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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목자와 도둑 (요 1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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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와 도둑 (요 10:7~15)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다 도둑이고 강도이다. 그래서 양들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그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드나들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오는 것뿐이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들도 자기의 것이 아니므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가 양들을 물어가고, 양떼를 흩어 버린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린다.”]

• 베두인족의 일상

여러 해 전 차를 타고 유대 광야를 지날 때의 풍경이 떠오릅니다. 굽이굽이 이어진 구릉, 그 허허로운 풍경을 쓸쓸하게 바라보다가 언덕의 중턱마다 누군가가 일부러 그어 놓은 듯한 몇 줄기 빗금에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나중에야 그것이 오랜 세월 양들이 먹이를 찾아다니면서 다져진 길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자들이 양떼를 몰고 느릿느릿 광야를 지나는 모습은 어쩌면 수천 년 동안 변함없이 이어진 유대 땅의 일상이었을 것입니다. 가끔 싯딤나무 그늘 아래서 멍한 시선으로 하늘을 바라보거나, 나귀 등에 올라탄 채 천천히 이동하는 목자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습니다. 

집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는 목자들은 저녁 어스름이 내릴 무렵 밤이슬을 피하고, 맹수들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 양들을 우리에 몰아넣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그들의 고단한 일상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목자들은 양 우리 옆에 문지기들을 세워 두고 잠을 잤습니다. 도둑들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아침이 되면 목자들은 우리 앞에 와 자기 양들을 불러낸 다음 앞장서서 초장으로 향했습니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광야를 떠돌며 살아가는 베두인족의 모습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광야 가운데서 야영을 할 수밖에 없는 목자들은 잠을 청하기 전에 우두머리 양의 다리와 자기 다리를 끈으로 이어놓더군요. 아침이 되어 우두머리 양이 풀을 찾아 이동하면 즉시 일어나기 위해서였습니다. 함께 걷고, 함께 먹고, 함께 뒹구는 동안 목자들은 양과의 일체감을 느끼게 될 겁니다. 부득이하게 처분해야 할 때도 있지만 목자에게 양은 확대된 가족의 일부이지, 돈벌이의 수단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런 광경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키심으로써 당신이 누구신지를 밝히고 계십니다.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7)
“나는 선한 목자이다.”(11)

언어는 마음속에 어떤 풍경을 떠올리게 해줍니다. ‘양이 드나드는 문’이라는 은유는 양을 훔쳐가기 위해 몰래 담을 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둔 발언이고, ‘선한 목자’라는 은유는 품삯을 위해 일하는 목자들과 대조하기 위해 채택된 것입니다. 

• 갈등을 두려워하지 말라

알듯 모를 듯한 말씀에 고개를 갸웃하는 청중들을 향해 예수님은 조금 더 직접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설명이 좀 과격합니다.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다 도둑이고 강도이다. 그래서 양들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8)

아마도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은 여기서 도둑과 강도로 지칭된 이들이 누구인지 대번에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주의의 척도로 사람들을 마구 재단하던 종교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백성들의 사정에는 아랑곳없이 정쟁에만 몰두하던 정치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상처와 그늘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대할 때는 한없이 부드러우셨지만, 자기 의에 사로잡힌 사람들과 그들의 위선에 대해서는 대단히 엄격한 태도를 보이셨습니다. 권력에 도취해 자기 분수를 모르는 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라 하시고, 헤롯을 ‘여우’라고 부루신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상처 입은 마음을 위로해 줄 생각이 없습니다.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이들을 도울 생각도 없습니다. 그런 이들을 보면서 주님은 거룩한 분노를 터뜨리십니다.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다 도둑이고 강도이다.” 그들은 다 양을 훔치려고 담을 넘는 도둑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나는 삯꾼 목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런 과격함은 점잖은 종교인들, 교양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꼭 이렇게까지 대립각을 만드실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비판을 해도 조금은 타협의 여지를 남겨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머리로 살아가는 이들의 생각이고, 고통 받는 인류로 인해 가슴 미어지는 슬픔을 느끼는 예수님에게는 해당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자기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자의적으로 왜곡하는 현실을 목도한 30대 초반의 청년 예수의 가슴에 불이 붙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위선자들, 기회주의자들, 도둑과 강도들과의 관계에서 필요한 것은 타협의 기술이 아니라 대립이었습니다. 진리는 타협을 통해서 드러나는 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대립과 갈등을 통해서 드러나는 보화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눅12:49)고 하셨고, 나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눅12:51)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등을 회피하면 필요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는 타협적 태도나, ‘세상이 다 그런 거지’ 하는 허무주의적인 태도는 모두 열린사회를 가로막는 적들입니다. 시인 이재무는 여름 땡볕과 같은 세월에 아무리 둘러보아도 땡감처럼 단단한 놈이 없다고, 떫은 놈이 없다고 탄식합니다. 그는 떫은 놈일수록 벌레에 강하고, 비바람을 이길 수 있다고 노래합니다. 땡감 같은 사람이란 사사건건 삐딱하게 구는 이가 아니라, 불의에 대해 분노할 줄 알고 거짓과 위선에 맞설 줄 아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시인은 덜 떫은 놈은 홍시로 익어갈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에 필요한 이들은 이런 이들이 아닐까요? 예수정신의 야성, 함석헌 선생님의 말로는 ‘들사람 얼’이 사라져 한국 교회는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순교자인 카즈 뭉크(Kaj Munk)는 “오랫동안 교회의 상징은 사자, 양, 비둘기, 그리고 물고기였다. 하지만 한 번도 카멜레온이었던 적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이라고 말합니다. 옳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선택받았다는 것은 오직 우리가 선택하는 것들을 통해서만 확증됩니다. 예수의 길을 걷지 않으면서 예수를 길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허위일 뿐입니다. 

