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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는 오라 (사 5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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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오라 (사 55:1~9)


사순절셋째주일,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신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恩寵 베푸시기를 기원합니다.

아일랜드 극작가, 소설가, 평론가였던 George Bernard Shaw(1856-1950)가, “우리 사회에 위험한 것은 불신이 아니라 믿음이다”고 했습니다. ‘신뢰’가 자신의 정치철학이라’고 말하는 정치인도 있습니다만, 신뢰 중요하지요,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바른 믿음이라는 겁니다. 잘못된 믿음은, 불신보다 더 위험합니다.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상한 정보들을 믿는 경향이 많습니다. 외계인이 방문했다는 둥, 점성술이 기가 막히게 맞는다는 둥, 귀신 나오는 집이 있다는 둥(예전에, 제가 살던 가까운 이웃, 귀신 나온다는 凶家, 요즘 그런 이야기 안 통합니다. 不動産 가치가 얼만데, 그런 이야기합니까? 그런 집 없어서 못 삽니다), 이상한 정보들 믿습니다. 어느 갤럽 조사 결과를 보면,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현상들 중, 최소한 한 가지 이상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 무려 73%나 된다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정보에 기초한 자기 나름대로의 믿음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요즘 우리나라 국민들이 가장 믿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까? 경제관련 믿음입니다. 196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는 국민소득 80달러로, 유엔에 등록된 120여 국가 중에서 최빈국 중 하나였습니다. 그랬던 우리나라가, 다른 선진국이 200년, 180년, 100년에 이룩한 것을 단, 30년 만에 압축성장하면서 10,000달러 시대 이루지 않았습니까? 그랬지만 11년 전에는, 나라 빚을 갚을 달러가 부족해 외환위기도 겪었지만, 잘 극복했습니다. 세계적인 금융위기 파고도, 잘 넘어섰습니다. 삼성, LG, 현대차 같은 글로벌 기업들을 키워내면서 세계 10위권 경제국이 되었습니다. 어느새 원자력이 새로운 주력산업이 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나오는 예측이, 10년 뒤인 2020년의 한국은 1인당 GDP(국내총생산)가 지금 現在의 日本, 싱가포르, 이탈리아와 대등한 수준인 4만 달러시대가 올 것이라고 합니다. 어느 누구가 이런 예측을 믿고 싶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希望찬 믿음, 좋습니다.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희망이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경제력이 좋아질 때, 국민소득이 높아질 때, 국가브랜드 가치가 점점 더 높아질 때, 이 모든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소홀히 하기가 쉽다는 겁니다. 그래서 풍요 속에서, 생각지도 않는 또 다른 위기가 찾아온다는 겁니다. 역사의 교훈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430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으로 이끈 모세가, 40년 광야생활을 끝내고, 가나안 땅이 훤히 내다보이는 모압 평지에서 마지막 한 설교(申命記)에서 이런 권면을 합니다(신 8,1 ff.).

내가 오늘 命하는 모든 命令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蕃盛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命令과 法度와 規例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羊이 蕃盛하며, 네 銀金이 增殖되며, 네 所有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財物 얻을 能力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하나님 잊어버리지 말라, 언약을 지켜 성취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라, 이것이 너희가 살 길이다. 복 받는 길이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 온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우리나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염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모세 이후, 여호수아 시대, 사사시대를 거쳐, 왕조가 들어섰습니다. 사울 왕 이후, 다윗 왕, 솔로몬 왕을 거치면서, 솔로몬의 아들 代에 와서는 결국 이스라엘은 분열왕국이 되고 맙니다. 북쪽은 이스라엘(에브라임) 왕국을 건국했고, 남쪽은 유다 왕국을 건국합니다. 

두 나라는, 분열 왕국을 건국한 후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북 이스라엘 왕국이 앞장서서,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들의 눈에 보기에 좋아 보이는 豊饒의 神, 多産의 神 우상 바알과 아세라를 극렬하게 섬겼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외적으로는 다윗 왕국에 버금가는 경제력과 군사력, 부를 자랑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태평성대한 시대를 구가했습니다. 그 때가, 주전 8세기입니다. 

바로 그 때, 북 왕국 이스라엘이 패망합니다. 앗수르제국 살만에셀 5세의 정복전쟁에, 주전 721년에 패망하고 맙니다.

