라면 더욱 탐이 날 수밖에 없는, 실로 귀중한 소유물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처럼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귀중한 것, 그야말로 보배 중의 보배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그 율법을 또한 '꿀'에 비유함으로써 금으로써는 표현할 수 없는 다른 한 가지 요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즐기는' 것입니다.
금의 귀중함은 그냥 가만히 있어도 어디로 사라지지 않는 것이지만, 꿀은 무슨 미적 아름다움을 감상하거나 어떤 재산 보존이나 증식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반드시 자기가 직접 먹어보고 그 단맛을 즐기는 데에 효용가치가 있습니다.
  
즉 성경 말씀은 귀중하니까 잘 소장해 놓으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사용해서 그 은혜를 만끽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많이 읽고 사용한다고 해서 손상을 입거나 소모될까봐 걱정할 필요는 조금도 없습니다.
'송이꿀'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원래는 무슨 '꿀 덩어리'라는 뜻이 아니라 '벌집(honeycomb)'이라는 단어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꿀단지에 조금 담겨 있어서 한 숟가락씩 아껴서 맛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꿀이 흠뻑 담겨 있는 벌집처럼 마음껏 먹어도 결코 모자라지 않고 계속 그 단맛을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과연 성경 말씀은 무엇이기에 이처럼 '정금보다 더 사모할 만큼 귀중한' 동시에 '송이꿀처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것인지를 본문을 통하여 세 가지로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성경은 타락한 심령을 자연계시보다 훨씬 더 지혜롭게 깨우쳐 주는 완전한 계시입니다.

7절 말씀에 "7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본문 6절 이전에서 보았던 '자연계시'보다 훨씬 더 깊고 자세한 계시를 보여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율법" 즉 '말씀계시'로서 다윗이 본문 7절 이하에서 노래하고 있는 주제입니다.
그는 우선 "여호와의 율법"은 "영혼을 소성케 한다"고 했는데 이 말은 '사람의 영혼에 생기를 북돋우어준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은 좀 엉뚱한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법'이라고 할 때에 누구의 마음에서나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반응은 '제한, 부자유, 속박' 이런 것들인데,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법은 사람의 영혼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는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이런 다윗의 고백을 공감하며 체험하기 위해서는 바로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라는 사실을 먼저 확신해야 합니다.
사람이 세상의 법들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그 법이 과연 공평한 것인지, 그 법이 정말로 내게 유익한 것인지, 그 법이 정말로 이 사회를 유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법인지에 대해서 먼저 의심이 생기고 공감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완전무결하신 하나님께서 만드신 법은 사람이 검토해 보거나 유권해석을 내리고 어쩌고 할 필요도 없이 이미 완전무결합니다.
그리고 신자는 성경을 바로 그처럼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 법은 나를 얽매고 손해 보게 할 법이 결코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새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는 법, 즉 사람의 심령을 하나님의 차원으로 승화시켜 주는 놀라운 법인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다윗은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한다"고 노래했습니다.
세상에도 사람을 더 지혜롭게 만들어 준다는 책들은 많이 있지만, 그런 책들은 모두가 다 그 책을 이해할 수 있는 기본지식이 있어야 유익한 것들입니다.
교양서적을 읽고 지혜로워지려면 어느 정도의 기본 상식이 있어야 되고, 철학서적이나 과학서적을 읽고 더 지혜로워지려면 기본적인 논리학이나 수학과 물리학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아무리 '우둔한 자'라 해도 당장 그 누구보다도 지혜롭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유일한 말씀입니다. 
그것 역시 바로 앞에 나오는 말씀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다"라는 사실을 믿음으로써 가능하게 됩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라고 믿는 신자보다 똑똑한 사람이 누가 있겠으며,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세상은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라고 믿는 신자보다 더 지혜로운 과학자가 누가 될 수 있으며,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역사의 끝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라고 믿는 신자보다 더 유식한 사학자가 누가 될 수 있겠습니까?
즉 성경의 증거를 조금도 의심하거나 따지려 하지 아니하고 그저 '완전한' 말씀인 줄로 믿는 자세로만 받아들이면,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 해도 지극히 간단하게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방법에 있어서 시각적인 그림을 이용하는 것은 글로써 하는 것보다 더 쉽고 빨리 이해하게 할 수 있습니다.
신호등을 예로 들어본다면, 만약 빨강 노랑 파랑으로 구별되는 신호를 쓰지 않고 똑같은 바탕색의 전등에 '정지, 주의, 진행' 따위의 글자를 써서 표시한다면 교차로에서는 훨씬 더 많은 사고가 일어날 것입니다.
  
