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이 성전을 헐라 (요 2:13~22)

  • 잡초 잡초
  • 332
  • 0

첨부 1


이 성전을 헐라 (요 2:13~22)

  
목회상담학을 공부하다가 배운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모범생증후군’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가 목사가 되거나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행동이 바르고 조금도 잘못됨이 없는 모범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우리들은 교회에 오게 되면 말도 좀 점잖게 되고 행동도 좀 조심하게 되고... 다른 곳에서와는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닌가? 아마 우리들이 교회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가정이나 세상에서 그대로 한다면... 그만큼 우리들이 사는 곳은 더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서양 사람들은 'Sunday best'라고 해서 주일이면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들이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물론 Sunday best도 좋지만... 주일날만 단정하고... 교회에서만 모범생처럼 행동하지를 말고... 어느 곳에서나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기대하시는 일이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처럼 소금과 빛이 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가 사역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의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만의 독특한 부분입니다. 다른 세 복음서에는 예수는 대부분의 시간을 갈릴리에서 보내시다가 예루살렘에는 생의 마지막 부분에 올라가셔서 그 곳에서 십자가를 지신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오늘과 같은 엄청난 소동을 일으키신 것도 삶의 마지막 한 주간을 예루살렘에서 보내는 동안에 하신 일인 것으로 다른 세 복음서에는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사역을 하시는 동안 세 번 예루살렘에 가신 것으로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가 오늘의 말씀인 것이지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명절인 유월절을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성전 안에선 유월절을 앞에 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는 오늘 말씀 가운데 나와 있는 것처럼...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 그리고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이런 것들이 왜 필요하냐? 이렇게도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이 사람들은 순례자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에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성전에서 파는 소나 양이나 비둘기는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지는 것들인데... 아마도 성전에 올라오는 사람들이 엄격하고 까다로운 조건이 요구되는 제물을 시골에서부터 끌어 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순례자들은 돈을 준비해 와서 성전에서 파는 제물들을 각각 형편에 따라서 사서 드리면 되는 것이지요. 
  
돈을 바꾸어주는 사람도 이런 측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 남자들은 해마다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야 하는데... 성전에서 받는 세금은 오로지 성전 안에서만 통용되는 세겔화로 내야만 했습니다. 보통 통용되는 화폐에는 당시의 황제들의 초상이 새겨져 있어서 하나님께 드리기에는 적합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성전에 들어오면서 돈을 세겔로 바꾸어서 세금을 내야만 했던 것이지요. 

생각해보면 이 사람들은 순례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사람들인 것이지요. 그런데 웬 일인지...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시더니 그것을 마구 휘두르시며 동물들과 그것을 파는 사람들... 돈을 바꾸어주는 사람들을  다 내어 쫓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16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일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커다란 사건이었을까요? 그런 자료가 없기는 하지만, 아마도 성전이 생긴 이래로 이렇게 과격하고 무례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소위 ‘Sunday best’와는 거리가 먼 사람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다른 데서는 말도 막하고 행동도 과격하게 하다가도 교회에 나오면 좀 고상하고 점잖게 말을 하고 행동을 해야 사람들에게도 인정받고 좀 괜찮은 이미지로 다가설 수가 있을 텐데... 예수는 전혀 그런 것은 생각하지도 않는 듯합니다. 

더욱이 이것은 갈릴리에서 유명한 랍비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예수가 예루살렘에 처음 자신을 드러내시는 대목인데... 지나쳐도 한참 지나친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루살렘 지도자들 중에 누가 이런 예수에 대하여 호의적은 감정을 가질 수가 있을까요? 
   
