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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이 보이느냐? (막 8: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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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보이느냐? (막 8:22~26)

  
지난 화요일에는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목사가 화요일에 왜 바쁜가? 여러분들은 별로 관심이 없겠지만... 지난 1년 동안 매주 화요일에는 아침 저녁으로 제자 성경공부를 하였습니다. 그 과정이 지난 주일을 끝으로 마무리를 한 것입니다. 작년 3월 말에 시작해서 33주 동안을 겨울방학도 없이 한 번 모이면 2시간 30분에서 세 시간씩 공부하는 일은 참여한 분들이나 제게는 쉽지 않은 여정이었습니다. 다행히 그 과정이 다 끝나고 다음 주일이면 공부를 마친 분들을 축하하고 격려하는 수료식이 간략하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지난 화요일에는 우리 지방의 목사님들의 회의가 있었는데, 일산의 한 음식점으로 초대를 받아서 참여하였습니다. 식사를 마치고나서는 주변에 있는 호수공원을 산책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는 일산에 몇 번 가보았으면서도 호수공원을 가볼 기회가 없었는데, 참 잘 꾸며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여러 목사님들과 산책도 하고 지난 시간 동안 잘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도 나누며 즐거운 하루를 보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는데... 목사라고 해도 다 같은 목사가 아닙니다. 서열이 엄격하거든요. 앉는 자리가 거의 정해져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저 스스로를 젊다고 생각하는데... 감리사도 지나고 해서 어른들이 앉는 자리로 보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자리가 불편해서 얼른 식사를 마치고는 차를 마시며 슬그머니 젊은 목사들이 앉는 자리를 찾아갔습니다. 

마침 맨 끝자리에 제가 졸업한 감리교신학대학의 후배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 있어서 이런 저런 말을 붙여가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한 후배에게 학번을 물어 보았더니 87학번이라는 것입니다. 괜히 물어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한 5년쯤 후배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저하고 무려 십년의 차이가 나는 겁니다. 이번에는 맞은편에 앉은 후배에게도 학번을 물어보았는데.. 그 친구는 97학번이라는 겁니다. 제가 77학번이니까 저보다 무려 20년이나 후배인 셈이지요. 

깜짝 놀랐습니다. 나보다 20년이나 후배가 벌써 목사가 되다니... 이제 몇 년 만 지나면 아들 뻘 되는 목사들하고 함께 목회를 해야 할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 저는 후배들의 학번을 물어보는 것 같은 어리석은 짓을 결코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면서 한 번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래도 내가 97학번 후배 보다 목회를 한 20년쯤 더한 셈이 되는데... 나는 과연 그 친구보다 20년을 앞서 있을까? 지난 20년 동안의 자신의 사역에 대하여 나는 후배들에게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창세기를 장식하는 위대한 신앙의 열조 중의 한 사람인 야곱은 아들 요셉덕택에 기근을 피해서 애굽에 정착을 하게 되면서... 애굽 왕 바로를 만날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나이를 묻는 바로 앞에서 이렇게 자신의 삶의 여정을 소개합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47:9) 

