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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승리의 조건 (수 7: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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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조건 (수 7:1~13)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 모두가 가진 것입니다. 장차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 삶에 대해서는 이제 인생의 절반을 살았고 진로도 이미 정해졌고 적어도 이대로만 살아도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우리 자녀의 삶은 아직 정해진 것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불확실해 보입니다. 염려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운동시합에는 승패라는 것이 있습니다. 전쟁에도 승패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에도 과연 승패를 말할 수 있을까. 신앙생활에 승패를 말할 수 있을까. 만일 있다면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한 가지 사건인가 아니면 여러 가지 복합적인 것인가. 전투에는 져도 전쟁에만 이기면 된다고들 말하는데 우리 인생도 그런 식으로 전투와 전쟁이 있는 것인가. 무엇이 전투이고 무엇이 전쟁이라는 말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느 시점에서 알 수 있을까.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쯤 되면 성공적이고 승리의 삶을 살았는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인가. 아니면 그 이전에도 그것을 내다볼 수 있을까.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일 우리 인생의 승패를 세상 떠나는 시점에서 알 수 있다면 승리를 했다고 하더라도 즐길 시간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패배를 했다고 하더라도 괴로워할 시간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시각을 좀 더 멀리 잡아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카메라 렌즈로 창밖의 사물에 조준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나더라도 역사의 시계는 여전히 딸깍딸깍 소리를 내면서 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이후의 시점을 바라볼 수 있어야 됩니다. 적어도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 그러니까 예수님의 인생도 당신이 돌아가시는 시점에서는 판단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시점에서 예수님의 삶을 판단했다면 예수님과 같은 실패자는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일푼 인생이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자라면 인생을 살다보면 적어도 집 한 채는 마련해야 될 텐데 예수님은 당신의 머리를 둘 곳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머니가 지켜보시는 앞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기 부모 앞에서는 자랑스러운 모습, 뭔가 잘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 합니다. 자기가 고생하는 모습을 부모 앞에 보여주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더욱이 범죄자로 몰려서 공개처형 당하는 모습을 어머니 앞에 보여주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머니가 지켜보시는 앞에서 공개처형을 당하셨어요. 그것도 죄인으로 몰려서. 이 또한 예수님의 죽음의 시점에서 예수님의 삶을 판단할 수가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한때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추대하려고 할 때도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오병이어로 군중을 먹이실 때 남자만 오천 명이 모였다고 했으니까 수만 명이 예수님을 추종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엄청난 인기를 누릴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붙잡히실 때가 되니까 사람들은 떨어져 나가고 제자 중의 한 사람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실 때는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두둔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 편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모두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인기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종교개혁가 내지는 부흥사와 같은 모습으로 출발하셨지만 그렇다고 이스라엘의 종교지도가 바뀌었느냐? 당장 이스라엘이 회개했느냐? 현저한 변화가 일어났느냐?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기적을 가장 많이 경험한 데가볼리와 갈릴리 지역이 회개하지 않는 것을 예수님은 한탄하셨어요. 오히려 예수님이 비판하시던 부패한 종교 세력이 예수님을 이긴 것처럼 보였습니다. 불의가 승리하고 불의한 자들이 의로운 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승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승패의 판정은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시점에서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흘 후를 지목하셨습니다. three days, 사흘 후에 가서 보자는 것입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 그때가면 모든 것이 판명된다는 것입니다. 그때가 되기까지는 섣불리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할렐루야. 

그게 예수님의 부활이에요.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이 예수님의 손을 들어주신 사건이요, 예수님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신 사건이요, 예수님의 승리요, 예수님의 부활이 있었기 때문에 떨어져나갔던 모든 사람들이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고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족속과 모든 나라에 예수님에 대한 복음이 증거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뿐만이 아니고 마리아의 이름이나 제자들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추앙받는 이름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고려하지 않고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고 기독교신앙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에서 평생을 바친 선교사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나이가 많이 들어서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 배를 타고 오는데 같은 배에 아프리카에서 코끼리 사냥을 하던 테디 루즈벨트 대통령이 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배가 뉴욕 항에 도착할 때 많은 군중이 루즈벨트를 환영하기 위해서 나왔어요. 온 부두가 떠나갈 정도로.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평생을 바친 이 노부부를 환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쓸쓸한 나이 든 부부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선교사님이 하나님에게 한탄했습니다. ‘하나님, 저희는 아프리카에서 일평생 주님을 섬기고 이제 나이가 늙어서 돌아오는데 루즈벨트 대통령은 코끼리 사냥을 돌아오는데도 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환영하고 반가워합니다. 너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그때 마음속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 합니다. ‘아직 기다려라. 아직 끝나지 않았다. 천국에 올 때가 되면 바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대통령이 환영받을지 모르지만 천국에 들어갈 때 환영받는 사람은 다른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때는 대통령이든 장관이든 재벌이든 그 지위를 가지고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서는 질서와 순서가 바뀝니다. 예수님 말씀에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의 순서는 이 세상의 순서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자의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낮추는 자는 높임을 받으리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천국의 진리에요. 그러므로 진정한 판정은 천국에서 비로소 내려질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판정의 순간을 좀 더 늦춰서 잡아야 됩니다. 반 고흐 같은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에 자기 그림을 한 점도 팔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백만 불을 줘도 살 수 없어요. 그러니까 반 고흐의 인생과 실력은 그 당시에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얘기입니다. 김연아의 코치인 오서는 왕년에 올림픽 선수였지요. 올림픽에 출전했지만 금메달은 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커리어의 끝이 아니었어요.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본인은 금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김연아 코치가 되고 제자를 키워서 제자가 올림픽에 나가서 금메달을 따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사람은 속단하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의 실력이든 그 사람의 진실이든 그 사람의 믿음이든 그 사람의 수고의 결과든 그것을 속단하면 안됩니다. 