• 양과 목자의 상관어

주님은 강도와 도둑에게 다 털려 기진한 이스라엘 민중들의 삶을 보며 기가 막힙니다. 아마도 우리의 현실을 보셔도 똑같은 심정이 되실 것입니다. 주님은 어느 시대든 주류 세계로부터 소외된 사람들, 마치 없는 사람처럼 취급받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고, 자존감을 되찾게 하고, 풍성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시기 위해 오늘도 우리 곁에 다가오고 계십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10b)

이 말씀처럼 예수님의 삶을 잘 요약해주는 말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게 하는 것이 주님의 꿈입니다. 가끔 내 속의 진액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삶이 스산하게 느껴질 때면 죄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생명을 한껏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이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가끔 저는 ‘不肖 제자’라는 말을 쓰곤 합니다만, 정말 예수님을 닮으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시간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풍성한 삶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누려야 합니다. 

영국의 BBC 방송은 행복한 삶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탐색하여 보도한 적이 있습니다. 답은 매우 간단했습니다. 풍성한 삶을 누리는 사람들은 세 가지 특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즐기는 사람이었고, 다른 이들과 긴밀하게 협력하고 연대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무엇보다도 그 일을 삶의 의미와 연결시키는 일에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도 따지고 보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에게는 ‘억지로’가 없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는 일치와 사랑의 분위기가 감돕니다. 주님과 만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향해 자기 생의 방향을 바꿉니다.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풍성한 생명을 누립니다. 그들은 기존 질서가 제시하는 것과는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남들보다 덜 버는 데도 행복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소유는 적지만 존재는 풍성한 이들입니다. 많이 웃고, 많이 어울리고, 많이 나누며 사는 삶의 비결을 터득한 이들을 보면 참 감동스럽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런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주님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의 본문에서 양과 목자의 관계를 규정해주는 단어는 ‘안다’입니다. 목자는 양의 이름을 알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압니다. 과연 우리는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알고 있습니까? 앞서 가시는 그분의 뒤를 따라가고 있습니까? 혹시 도둑이고 강도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도둑과 강도들의 음성은 부드럽습니다. 그들은 신앙적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가려는 우리에게 왜 힘겹게 그 길로 가냐고, 인생은 짧다고, 그러니 적당히 즐길 줄도 알아야 한다고, 세상이 다 썩었는데 너 혼자만 고고한 척하냐고, 융통성 있게 살아야 한다고, 쉽게 돈 벌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 영혼을 도둑질하려는 이들입니다. 

• 눈을 똑바로 뜨고

주님은 그런 도둑과 강도, 그리고 이리떼에 맞서 당신의 백성들을 지키려 하십니다. 그들에게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시려고 죽음조차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그 길은 외로운 길이지만 헛된 길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그를 붙들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그것은 내가 목숨을 다시 얻으려고 내 목숨을 기꺼이 버리기 때문이다.”(17)

강력한 말씀입니다. 주님은 살기 위해 죽습니다. 죽어서 사는 법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이 누추함을 면치 못하는 까닭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누군들 죽음이 두렵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죽음과 맞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엘라의 계곡>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엘라 계곡은 다윗과 골리앗이 싸운 현장입니다. 이 영화에서 행크라는 인물은 자기를 도와준 경찰관의 집에 찾아가 그의 어린 아들에게 이런 말을 들려줍니다.

“다윗은 자신의 공포심을 이겼어. 그래서 골리앗이 상대가 안 된 거야. 골리앗이 달려오는 데 꼼짝 않고 기다렸단다. 그게 얼마나 큰 용기인 줄 아니? 괴물하고는 그렇게 싸우는 거야. 다가오게 놔뒀다가 눈을 똑바로 보고 끝장내는 거지.”

주님은 죽음과 그렇게 싸우셨고, 마침내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용기가 있다는 것은 그가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용기란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현실이 없다면 어떻게 용기를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육체적인 고통이나 사회적 수치를 당할 우려가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에 맞서는 순간, 그 두려움은 더 이상 우리를 마비시킬 수 없습니다. 이게 자유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가장 큰 적인 두려움의 눈을 똑바로 보고 끝장을 냈던 겁니다. 죽음에 대해 죽은 사람을 누가 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인생의 패배자가 아니라 죽음에 대해 죽으신 분, 영원한 자유인입니다. 문익환 목사님은 <마지막 시>라는 시에서 “두 동강난 이 땅에 묻히기 전에/나는 죽는다./나의 스승은 죽어서 산다고 그러셨지./아./그 말만 생각하자./그 말만 믿자, 그리고/동주와 같이 별을 노래하면서/이 밤에도/죽음을 살자.”고 노래했습니다. 이게 예수의 길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죽어서 산다’는 말씀을 꼭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삶이 누추한 까닭은 죽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주님의 은총의 신비를 가장 생생하게 경험하는 사람은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를 내려놓는 사람들입니다.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했고, 그의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불타는 화덕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지금 우리는 누구의 목소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까? 누구의 뒤를 따라 가고 있습니까? 정말 잘 산다는 것은 누군가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에 행복한 웃음이 피어나도록 하는 것, 낙심했던 영혼에 희망을 불어넣는 것, 배고픈 사람을 먹이는 것, 외로운 사람의 벗이 되어 주는 것…우리는 이 일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순절 순례의 길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리는 길입니다. 아니 사실은 나를 버림으로 참 나가 되는 길입니다. 이 길을 걷다가 문득 길벗으로 다가오시는 주님과 만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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