그들은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 이렇게 예수에게 묻습니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18절) ‘지금 성전 안에서 네가 했던 행동을 정당화 할 수 있는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오...’ 예수가 이렇게 과격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어떤 다른 표적(sign)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다른 복음서와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마태21:23) 표적이라는 말 대신에 권세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권위(authority)라고도 하지요. 표적은 요한복음에 잘 등장하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의 앞에 나오는 갈릴리 가나의 한 혼인잔치에서 예수가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을 때, 그것을 가리켜서 ‘처음 표적’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하였습니다.(요한1:11) 

또한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사역을 종결짓는 단락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였으나...’(요한12:37) 예수가 행하신 많은 일들 그것은 표적들이라는 것이지요. 예수가 누구신가? 예수를 통해서 우리들의 삶 가운데 어떤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이것을 보여주는 표적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가리켜서 우리는 ‘표적의 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어쨌든 권위가 아니라 표적을 요구하는 것은 다분히 요한복음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절) 아마 예수의 이 말은 예수가 했던 행동보다 더 큰 충격을 그들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성전을 헐라니... 다른 건물도 아니고 하나님의 성전을 헐라니... 세상에 하나님의 성전을 놓고 이렇게 과격하고 심한 말을 해도 되는 것인지... 그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참으로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들 가운데 머물러 계심을 느끼게 해주는 소중한 공간인 것이지요. 이러한 성전을 헐어버리라니... 아마 그들은 예수의 이 말을 듣고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러자 사람들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이렇게 반응을 합니다.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그들 앞에서 있는 성전은 헤롯 대왕이 다시 세운 것입니다. 솔로몬이 처음으로 성전을 건축했고.. 바벨론 포로 이후에 그 성전을 다시 지었는데... 예수가 태어나기 전부터 유대를 다스리던 헤롯왕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성전을 다시 지었습니다. 

헤롯왕은 건축에 뛰어난 감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남아 있는 그의 시대의 건축물들을 보면 주후 70년에 로마에 의해서 불타버린 예루살렘 성전이 얼마나 웅장했을까? 하는 것을 짐작이 가게 합니다. 그래서 성전은 그 건물 자체만으로도 그들의 자부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헐어버리라’니... 그리고는 그 성전을 예수 자신이 ‘사흘 동안에 다시 일으키겠다.’니... 그들은 이러한 예수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의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21-22절에 보면 이것은 예수가 성전 된 자신의 육체를 암시하신 것이고, 예수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을 때에 제자들은 비로소 이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고 부연해서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에 처음 올라가셔서 과격한 행동을 하게 되었을 때... 당시 예루살렘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은 결코 예수를 좋게 보았을 리가 없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성전에서의 과격한 행동이 예수를 십자가에 이르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자기가 이렇게 행동을 하게 될 때에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할지... 이것을 몰랐을 리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이렇게 과격하게...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게 위험한 인물로 각인 될 것을 잘 알면서도 이렇게 행동을 하였던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오늘의 말씀은 시편 69편 9절(주의 집을 위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고... 시69:9a)을 인용하면서 여호와의 전을 사랑하는 열정 때문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17절) 예수가 하나님의 전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벌린 일이라는 것이지요. 성전에 올라와서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라는 것은 본래 그가 꿈꾸고 기대했던 성전의 모습과는 너무나 커다란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분노하셨고... 그는 그 어떤 결과가 야기되더라도 자신의 분노를 조금도 감추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보았던 과격한 행동으로 표출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보았던 성전의 현실을 어떤 것이고 예수가 희망하시는 성전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성전에서 장사하고 돈 바꾸어 주는 사람을 내어 쫓으시며 예수가 한 말씀에 다시금 귀를 기울여 봅시다. 16절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성전은 하나님 아버지의 집이 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가 성전을 바라보면서 가지는 꿈인데... 현실적으로 성전은 장사하는 사람들의 집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예수를 분노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예수의 주관적인 판단일수도 있습니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성전 안에서 제물로 드려질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파는 일도 필요한 일이거든요. 이런 사람이 없다면 그들은 먼 거리를 소나 양을 끌고 예루살렘을 찾아와야만 합니다. 만약에 오는 도중에 동물에 약간의 흠집이나 상처만 생겨도 그것은 제물로 드려질 수가 없으니 이것이 얼마나 번거롭고 힘든 일인가요? 성전에서만 통용되는 화폐를 바꾸어 주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세금을 낼 수가 있을까요? 이들은 모두 성전을 드나드는 순례자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을 보면서 마구 화를 내면서 그들을 쫓아내고 있으니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가 곱게 보일 리가 없는 것이지요. 
   