우리는 야곱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작은 아들로 태어나서 장자의 축복을 차지하기 위해서 그가 한 일들... 이 삭막하고 거칠기 그지없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고 애를 썼던 일들... 생각해보면 그러한 와중에서 야곱은 그래도 자기가 바라는 것들은 다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집념과 행운이 겹친 사나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죽은 줄로 알았던 아들이 이토록 높고 영향력 있는 자리에 앉아 있으니... 이제 그는 살만 큼 살았고... 남부러울 것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은 자기 조상들에 비하면 덧없이 짧은 인생을 살았으며 그나마 그 시간도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나그네로 보낸... 내놓을 것이 없는 험악한 시간들이었다고 애굽의 바로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고...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많은 것을 이루었던 야곱이 이렇게 밖에는 자신의 삶을 회고할 수 없다면... 우리들은 참으로 착잡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당신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았느냐?’고 묻는 다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 할 수가 있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의 삶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자기 자신도 십자가를 지겠지만... 누구든지 자신을 따라오는 사람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그 자리에서 거절하였지만... 이유가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부인해야만 질 수 있는 십자가... 결국은 그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만이 삶을 후회 없이 살았노라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았노라고 그렇게 고백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의 시간을 보내면서 한 번 그런 생각을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십자가와 얼마만큼의 거리에 있나? 과연 나는 지금 주님이 기대하는 것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있으며... 그 자리를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십자가로 채우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벳세다를 지나시다가 소경 한 사람을 고쳐 주셔서 밝히 보게 하신 이야기를 함께 읽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에 행하셨던 많은 기적들 중에 하나가 소경의 눈을 밝게 보게 하는 일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이것은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가 말씀하셨던 것처럼 눈먼 자가 다시 보게 되는 것이 ‘주의 은혜의 해’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증거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눅4:18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우리는 예수가 소경의 눈을 보게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에 임하고 있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소경을 다시 보게 하는 이야기를 읽다가 보면 도대체 소경이란 누구를 말하는 가를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요한복음 9장에 나타난 날 때부터 소경으로 세상에 태어난 사람을 예수가 고치시는 이야기인데... 이야기의 마지막에 가면 예수가 정말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은 보지 못하면서도 무엇인가 보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는 눈이 멀어서 볼 수 없다는 것이 단지 육체의 눈멀음을 말하는 것만이 아닌 것을 암시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면에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영적인 보지 못함의 상태에서 서서히 눈을 떠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밝고 건강한 눈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것은 우리의 전 존재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인 것을 예수는 누가복음에서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눅11:34) 만일 그 사람의 눈이 밝고 건강하다면... 다시 말하자면 그 사람이 모든 세상과 사물을 밝고 건강하게 볼 수 있다면... 그는 세상을 밝고 건강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눈이 어둡다면... 자신과 세상을 밝게 보지 못하고 어둡게만 본다면... 그만큼 그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은 어두울 수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눈이 어둡다는 것은 단지 육신의 눈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을 볼 수 없는 사람들 중에서도 인생을 우리들 보다 훨씬 더 밝고 건강하게 사는 사람들이 주변에는 있지 않습니까? 헬렌 켈러 같은 분은 삼중고에 시달리면서도 참으로 삶을 아름답고 가치 있게 살았습니다. 그런가하면 미국에서 활동 중인 교육학자 강영우박사 같은 분도 소년 시절에 시력을 잃고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성한 눈을 가진 우리가 부끄러울 정도로 밝고 건강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예수는 세상에 오시며 눈이 어두워서 볼 수 없는 사람들의 눈을 밝히 보게 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그것은 다시 말하면 어두웠던 우리들의 눈이 밝아지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를 통해서 새로운 눈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씀이지요. 인생을 어둡게만 바라보던 우리들의 생각이 바뀌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한다면 우리는 오늘 예수가 벳새다에서 한 소경을 눈을 밝게 해주는 일이 단지 그에게만 국한 된 일이 아니라 오늘 우리와도 관계된 일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과연 이 사람은 어떻게 해서 눈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소경 한 사람을 예수에게 데리고 나와서 고쳐주시기를 간구하면서 시작됩니다. 그는 앞을 볼 수가 없는 형편이기에 다른 사람들이 그를 붙잡고 다니지 않으면 한 걸음도 떼어 놓을 수가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예수에게 데리고 와서 손을 대어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사람들에게서 그를 떼어 놓더니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먼저 생각해볼 대목입니다. 그가 예수에게 올 때는 앞을 볼 수 없어서 사람들의 손에 이끌리어 왔지만... 예수는 그를 데리고 사람들이 없는 마을 밖으로 나가셨다는 것이지요. 
   