씨 뿌리는 비유든 누룩의 비유든 주님이 드신 천국의 비유는 모든 것이 작게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작게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히 작은 것이 아니에요. 일단 그것이 땅이 심기면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크게 자랄지는 사람이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러므로 살아있는 동안에 그것이 자라나는 것을 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죽은 다음에야 그것이 더 크게 자라납니다. 그건 우리가 정하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주님은 자라나는 것을 우리에게 책임지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순종하고 작은 것이라도 그것을 믿음으로 심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할렐루야. 그게 우리의 몫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했어요. 그러므로 세상에 심는 사람이 있고 물주는 사람이 있지만 자라나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자라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라나게 하실 줄을 믿어야 됩니다. 반대로 살아있는 동안에는 승리한 것 같았는데 죽고 나서 그 판정이 바뀌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스탈린은 살아있는 동안 나라의 여러 곳에 자기의 동상을 세우고 그리고 자기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지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 그런데 그가 죽고 나니까 사람들이 그 동상들을 무너뜨렸고 스탈린그라드의 이름을 볼고그라드로 바꾸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기 전에 사람의 심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기 전에 역사의 심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심판을 믿기가 어렵다면 사람의 심판하는 것을 봐야 됩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전조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처럼 진노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진노하실까.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미래에 대해서 염려하고 또 우리 인생에 대해서 염려합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이 도박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사업도 도박이고 사랑도 도박이고 신앙도 도박이 아닐까. 그러나 그건 틀린 생각입니다. 그건 믿음으로 하는 생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이기게 돼 있습니다. 할렐루야. 

승리는 정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승리할 것이고 교회가 승리할 것이고 믿음이 승리한 것입니다. 승리는 정해진 것입니다. 승리는 정해졌지만 그럼에도 경주는 해야 됩니다. 우리 인생은 결과가 정해진 경주와도 같습니다. 결과는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경주를 멈출 수는 없습니다. 결과를 믿지만 그럼에도 지금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승리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자는 우리 자신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여호수아 7장에서는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여리고 성은 아주 견고하고 막강한 성이었지만 칠일 만에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완벽한 승리였습니다. 그리고 8장에 아이성 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아이성은 여리고 성에 비해서 규모도 작고 숫자도 작습니다. 아주 쉬운 상대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이 졌어요. 그 이유가 무엇이냐. 아이성이 강해서 그렇습니까. 아이성이 잘 싸워서 그렇습니까. 아니에요. 이스라엘 내부에 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내부에 타락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원래 여리고 성에 속한 것은 하나님에게 드린 것이었기 때문에 여리고 성에 있는 노획물을 취하면 안되었는데 아간이라는 사람이 몰래 물건을 취해서 숨겨놨어요. 하나님이 그것에 대해서 진노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돕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하나님 말씀하시기를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발견하는 놀라운 진리는 상대방의 규모가 크고 숫자가 많다고 해서 지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의 규모가 작고 숫자가 적다고 해서 이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크든 작든 그들이 강하든 약하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이기는 것이고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면 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실 수 있느냐? 믿음대로 순종하고 겸손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면 됩니다. 이것은 양방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려면 우리도 그분과 함께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바란다면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하면 됩니다. 아주 단순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걸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결국 승리는 정해진 것인데 그 승리를 막을 수 있는 자는 내 자신입니다. 내가 원인입니다. 나에게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적에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한 말 그대로입니다. ‘그의 신장을 보지 말지어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한 말이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에게 간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오늘 하나님이 너를 나에게 넘겨주어 구원이 하나님께 있는 것을 알게 하리라’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칼과 신장과 무기를 보지 말라고 했습니다. 거기에 승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수를 우리에게 넘겨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원수를 이기고 승리할 것입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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