반면에 글로써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것은 조금 더 어려울지는 몰라도 훨씬 더 정확하고도 깊은 뜻을 전달하는 데에는 그저 그림만 가지고 하는 것과는 상대도 될 수 없을 만큼 우월합니다.
그래서 훨씬 더 자세한 교통법규들은 그림이나 기호만으로는 어림없고 반드시 성문화된 글로써 제정되어 있는 것이며, 운전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는 그 누구라도 반드시 그것을 읽고 숙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화가의 그림을 감상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추상화 같은 것은 그 그림 자체만 들여다보는 것보다는 화가가 그 그림에 붙인 제목이 무엇인지를 알고 나서 감상하는 것이 그 이해를 훨씬 더 깊고 정확하게 만들어 주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그저 그림만 가지고 의미를 전달하는 것은 그 전달내용이 단순하거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수준이 낮을 때에 주로 적용하는 방법이며, 그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도 깊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수준도 높을 때에는 역시 글로 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존재를 '시각적'으로만 전달하는 자연계시는 역시 그 깊이와 차원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교통신호등처럼, 남녀노소, 유식자 무식자 할 것 없이, 즉 신자나 불신자나 할 것 없이 누구나 다 척 보면 쉽게 알 수 있도록 전달되어지는 계시 수단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말씀계시는 보다 영적 차원의 깊이와 높이가 있는 신자들을 위해서 베풀어 주시는 것으로서 영적 문외한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고차원의 계시입니다.
  
불신자들은 반항하기만 하는 율법을 완전하신 여호와께서 만드신 완전한 법으로 의심의 여지없이 받아들이고 불신자들은 비웃는 성경의 증거를 오직 일점일획도 틀림없는 무오한 증거로 믿음으로써, 바로 이 말씀 계시를 통하여 원래 타락했던 자신의 영혼을 소성시키고 본성적으로 우둔했던 심령을 지혜롭게 만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경은 죄인을 바른 법도로써 거룩한 삶으로 성화시켜 주는 순결한 계시입니다.

8절에 기록하기를 "8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말씀의 계시를 "여호와의 교훈과 여호와의 계명"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교훈'이나 '계명'이나 둘 다 윗사람이 내리는 말씀으로서 자연히 어떤 권위와 구속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니 그것만 생각한다면 이것 역시 따르기에 반감이 생기고 지키기에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말씀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해 준다는 것이겠습니까? 