예수가 소경을 데리고 마을 밖으로 나가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아마 예수는 그를 고치는 일에 다른 사람들의 방해를 받고 싶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가 오로지 예수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에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예수에게 모든 마음을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간 것은 아닐까요? 주님은 오직 소경과 자신 밖에는 없는 곳에서 그를 치료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바로 여기에 우리가 추구해야할 가장 소중한 신앙의 모습이 있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우리들이 이 자리에 모인 목적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는 이 사람이 사람들의 손에 이끌리어서 예수 앞에 나온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그를 데리고 마을 밖으로... 오직 예수와 이 사람... 그 둘 밖에는 없는 곳으로 그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치유의 행위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아침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와 고민이 있든지... 그것을 치유할 능력을 가진 분은 오로지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이 예수에게 좀 더 집중하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들도 처음 교회를 나올 때에는 누군가의 손에 붙들려서 이곳 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내가 누군가의 손길에 이끌려서 간다는 것은 나를 안심하게 만드는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우리들에게 때로는 그 손까지도 놓아버리고 예수께 집중하기를 자신의 전 존재를 예수에게 내어 맡기기를 원하신 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불교적인 가르침 중에서 그런 교훈이 있는 것을 들었습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아서는 그 사람은 달을 볼 수가 없습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아야만 달을 볼 수가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든지 교회에 나오게 된 것은 궁극적으로는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믿음의 주가 되시고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분인 예수’(히브리서12:2)를 바라보는 데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때로 이제껏 나를 붙잡아 주던 친구나 가족들이나 형제의 손을 놓아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예수의 손에 붙잡힐 수가 있게 되고 오로지 나와 예수만이 있는 마을 밖으로 나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와 관계된 모든 것을 끊어 버리고 오로지 예수만을 바라보는 것... 이것이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경험하게 되는 출발점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이번 사순절의 기간이 사람들과의 관계를 잠시 놓고 나를 이끄시는 예수님의 손길에 붙잡히는 그래서 주님과 함께 마을 밖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신앙의 여정에서 이제껏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가 그를 데리고 마을 밖으로 나가셔서 한 일은 무엇인가요? 
23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먼저 예수는 그의 손을 붙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눈에 침을 뱉으셨고 손을 대어서 그 눈을 만져주셨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예수의 행동을 통해서 느껴지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의 손을 붙잡아 주시고...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아마 이 대목에서 기겁을 하실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사람의 눈에 침을 뱉을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침이라는 것은 당시의 사회에서는 치유의 수단이기도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도 소경을 치유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거기서는 침을 땅에 뱉아서 진흙을 이겨서 그의 눈에 발라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그의 눈에 안수하여 주셨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그의 눈을 어루만져 주시는 행위인 것이지요. 
   
이렇게 예수가 그의 눈을 치유하시는 과정을 살펴보면서 느끼는 것은 예수가 이 한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정성과 사랑을 쏟아 붓고 있나... 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는 얼마든지... 단지 말로만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려가셨습니다. 침을 그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따스한 손길로 그의 눈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비록 그가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이지만... 예수가 이 사람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시는지... 예수가 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이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정성과 사랑을 쏟고 있는지... 여러분 이것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결국 예수는 사랑이라는 묘약으로 이 사람의 눈을 밝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내가 만일 그 소경이었다면 어떠한 기분이 들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누구도 이렇게 나를 따스하게 대해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나를 소경이라고 구박하고 멸시하기만 하였는데... 예수는 나의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아마 그 순간의 감동을 그는 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내 손을 잡아 주는 사람이 있다니... 그 분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나사렛 예수라니... 그는 참으로 깊은 감동에 휩싸였습니다. 게다가 예수는 직접 침을 뱉아 눈에 바르시고는 그 손으로 어루만져 주기까지 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닿은 예수의 손길을 통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주님이 그에게 보여주시는 깊고 깊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때 마치 세상에 나 하나밖에는 없는 것처럼... 그렇게 나를 사랑하신다.’고 어거스틴은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 키가 싱겁게 큰 가수 하나가 나와서 ‘오직 하나뿐인 그대...’라는 노래를 부른 적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이 이 노래를 부르시면서 우리를 사랑해 주신다는 것이지요. ‘세상에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아도 나에게는 오로지 너 뿐이란다...’ 그날 예수님의 손길에 이끌려서 마을 밖으로 나갔던 그 사람은 바로 그러한 사랑을 경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때로 우리가 모든 사람들의 손을 놓고 예수님의 손길에 이끌려서 마을 밖으로 나가야 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 마치 세상에는 오로지 나 하나뿐인 것처럼 그렇게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비로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정말 모든 정성을 다해서 그를 고쳐주시던 예수가 그에게 묻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그는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캄캄하던 그에게 비로소 빛이 비치고 눈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아직은 완전하지는 않았습니다. 희미하게 보이기는 하는데 나무처럼 보이기도 하고 걸어가는 것을 보면 그것이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자 예수는 다시 그의 눈에 안수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비로소 그의 열려서 모든 것을 밝게 보게 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은 참으로 특이한 부분입니다. 단 번에 그의 눈이 밝아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 예수님이 사람들을 치유하실 적이 이런 적은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38년 동안을 병으로 앓던 사람도 단번에 고쳐주셨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도 단번에 살리신 예수님인데... 오늘은 어쩐지... 좀 이상합니다. 정성을 다해서 그를 어루만져주시고 안수해주셨는데... 그리고 나서 무엇이 보이는가? 이렇게 물었더니 희미하게 보인다고 하니... 어째... 좀 예수님답지 못한 모습이 아닌가? 우리는 그렇게도 생각을 할 수가 있겠습니다. 어쟀든 예수는 이 소경을 단번에 고쳐 주시지를 않고 한번 안수를 하여서 희미하게 보이게 한 후에 다시 안수하셔서 비로소 모든 것을 밝히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 수가 있을까요? 단지 예수의 능력이 그 당시에 좀 모자라서 그런 것이다... 이렇게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무엇인가 생각하게 하시려는 어떤 주님의 의도가 있지 않을까요? 왜 주님은 이 사람을 단번에 고쳐 주시지를 않고 단계적으로 처음에는 희미하게 보이게 하시고는 후에 밝히 보게 하셨을까요? 신앙적인 깨달음이나 눈을 뜨는 일이 어떤 경우에는 단번에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서서히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대목입니다. 
  
