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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연약함의 의미 (고후 12: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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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약함의 의미 (고후 12:7~10)

  
한 늙은 인디언 추장이 자기 손자에게 자신의 내면에 일어나고 있는 ‘큰 싸움’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이 싸움은 또한 나이 어린 손자의 마음속에도 일어나고 있다고 했습니다. 추장은 궁금해 하는 손자에게 설명했습니다. ‘얘야, 우리 모두의 속에서 이 싸움이 일어나고 있단다. 두 늑대간의 싸움이란다.’ ‘한 마리는 악한 늑대로서 그 놈이 가진 것은 화, 질투, 슬픔, 후회, 탐욕, 거만, 자기 동정, 죄의식, 회한, 열등감, 거짓, 자만심, 우월감, 그리고 이기심이란다.’ ‘다른 한 마리는 좋은 늑대인데 그가 가진 것들은 기쁨, 평안, 사랑, 소망, 인내심, 평온함, 겸손, 친절, 동정심, 아량, 진실, 그리고 믿음이란다.’ 손자가 추장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추장은 간단하게 답하였습니다. ‘내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기지.’
  
오늘 내가 먹이를 열심히 주고 있는 마음속의 늑대는 어떤 것인가요? 우리의 마음이 원래부터 그렇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화, 질투, 탐심, 열등감, 거짓, 이기심...’ 이런 늑대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가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은 우리들이 사는 방식과는 정 반대의 삶을 선택하셨다는 뜻이 있는 것이라면... 그래서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지를 않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자기를 버리고 희생하려는 삶을 선택하신 결과가 십자가를 통해서 드러난 것이라면... 얼마 남지 않은 사순절 기간 동안 만이라도 우리들도 한 번 예수님처럼 살아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열심히 먹이를 주던 늑대는 그만 돌아보고 우리가 잘 돌보지 못하던 늑대... ‘기쁨, 평안, 사랑, 동정심, 겸손, 친절, 믿음’과 같은 아름답고 고상한 덕목을 추구하며 살도록 노력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세상이 그렇게 많이 바뀌지 않더라도... 경제가 썩 좋아지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이렇게 달라진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많은 새로운 좋은 것들을 경험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제 불과 두 주일 밖에는 남아 있지 않은 시간인데... 마음을 새롭게 하여서 십자가의 주님이 초대하시는 새로운 삶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보낸 편지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른바 ‘바보 연설’로 얼려진 고린도 후서 11:22-12:10까지의 말씀 가운데서 그 절정을 이루는 대목을 함께 읽었습니다. 여러분 흥미롭지 않으십니까? 왜 이 대목을 가리켜서 바울의 ‘바보연설’이라고 하는 것인지... 거기에는 말로서 간단히 설명하기 쉽지 않은 고린도교회와 바울 사이의 갈등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두 번째 전도여행의 막바지에 도착해서 세운 교회입니다. 바울은 그 곳에 약 1년 반에서 2년 동안을 머무르면서 어엿한 교회를 세워 놓았습니다. 
   
문제는 바울이 고린도를 떠나면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기대했던 모양으로 나아가지를 못했습니다. 우리가 고린도 전서를 보면 알 수 있듯, 교회가 네 파로 갈려져 있다든지... 여러 가지 문제가 교회 안에서 발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 에베소에 머물고 있던 바울은 편지를 통해서도 사람들을 바르게 가르치려 하였지만, 자신이 직접 고린도에 가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는 나타나 있지를 않는 여정입니다. 바로 여기서 더 큰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고린도의 어떤 교인 중에서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도 않고 심하게 대드는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할 수 없이 바울은 마음의 상처만을 안고 다시 에베소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도 마음이 편치를 않아서 디도를 고린도에 보내기도 하고 자신이 자신의 심경을 담아서 쓴... 이른바 ‘눈물로 쓴 편지’를 그들에게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바울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서 자기의 사도직을 잘 인정하지 않으려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주님의 사도임을 고백하고 드러내는 편지를 보내게 되었던 것이지요. 
   