왜냐하면 우리 기독신자들은 그 하나님의 교훈과 계명을 통하여 자신의 생활의 수준을 불신자들보다 훨씬 더 높게 향상시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여기서 '정직하다'라고 번역된 말은 '올바르다'는 단어로서 여호와의 교훈은 항상 '바른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그 '바른 교훈'을 통하여 자신의 언행을 비추어봄으로써 자신의 잘못된 것들을 찾아낼 수 있게 됩니다.
즉 '책망하고 바르게 해 주는' 성경의 교훈이 없었더라면 자기가 얼마나 잘못된 죄인인 줄도 모르고 살았을 것인데, 그 말씀 덕분에 깨닫고 회개하고 고치고 변화 받은 사람이 될 수 있으니 실로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그 말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해 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원래 타락한 죄인은 아무 것도 올바로 판단할 수 없는 어두운 상태에 있었는데, 하나님의 계명이 그런 심령들로 하여금 선한 말, 거룩한 행동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도록 밝혀준다는 뜻입니다. 실로 그렇지 않겠습니까?
만약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하나님의 계명이 우리에게 엄히 명령해 주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살인을 저질러도 합리화시키고 간음을 저질러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도둑질을 하고나서도 생활의 수단으로만 치부하는, 세상의 불신자들과 똑같은 저질 수준에서 여전히 살고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미국의 사립 중고등학교는 재정적으로 정부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의 자유경쟁 원칙이 철저히 적용되면서 서로 자기네 학교를 명문으로 만들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하게 되는데 그 일환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 바로 엄격한 교칙입니다.
미국의 공립학교에는 사실상 교칙이라는 것이 없다고 해도 무방하며 거의 자유방임 그 자체라고 해도 조금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껏해야 마약 따위를 매매하거나 사용하는 것을 금하는 정도일 뿐 그 외의 언행에 대해서는 조금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부 공립학교에서는 고등학생들이 이미 학교 내에서 동성연애 클럽을 조직하기도 하며, 좀 더 동네가 좋지 않은 공립학교에서는 학생이 교사의 면전에서 대놓고 상스러운 욕을 퍼붓는 것도 예사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이 사립학교, 특히 전 학년 과정을 기숙사에서 생활해야 하는 유수한 사립학교에서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학과가 끝나면 당연히 집으로 돌아가서 자유시간을 가지게 되는 공립학교 학생들과는 달리, 이들은 주중 외출은 극히 제한되어 있고 주말 외출 역시 반드시 사전에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엄격한 학칙들을 정해놓고 어길 경우에는 일정한 벌칙이나 퇴학까지 시키기 때문에, 그런 유수한 사립학교의 학생들은 더욱 공부에 전념하게 될 뿐 아니라 그 인격이나 사회성 발달도 아무래도 자유방임식 교육을 받은 학생들보다는 월등히 앞서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특히 미국처럼 자유로운 사회에서 자라나던 아이들이 그처럼 모든 행동에 제한을 받는 단체에 소속되어서 그 팔팔한 청소년기를 보내기란 무척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좋은 대학교에 진학하고 사회에서 성공한 후에 그 시절을 돌이켜보게 될 때에는, 자기가 그런 명문사립학교에서 받았던 철저한 주입식 교육과 자기를 구속하던 엄격한 학칙들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할 것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어떤 엄격한 규칙이라는 것은 이처럼 사람의 품성과 생활 습관을 더욱 향상시키게 됩니다.
규칙이 없었더라면 자연스럽게 나태해지고 그것을 당연히 여기면서 살았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도, 일단 규칙을 지켜야 되는 상태에 들어가서 그 규칙에 의해서 자신의 언행들을 하나하나 점검하고 판단하고 반성하고 그 수준에 맞추어 나가게 되면, 아무래도 더 성실하고 더 올바른 행동거지가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학칙을 따르는 학생들과 학칙이 아예 없는 학생들 사이에는 점점 더 수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듯이, 말씀의 교훈과 계명을 통해서 자신의 삶에 올바른 통제를 받는 기독신자와 그렇지 아니하고 자유방임으로 살아가는 불신자 사이에는 더욱 더 큰 차이가 벌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성도는 성경을 통해 자신을 '성화'시킴으로써 그저 세상의 불신자들보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제일 나중에는 바로 예수님과 똑같은 상태의 '영화'라는 엄청난 위치에까지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까닭에 나 같은 죄인도 바르고 거룩한 고차원의 성화생활을 하게 되었음을 깨닫고 체험함으로써, 그 '교훈'이 결코 귀에 거슬리지 아니하고 그 '계명'이 결코 부담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순결한 말씀이 나의 삶을 주장하여 결국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해 줄 것을 인하여 진심으로 기뻐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성경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해 주는 최고의 특별계시입니다.

9절에 "9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우선 하반절을 먼저 보면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라고 다윗은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규례'라는 단어는 '지켜야 하는 법'이라는 뜻과 동시에 '그 준법 여부에 따라서 심판을 받게 될 법'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실로 하나님의 규례라는 것은 그 준법 여부에 따라서 영생 아니면 영벌이라는, 천하보다 귀한 생명에 대해서 극과 극의 판결이 따라오는 법이므로 세상의 그 어떤 다른 법보다 최고의 비중을 가지고 있는 법입니다.
  
