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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각의 진보를 가져오는 질문 (마 22:3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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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진보를 가져오는 질문 (마 22:34~40)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사단이 기독교인들을 전멸시키려고 작전을 개시하고 부하들에게 보고를 받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부하가 말하기를 ‘저는 예수쟁이들을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감옥에서도 찬송을 부릅니다.’ 두 번째 부하가 보고하기를 ‘저는 예수쟁이들이 죽임을 당하게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를 위해 순교한다고 기뻐합니다.’ 세 번째 보고는 ‘저는 예수쟁이들을 직장에서 쫓겨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기도를 많이 하고 더 강건해집니다.’ 마지막 부하가 말하기를 ‘저는 예수쟁이들에게 십년동안 모든 일이 잘 되고 평안하게 해 주었더니 타락합니다.’ 정말 기독교 신앙의 생명력의 비밀을 보여주는 예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화가 놓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 예화는 외부로부터의 물리적인 핍박만을 생각했습니다. 감옥 ․ 죽음 ․ 환란. 그렇지만 심리적이고 철학적인 핍박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대의 핍박은 물리적이지 않습니다. 심리적이고 사상적이고 철학적입니다. 예수 믿는 학생이 대학에 진학하면 누가 교회를 못 가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가는 학생들에게 감점을 주거나 감옥에 가둬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핍박은 수업시간에 오고 교수님의 강의 속에 들어 있을 수 있고 읽는 책속에 들어 있고 젊은이들의 문화 속에 있고 젊은이들이 겪는 유혹 속에 기독교 신앙을 저항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면 믿음을 잃어버리거나 신앙을 버리는 결과를 낳습니다. 차라리 물리적인 핍박은 저항정신이라도 키워주지만 내면적이고 철학적인 유혹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신앙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스스로 확신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험과 도전은 학생들에게만 오는 것이 아니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어디를 가든지 겪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 보세요. 거기에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보세요. 즉시 저항과 도전이 무엇인가를 접하게 되실 것입니다. 일가친척이 모인 자리에서 제사에 대해서 말씀해보시면 금방 그러한 저항을 접하게 되실 것입니다. 차라리 목사인 저는 그런 핍박이나 시련을 겪을 가능성이 적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라는 여세 속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만나는 사람도 교인이고 대화하는 사람도 교인입니다. 

그러나 직장생활을 하고 학교에 다니고 사회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는 여러분이 더 신앙에 대한 도전과 핍박을 받을 확률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훈련을 받는다면 여러분이 받으셔야 됩니다. 저는 코치이고 여러분이 선수입니다. 저는 히딩크이고 여러분은 국가대표 선수들입니다. 저는 어셔이고 여러분이 김연아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또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신 것처럼.

아마 여러분 중에는 제자훈련은 모름지기 스승과 제자가 특별히 만나서 특별한 교재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냐, 이런 식으로 물으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저의 신앙적인 스승으로 여기는 분들 중에는 한 번도 개인적으로 만나본 적이 없는 분들도 많고 당연히 대화를 해본 적도 없고 심지어 돌아가신 후에야 알게 된 경우도 있습니다. 