이런 면에서 보면 성전은 별 문제 없이... 오랫동안 그들이 해 오던 대로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갈릴리에서 갓 올라온 낯선 예언자 예수의 눈에는 이것은 성전이라고 할 수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단지 물건을 파는 곳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곳은 단지 장사하는 집에 불과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속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와서 돈으로 제물을 사서 제사장에게 건네주면 되었습니다. 그 것 뿐입니다. 

그곳에서 진정 하나님께 감사한다든지...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과 허물을 뉘우치며 회개한다든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한다든지... 하나님께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찬양과 영광을 돌린다든지... 찬양과 영광을 돌린다든지.. 그런 모습을 예수는 찾아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것인지... 사람들이 이토록 오랜만에 먼 길을 걸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시다고 믿는 하나님의 전을 찾아왔는데... 그들 중에 그 어느 누구도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단지 그곳에서는 제물을 팔고 사는 행위만 있었지...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예배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성전을 가리켜서 단지 소나 양을 팔고 사는 그리고 돈이나 바꾸어 주는 ‘장사하는 집’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분노하고 계신 것이지요. 

예수가 생각하시는 성전은 아버지의 집입니다. 단지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오직 이러한 믿음만이 성전을 성전 되게 하는 것이지... 이 외에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성전은 아버지의 집이 되어야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성전에 들어와서 오로지 아버지만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혹시 성전 밖에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보내는 많은 시간들 속에서는 우리는 아버지를 잃어버리고 하나님 없이 살 수도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냥 내가 그것을 외면하고... 모르는 척 하고 그렇게 지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전에 들어오면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그 시간만이라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진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의 나의 삶의 여정 가운데서 하나님은 어떻게 나를 도우셨나? 성전에 와서 그 하나님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제껏 회개하지 못한 부끄러운 부분을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그분께 진정 감사하며 자신의 삶의 미래와 불확실한 부분을 하나님께 맡기는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가 꿈꾸시는 성전의 모습...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서의 성전의 참된 모습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성전이 장사하는 집이 아니라 하나님 아비지의 집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하고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집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분명하게 체험할 수 있고... 아버지의 집으로서의 성전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비한 삶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시편 84편은 아버지의 집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그것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집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 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4:10) 이렇게 아버지의 집이 좋은 까닭이 무엇인가요? 그 곳은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반겨주시는 곳이기에... 그렇기 때문에 그곳은 나의 인생의 참된 보금자리입니다. ‘주의 집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나이다...’(3절)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풍성한 은혜와 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11절)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예배하는 이 자리가 아무런 느낌이나 생각도 없이 단지 습관과 형식에 얽매어서 잠깐 왔다가 돌아가는 ‘장사하는 사람의 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는 ‘아버지의 집’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예수가 하신 말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절)는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아까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것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예수에게 어떤 표적을 구할 때에 답변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46년 동안 지었던 성전을 어떻게 삼일 동안에 일으킬 수 있느냐며 예수가 하신 말씀을 오해하였고, 이 말씀의 참된 의미는 예수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신 후에야 분명해지게 되었다고 본문은 우리에게 설명하였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성전이 성전 되지를 못할 때... 그 속에 하나님이 게시지 않고 단지 사람들만이 모여 있을 때... 그 곳은 더 이상 하나님의 집으로서의 생명력을 상실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 성전은 더 이상 지속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자랑하던 예루살렘 성전은 주후 70년경에 로마 군인들의 손에 의하여 다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우리는 예수의 삶 속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성전의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에 성전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으며 오늘도 그 믿음 가운데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삶... 그 가운데서 이 땅에 성전을 세우신 하나님의 뜻과 소원이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예수가 일으키신 새로운 성전! 그것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굳게 믿으며 그가 어디로 인도하시던지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의 삶 가운데 존재하는 새로운 형태의 성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  이렇게 말하면서 예수의 정신으로 오늘을 살아가려는 우리들 자신이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집입니다. 우리는 이곳에 들어 올 때마다 나의 삶 가운데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히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들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있는 곳에서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풍성함을 전함으로써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