특별히 바보연설로 알려진 11장의 중간 부분부터 오늘의 말씀 가운데서 바울은 단호하게 자신을 사도라고 말할 수 있는 증거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그가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감당해야만 했던 수많은 어려웠던 삶의 여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11장 22절부터 29절 사이에 등장합니다. 

우리는 그의 삶의 여정을 돌아보면서 그가 얼마나 많은 고생과 어려움을 겪었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되고 지금 내가 주님의 일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니라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로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바울는 12장의 서두에서 그가 체험했던 삼층천의 신비한 경험도 이야기 합니다. 하늘 위의 하늘... 낙원이라고 알려진 신비한 세계를 그는 체험하였다는 것이지요.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바울처럼 온갖 위험을 마다하고 주님을 위해서 일한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요? 거기에다가 낙원이 있다고 믿어지는 삼층천의 세계... 가장 높고 높은 하늘의 하늘을 보았다면... 누가 감히 바울 앞에서 ‘당신이 진짜 사도냐?’라고 따질 수 가 있을까요? 

그런데 바울이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이지요. 그는 자기에게 육신의 가시가 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질병을 앓고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바울이 무슨 병을 앓고 있었을까?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심한 눈병이라고 하기도 하고 두통, 심지어는 정신적인 질환이었을 거라고 집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를 직접 겪었던 고린도 교인들 중에서 알 만한 사람도 있었겠지요. 어쨌든 바울은 구지 말하지 않아도 좋을 문제... 자기의 몸에 가시가 박혀 있다는 것... 질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주님의 진정한 사도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설득시키는 일에는 좀 합당하지 않은 부분인데도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요.
   
게다가 더 부끄러운 고백도 서슴없이 합니다. 그것은 자기가 이러한 육신의 가시를 제하여 달라고... 나를 괴롭히는 육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였지만... 본문에서 바울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다.’고 했는데... 이것은 간절히 주님께 기도했다는 뜻이 담겨 있는 대목입니다. 문제는 그의 간구를 주님이 들어주지 않으셨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과연 자랑거리가 될 수 있을까요? 만약 그가 주님이 꼭 필요로 하시고 인정하는 사도라면... 적어도 이 정도의 기도는 주님께서 들어 주셔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내가 이렇게 아파서 주님께 기도하였더니... 주님이 당장 그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이래야 아멘 할렐루야... 이러한 반응이 나오는 것이지... ‘내가 기도했는데... 주님은 들어 주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 그러면서 자신을 사도라고... 자기를 믿어달라고 말하고 있으니... 누가 그를 사도로 인정할 수가 있을까요? 어쩌면 그래서 이 대목을 우리는 ‘바보연설’이라고 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을 사도로 인정하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바로 여기에 바울이 정말 우리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우리들에게는 마치 가시처럼 우리들을 괴롭히는 일들이 없습니까? 그것이 바울처럼 육신적인 고통이든지... 인간의 관계 속에서 비롯된 문제라든지... 사업이나 경제적인 문제라든지... 아마 우리들 중의 대부분에게는 바울처럼 선뜻 고백하기는 쉽지 않을지 몰라도 여러 가지 우리를 찌르는 가시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오랫동안 진지하게 그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처럼 주님께 간절하게 기도하는 일도 빼놓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직면한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지금 우리들을 날카롭게 찔러오는 여러 가지 문제들과의 싸움에서 이런 어려움들을 잘 극복하고 승리한 사람들인가요? 아니면 날마다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인가요? 
   
바울은 이렇게 자기를 괴롭히는 육신의 가시를 가리켜서 ‘사단의 사자’라고까지 표현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도 바울답지 않은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바울 같은 사람에게도 사단이 자리 잡고 있구나... 그의 전체는 아니겠지만... 그의 몸과 마음의 한 구석은 여전히 사단의 지배아래 놓여 있구나... ’그렇게도 생각을 할 수가 있겠지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얼마나 바울에게 커다란 고통이라면 그것을 가시라고 표현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사단의 사자라고까지 말하고 있는 것일까... 날카로운 가시가 내 몸에 박혀있다고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 때문에 겪는 고통들... 그것이 그를 얼마나 아프게 하였을까요? 그리고 그 가시를 제해달라고 기도하였지만... 들어주지 아니하시는 주님... 이것 자체가 그에게는 커다란 시험일 수밖에는 없는 것이지요. 그 때마다 그의 내면에서는 실망과 원망의 소리가 메아리쳤을 것입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는데... 주님은 나에게 해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이러한 원망의 소리가 그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지 않았을까요? 