예컨대 빌리 그레함 목사님은 제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데 굉장히 큰 역할을 했지만 저는 그분을 한 번도 개인적으로 만나본 적이 없고 오직 TV설교와 책을 통해서 접했습니다. 또 존 윈버 목사님 같은 분도 제가 스승으로 여기는 분이지만 저는 그분과 한 번도 개인적으로 만나본 적도 없고 오로지 그분의 교회 예배를 여러 번 참석해 보고 설교테이프를 많이 듣고 그분의 책을 탐독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제자훈련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제자훈련은 반드시 일대일의 독대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예배)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여러분이 최대화하시면 됩니다. 만일 이런 예배를 통해서 여러분이 배움을 얻지 못하신다면 개인적으로 만난다고 해도 배움을 얻을 가능성은 적고 이런 만남을 통해서 이미 배움을 얻으신다면 추가로 개인적인 대화가 도움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공적인 예배에서 조는 분은 개인적으로 만나도 별로 효과가 없습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고급 잔디는 발로 밟으면 죽지만 들풀은 밟아도 잘 자랍니다. 들풀은 누가 물을 주고 키워주지 않아도 사방에 넘칩니다. 우리의 신앙에는 이런 들풀과 같은 생명력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외부에서 물리적인 핍박이 오든 내면적으로 사상적이고 철학적인 저항이 오든 그것을 만났을 때 우리의 신앙이 수그러드는 것이 아니고 더 고개를 들고 더 크게 자라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이와 같은 사상적이고 철학적인 부분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19세기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제 기독교는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시고 인간을 만드셨다고 말했는데 찰스 다윈이 생명이 진화의 결과라는 사실을 밝혔으니 이제 성경은 외면당할 것이고 사람들은 신앙을 떠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았어요. 아직도 창조설을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창조설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오히려 더 지혜롭게 더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믿는 것은 반지성적인 것이 아니고 성경은 우리가 만만히 볼 대상이 아니고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은 진리가 성경에 담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와를 아담의 갈비뼈로 만드셨다는 구절, 오랫동안 사람들은 그 구절을 비웃었습니다. ‘무슨 동화 같은 이야기냐.’ 아니면 ‘아닙니다. 그건 비유적인 언급일 뿐입니다.’라고 변명하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생명복제술이라는 것이 개발돼서 사람의 뼈도 필요 없어요. 세포만 있으면 됩니다. 이론적으로 사람의 세포만 있으면 그것으로 또 다른 생명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갖게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화 쥬라기 공원을 보면 수억 년 전에 호박 속에 갇힌 공룡의 화석을 가지고 그것으로 공룡을 복제해서 탄생시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셨다는 얘기는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다만 과학이 발달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을 납득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동정녀 마리아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구절도 오랫동안 사람들이 비웃었지요. ‘그건 마리아의 스캔들을 미화하려는 것이다.’ 심지어 나치주의자들은 ‘마리아가 당시에 이스라엘에 주둔한 로마병정에 의해서 임신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아리안 족이다.’ 이런 식으로 주장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현대과학은 암컷이 수컷이 도움이 없이 스스로 임신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이미 쥐를 통해서 증명이 됐습니다. 어미 쥐가 수컷 없이 임신해서 새끼를 낳는데 성공했습니다. 장차 여성이 남성의 도움 없이도 아기를 갖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이쯤 되면 우리가 성경을 믿지 못했던 이유는 성경이 무식해서가 아니고 우리가 무식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십구 세기 말 시그만 프로이드가 정신분석학 이론을 발표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는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프로이드는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심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죄 사함이라든가 구원을 인간이 필요로 하는 이유는 인간속의 죄의식 때문이고 인간은 원래 원초적인 욕망에 이끌려 사는 존재인데 문명 ․ 사회 ․ 질서 이런 것이 인간의 욕망을 금지하고 억제하는 결과를 낳았고 그 핵심에 종교가 있었다.’ 들어보면 그럴듯하지요. 기존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혹하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프로이드의 이론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고 이천년 전에 이미 성경 속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현대 심리학이 발달하기 전에 사도바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안에서 육신과 성령이 싸운다. 육체의 소욕이 있고 성령의 소욕이 있다. 내가 원하는 선을 하지 못하고 내가 원치 않는 악을 행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프로이드의 이론은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 죄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어필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이 내 모습 이대로 사랑하시고 내가 거룩하기 위하여 내 노력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나를 의롭다 하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프로이드의 이론은 철이 지나간 옷과 같은 것입니다. 새삼스럽게 그런 주장을 하고 있느냐. 무슨 잠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프로이드의 이론이 청교도적인 신앙에 대한 비판이 될 수는 있지만 기독교 진리를 반박할 수는 없고 오히려 인간됨에 참모습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교훈을 배우기 위해서 질문을 한 게 아니고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질문했다고 했습니다. 35절에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이 율법사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 예수가 이 질문에 대답을 못할 것이다. 아니면 섣부른 대답을 시도할 것이다. 그러면 내가 예수를 꼼짝 못하게 그의 모순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질문했는데 웬걸, 예수님의 입에서 천하의 명답이 나왔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이 귀한 말씀이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나온 것이 아니고 시험하고자 하는 바리새인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나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그 율법사가 그 시험을 한 것이 다행이에요. 왜냐하면 그러지 않았으면 이 귀중한 말씀을 우리가 듣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의 아주 중요한 속성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사람들의 도전 ․ 공격을 받으면 수그러들거나 위축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더 깊은 진술을 드러낸다는 사실입니다. 할렐루야. 

사람들의 도전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립니다. 그것은 진리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독재국가에서는 말의 자유를 제한하지요. 비판을 금지합니다. 권위주의적인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신앙을 비판하는 말을 금지하고 그것을 죄악시합니다. 지금의 이슬람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그건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비판이 두려운 것이고 열린 사고가 두려운 것입니다. 기독교가 과거에 권위적일 때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갈릴레이에게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가르치지 말라고 명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갈릴레이가 나오면서 뭐라고 말했어요. 그래도 지구는 돈다,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 당시 사람들이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Come, let us reason together’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고 환영합니다. 토론을 환영합니다. 기독교 국가에서 과학이 발달하고 교육이 발달하고 문명이 발달하고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인권이 발달하고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고 생각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하고 거기에서 사람이 지혜를 얻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부끄러워하면 안됩니다. 진리를 도전하는 질문을 두려워해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대화를 환영하고 토론하기를 원하고 얼마든지 물어봐도 됩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결코 궁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믿는 바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내 믿음이 감정 위에 선다든가 억지 위에 서 있어서는 안됩니다. 내 믿음이 반석 위에 서 있어야 됩니다. 내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 위에 서 있어야 됩니다. 내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과 또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세워져야 됩니다. 그리고 사람이 여러 환란이나 핍박을 통해서 신앙이 강건해지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부딪히는 반대와 핍박과 비판과 질문을 통해서 내가 믿는 바가 더 강건해지고 내가 믿는 이유에 대해서 더 분명히 알게 되고 내가 믿는 바를 더 강하게 확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그것이 필요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십일 세기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이것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열린 사회요 열린 사고를 필요로 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보전하기 위하여 남과 대화도 하지 않고 남의 말도 듣지 않고 남의 비판도 수용하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우리가 수많은 사람을 접하고 많은 사람과 대화하고 그들의 생각과 의견을 접할 때에는 내가 믿는바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보여줘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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