하지만 이 법은 결코 사람이 시시비비를 따질 수 없는 법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천당에 가고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간다는 것이 불만스럽다고 해서 항의할 수 있는 법이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법은 "확실하여 다 의로운" 그야말로 완벽한 법이기 때문입니다.
9절 상반절의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라는 말씀 역시 같은 맥락으로서 이 '정결하다'라는 단어는 '깨끗하다(clear)'라는 뜻입니다.
즉 이 9절 말씀은 '여호와의 법은 확실하고 의로운데 그 순도는 영원히 변함없이 100퍼센트이다.'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여호와의 법은 그처럼 완전무결한 법이 되는 것입니까?
바로 9절 서두의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라는 말씀에 그 요점이 있습니다.
사실 원문을 보면 이 부분에 '도'라는 단어는 없고 그냥 '여호와 경외(the fear of Jehovah)'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7절부터 9절까지 매절의 내용이 모두 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제로 하여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그런 까닭에 이 9절 상반절의 주어에만 무슨 '율법'이나 '계명'이나 '교훈' 등의 단어는 없다 할지라도 이 '여호와 경외'라는 두 단어가 '하나님의 말씀'과 동격으로 사용된 것이 문맥상으로 볼 때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개역한글성경뿐 아니라 새로 나온 우리나라말 성경들마다 '말씀', '율법' 혹은 여기처럼 '도'라는 단어를 첨가해 둔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이라는 단어조차 사용하지 아니하고 그 '말씀'과 '여호와 경외'를 동격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이 성경의 핵심이 바로 '여호와 경외'에 있음을 너무나도 뚜렷하고도 멋있게 증거해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곧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을 얻기 위함인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가 100퍼센트 순결하고 완전함을 깨닫는 것도 역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며, 성경이 명하는 법도를 하나도 어김없이 순종하게 되는 것도 바로 그 '여호와 경외의 신앙' 때문에 절로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라고 선언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곧 하나님의 영존하심과 절대주권자 되심을 자증하시는 말씀이며, 예수님은 그 불가시적인 하나님을 우리의 육안에 직접 계시해 주시기 위하여 '화육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이 성경은 곧 내게 대한 증거이다.'라는 예수님의 놀라운 등식은 너무나 정확하고도 멋있게 맞아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일부 기독신자라는 사람들까지도, 이 성경 말씀을 무조건 순종해야 할 절대적 명령이며 완벽한 율법이라고 인정할 줄 모르고, 그 대신에 성경을 먼저 자신의 양심과 이성이라는 잣대에 대어 보면서 제멋대로 판단하고 불순종하며 파괴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여호와를 경외'할 줄 아는 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을 경외하게 만들어 주시는 자증'으로 받지 않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나름대로 체험하고 고백한 기록'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시작하니, 그 성경이 '다 정결하고 확실하고 의로운' 절대 규범으로 받아들여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처럼 말씀에 대한 경외의 준법정신부터가 되어 있지 않으니 그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순전히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고, 교회가 철두철미하게 성경중심으로만 세워져야 한다는 이 가장 기본상식조차 발휘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 안에서는 세상의 저질 정치판에서 나타나는 꼴들이 고스란히 연출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사극에 보면 왕이 내린 교서가 도달하게 될 때 신하는 그 교서를 받기 전에 먼저 그 교서 앞에 절부터 하는 장면이 흔히 나옵니다.
교서를 받는다는 그 자체가 신하에게는 바로 왕을 직접 대면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세로 왕의 교서를 받을 때에 그 어명에 복종하는 것은 그저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순서가 될 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받는 신자들의 자세는 더욱 그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을 읽고 들을 때마다 나 자신이 그 시간 그 자리에서 바로 살아 계신 참 유일신 하나님을 대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자세로써 그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100퍼센트 확실하고 의로우며 순결한 법을 조금이라도 의심하거나 감히 대항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믿고 순종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의 증거로부터 배우지 않고서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 영적 무지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성경의 교훈으로 깨우침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죄인의 길로 미끄러지고 악인의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이 가르쳐 주는 도(道)가 없이는 아무도 애당초 하나님을 알 수도 없었으며 찾을 줄도 몰랐습니다.
그러니 우리 기독신자들은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 귀하고 중하신 말씀일세'라고 찬송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구약 66권이라는 한 권의 책은 이 광대무한한 우주를 통하여 주어지는 자연계시조차 나타낼 수 없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실로 오묘하고도 완벽하게 우리에게 계시해 줍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순결한 법도는 '사람 가운데서 좀 더 나은 도덕군자나 성인'이 되게 해 주는 윤리나 철학이 아니라 '죄인이요 악인이요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던 사람을 '하나님의 완전한 양자요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의 자리에 이르도록 격상시켜 줍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세상의 그 어떤 현자가 쓴 양서(良書)라 할지라도 '사람으로 하여금 살아 계신 여호와를 경외하게 만드는 도'를 가르쳐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니 이 성경의 축복과 은혜를 맛보아 알게 된 성도는 절로 이 성경 말씀은 정금처럼 '아름답고 귀한 말씀'인 동시에 꿀처럼 '달고 오묘한 그 말씀'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이 성경을 통하여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반드시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을 정도로 소중한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없습니까?
혹 이 말씀이 '정금'인 줄은 알지만 그것의 '꿀'처럼 단맛은 마음껏 즐기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에게는 그 자체로 이미 '많은 정금'보다 더 귀중하고도 값진 것이지만, 그것은 그냥 금박을 입힌 성경책을 책장에 진열해 놓으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자기가 읽고 그 은혜의 맛을 즐길 줄 알아야 만이 그 진가를 발휘하며 그 축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실로 이 성경을 금 중에서도 순금처럼 최고로 값진 보배로 간직하고, 또한 그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순종하는 가운데 그 단맛을 송이꿀처럼 마음껏 풍성하게 맛보고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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