이러한 면에서 그를 괴롭히는 육신의 가시는 사단의 사자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인 것이지요. 이렇게 육신적인 문제로 심하게 고통을 겪고 힘들어 하는 바울에게서 우리는 우리들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살아가면서 고통이 너무 심하고 힘이 들 때...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주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주님을 부정하려는 마음이 들 때가 참 많은 것이지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모양이야... 하나님은 너무 바쁘셔서 나 같은 사람에겐 관심도 없는 모양이야...’ 살아가면서... 어떤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질 때가 얼마나 많은 것인가요? 이럴 때에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사단의 지배아래에 놓이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문득 그가 깨달은... 하나의 놀라운 신앙적인 진실을 이야기합니다. 이게 진짜 바울이 자기의 연약함과 고통을 부끄럼 없이 소개하면서 말하고자 하는 대목인 것이지요. 어느 날 부턴가... 바울에게는 육신의 가시가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자기에게 사단의 사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기에게 보배처럼 소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왜 자기에게 이러한 육신적인 고통이 있을까? 하는 것을 새롭게 깨닫고 나서 부터였습니다. 어느 날 문득 그는 자기가 겪는 고통과 씨름하며 주님께 기도하다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부터는 그를 괴롭혔던 사단의 사자는 더 이상 사단의 사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의 소중한 통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것이 바로 신앙이 가진 신비가 아닐까요? 내 뜻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원하는 기도가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건강 주시면 주님을 위해서 더욱 열심히 살겠노라고 기도했는데 주님은 그 기도조차도 외면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소원이 이루어지고 기도가 응답받게 된 것보다 더 큰 은혜를 여전히 육신의 가시로 인해서 고통을 겪는 중에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러한 신앙이 가지는 신비한 은총이 우리들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앞으로 우리가 두 주간 동안 특별새벽기도회를 하는데... 여러분들이 기도하는 중에 응답을 받고 문제가 해결되는 일들이 많이 생겨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바울이 자기의 삶의 문제와 고통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해 주었던 주님의 음성...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은혜가 우리들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생각해보면 진정한 신앙의 여정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해 주셔야만...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셔야만... 나는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겠습니다. 이러한 차원을 넘어 서는 것이지요. 비록 지금 나의 현실이 어렵고 힘이 들어도... 늘 씨름해야할 문제와 어려움들이 나의 앞에 있다고 하더라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러한 주님의 음성이 들리게 될 때에 그 때에 비로소 모든 것은 새롭게 보일 수가 있는 것이지요. 한평생 예수를 믿고 살면서 이러한 신앙의 신비에 눈을 뜨는 기쁨이 우리들 가운데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자신에게 있는 육신의 가시를 사단의 사자가 아니라 주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통로인 것을 알게 되었을까요? 지금 바울이 겪는 육신적인 연약함... 이것이 가지는 신앙적인 의미는 어떤 것일까요? 