아마 제자들이 그랬을 것입니다. 이 소경이 눈을 뜨는 이야기 뒤에는 베드로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고백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들이 이렇게 예수를 제대로 볼 수 있을 때까지... 거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고 그들은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예수가 누군지를 알고 주님의 뒤를 따라오기 시작한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때로는 오해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릇된 생각이나 행동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제대로 볼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들의 신앙의 여정이라는 것도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때에 우리들은 굉장히 은혜를 많이 받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깊고 심오한 신앙의 진리를 터득한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어떤 시련이나 어려움이 찾아오게 되면 그러한 신앙적인 확신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되고... 

우리는 또다시 혼돈과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 때에는 우리는 믿음이 아주 없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단번에 어떤 진리나 깨달음에 이르게 되고 도를 터득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무엇인가 보이는 것 같다가도 희미해지고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다가도 무엇인가가 다가오기도 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우리들은 모든 것을 제대로 보게 되고... 참된 깨달음이나 진리에 이를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당장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 지지 않는다고 하여도 꾸준히 참고 기다려야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결국 이 소경은 완전히 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25절) 이렇게 소경의 달라진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이전에는 그는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눈이 어두우니 그의 인생은 누가복음에서 주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완전한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모든 것을 밝히 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눈이 밝으니 그의 인생은 온통 빛으로 충만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일으키시는 놀라운 삶의 변화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어둡고 절망스럽다가도 주님이 오시면 모든 것이 밝아지고 희망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주님은 빛 그 자체이십니다. 주님이 계시면 우리의 눈은 밝아지고 세상의 모든 것을 밝고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빛이라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절망하거니 실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의 빛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생명을 환하게 비추어 주기 때문입니다.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믿는 여러분 모두에게 이 시간 주님이 주시는 빛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이 만일 우리에게 물으신다면... ‘무엇이 보이느냐?’ 이렇게 물으신다면... ‘제 눈에는 주님이 보입니다. 제 곁에 계신 주님을 저는 바라봅니다. 주님이 계시기에 저는 항상 행복하며... 건강하고... 풍성하며... 항상 희망이 있습니다.’ 이렇게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진정한 빛이신 예수를 항상 옆에 모시며 살도록... 주님이 빛을 비추어 주시기를 마냥 기다릴 것이 아니라 그 빛을 향하여 나아가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안도현이란 시인... 봄에 대하여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제비떼가 날아오면 봄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사람은
봄은 남쪽나라에서 온다고
철없이 노래 부르는 사람은
때가 되면 봄은 저절로 온다고
창가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이 들판에 나오너라

여기 사는 흙 묻은 손들을 보아라
영차 어기영차
끝끝내 놓치지 않고 움켜쥔
일하는 손들이 끌어당기는
봄을 보아라 

봄을 막연히 기다릴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끌어 당겨야 한다고... 그가 말하는 것처럼... 주님이 내게 오시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그분을 향하여 나아가는..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빛을 통해서 모든 것을 밝게 바라보는 소중한 은총의 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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