바울은 지금 자기 자신이 직면한 연약함 가운데서 겸손함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사도답지 못하게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과 아픔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v.7) 바울은 육신의 가시와 씨름 하면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자기가 더 겸손해 질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자고 하지 않게 하시려고 육신의 가시를 내게 주신 것’이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자고하다는 것... 다시 말하면 자기가 자기를 높이는 것... 교만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아 내가 교만하게 될까봐 하나님은 나에게 이러한 고통을 주신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랑할 만하지 않습니까? 세상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인들 중에 바울처럼 복음의 핵심을 꿰뚫고 그것을 목숨을 걸고 세상 사람들에게 전파한 사람은 이제까지 없었습니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얼마나 자랑할 것이 많을까요? 그러다 보면 스스로를 높이고 교만해질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교만한 마음을 가지다 보면 그는 하나님의 일군으로서의 생명력을 상실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스스로가 교만해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전서 10:12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항상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컫는 아브라함... 그도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17장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그를 찾아오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때에 아브라함의 반응이 어떠했는지 아십니까? ‘아브람이 엎드린대...’(창17:3) 이렇게 성경은 그의 행동을 말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항상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사람이었고...하나님은 그가 엎드릴 때마다 그의 삶에 풍성한 은혜와 복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바울은 생각해보니까 참으로 자기가 약하다는 것에 대하여 감사할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약하기 때문에 더 겸손하게 되고 더 간절하게 하나님을 바라볼 수밖에는 없었고.. 이것이 그의 인생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비결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깨달은 연약함이 가지는 새로운 의미... 그것은 자기가 약할 때가 진정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연약한 가운데서 들었던 주님의 음성은 이것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역설적인 대목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 능력이...’ 이것은 주님이 가지신 능력을 말하는 것이지요...  ‘약한데서...’ 이것은 주님을 따르는 인간의 연약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온전하여 짐이라...’ 주님의 능력은 우리가 강할 때에... 스스로가 강하다고 생각하고 무엇이든지 다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할 때에... 그 때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는 약하다고 생각할 때... 그래서 아무런 것도 할 수 없다고 주님께 고백하며 주님을 간절히 의지하려고 할 때에... 그 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부어주신다는 것이지요. 여기에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 가지는 신비함이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들에게 참으로 깊고 심오한 진리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힘이 강하고 자신감에 넘쳐서 무엇이든지 나의 힘과 내가 가진 지혜나 내가 가진 능력을 가지고 일을 하려고 할 때에... 그 때는 실상 가장 약할 때라는 것이지요. 주님이 침묵하시고 주님이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겸손하게 주님께 무릎을 꿇고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행하여 주십시오... 이렇게 주님께 도우심을 구할 때... 그 때에는 주님이 함께 하셔서 능력을 행하시기에 내가 약하다고 고백하는 순간이 가장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부족한 것이 많지만 그래도 목사이기에 문제나 어려움이 생기면 기도를 부탁해 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을 하지는 않더라도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기도해야하겠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그래서 새벽마다 기도하는 데... 이렇게 저렇게 기도하다보면 결론은 항상 ‘하나님!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시오...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는 기도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이 분에게는 이런 문제가 있고 저 분에게는 저런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도 수 백 명의 성암의 가족들이 저마다에게 주어진 가정이나 직장이나 학교에서 하루를 살아갑니다. 이들 중에는 도저히 우리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먼 곳이나 군대 같은 특별한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무능한 사람이 어떻게 그들을 다 돌볼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해결해 주시고 인도하여 주십시오...’ 새벽마다 제 기도는 항상 이렇게 끝날 수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두 손을 들고... ‘우리가 직면한 현실에 대하여 저는 무능합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서 항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생각해보면 우리들에게 얼마나 위로와 희망이 됩니까? 하나님이 힘 있고 강한 사람들만 골라서 도와주신다면... 언제 우리에게 차례가 올까요? 하지만 우리가 약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 그 때가 실상 하나님께서 가장 강하게 우리들을 붙잡아 주실 때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가 맞이하는 특별 새벽기도회가 이러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 저는 연약합니다. 어리석고 부족합니다.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시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연약함을 고백하고... 두 손 들고 항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을 통해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경험하는 축복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결국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가장 연약한 순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속에서 자신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깨닫는 그 순간이 오히려 가장 강하고 그렇기 때문에 가장 기쁘고 소중한 순간인 것을 우리에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함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v.10)
   
바로 이것이 믿음이 주는 신비입니다. 너무 아파서 육신의 가시라고 생각했던 것... 사단의 사자라고까지 말했던 연약함... 부끄러움과 아픔들... 실상 그 속에는 그가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넉넉한 하나님의 은혜가 숨어 있었고... 바울의 진정한 신앙의 여정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가진 가장 아프고 힘든 상처 속에서... 내가 직면한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 속에서 오히려 주님을 만나게 되고 더 큰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은총이 여러분 가운데 충만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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