南 王國 유다, 역시 하나님 무시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훼손 된 것을 보수도 하지 않았습니다(凶殿, 성전세도 안 내고, 방치). 왕과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말씀(토라)가 어디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지냈습니다(말로 안 되는 거지요, 우리가 성경 안 읽는 것과 똑같습니다). 우상숭배에 골몰했습니다. 

요시야가 왕 위에 오르면서, 성전 수리를 하다가 율법책(토라)를 발견하고는, 옷을 찢으며, 하나님 말씀 듣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그런 말씀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지낸 겁니다. 율법책을 발견하고 요시야는 異邦禮拜를 없앴습니다(우상예배,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세라 상을 세워놓고 섬겼습니다, 성전 가운데 男娼의 집을 지워놓고, 죄악을 범했습니다).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게 했습니다(그 때까지, 율법대로 유월절 지켜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잠깐, 요시야가 죽자 그 다음 왕 여호아하스, 또 그 다음 왕 여호야김, 그 다음 왕 여호야긴, 마지막 왕 시드기야까지 한 사람 예외 없이, 여호와 보시기에 惡을 행했습니다. 그러다가, 주전 586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패망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선민, 백성, 나라 유다가 살아온 역사요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 인간의 불신앙, 하나님 무시하는 것, 참 무섭습니다. 否認하고 싶지만, 人間의 실상이 그렇습니다. 

놀라운 복음이 여기 있습니다. 이사야 55장은, 제2이사야서의 결론말씀입니다. 제2이사야서는, 바벨론에 망하여 亡國의 눈물을 흘리며 바벨론에서 살고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救援과 慰勞를 선포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유다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비록 70년 전에는, 바벨론을 범죄 한 유다 백성들을 때리는 채찍으로 사용하셨지만, 이제는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을 들어 그 바벨론을 패망시킬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은, 하나님이 유다 백성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쓰시는 ‘하나님의 종’이라 예언합니다. 

그러면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위로와 구원, 희망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너희는 위로하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일러주어라. 이제 복역의 기간이 끝이 났다. 형벌도 다 받았다. 지은 죄에 비하여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예언 그대로 바벨론은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게 降伏하고, 종말을 맞습니다(B.C. 539).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바벨론을 정복하자, 그 다음 해 주전 538년에,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던 여러 민족들을 자기들의 조국과 고향, 그들의 神에게로 돌아가라고 명령합니다. 그 때, 유다 백성들에게도 해방과 구원이 주어졌습니다. 본문은, 바벨론이 해방되기 직전에, 선포된 말씀입니다. 세 가지 예언이 선포됩니다.

(1)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구원의 잔치에, 너희 목마른 자들은 다 나아오라는 겁니다. 돈 없는 자도 괜찮다, 너희는 와서 구원의 은총을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하십니다. 바벨론 포로가 되기 전, 그러니까 70년 전의 그들의 과거생활이 어떠했습니까?(다니엘은, 10대에 붙잡혀 와서, 나이 80이 넘어서서 다리오 왕의 총리가 된 인물 아닙니까? 이미 그 때, 포로로 잡혀 왔던 대다수 유다백성들은 바벨론에서 다 죽고 없습다) 

패망하기 전 유다백성들은, 경제적인 풍요를 누렸습니다. 삶을 풍요했지만, 풍요의 神 우상 ‘아세라’를 섬기다, 바벨론 포로가 되었습니다. 

나라 잃고, 포로 되어 살다보니, 하나님 말씀이 그리워졌습니다. 목마름이 심했습니다. 먹을 양식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마실 물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입니다(암 8, 11). 누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줄 사람 없는가? 비틀거리며 찾았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들의 의지와 힘으로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 아니고서 그것이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다시는,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지 말라,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지 말라, 우상숭배하지 말라. 하나님 청종하면 좋은 것을 먹을 것이다,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하십니다. 

(2) 하나님의 언약은, 결코 헛되지 않다고 선포합니다. 3절 하반절, “내가 너희를 위하여 永遠한 言約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許諾한 확실한 恩惠이니라.” 이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왜 갑자기 느닷없이, 다윗과 맺었던 언약을 들먹이십니까? 지금이 어느 때인데, 말입니다. 다윗에게 허락한 언약은, 바벨론 패망 이전에 맺은 언약입니다.

“네 몸에서 날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堅固하게 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王位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永遠히 保全되고, 네 王位가 永遠히 견고하리라”(삼하 7, 11-16).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유다 백성들에게, 그 옛날 다윗 왕과 맺은 언약을 들먹이시는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은 언약에 대하여 신실하다는 말씀이지요.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다시 그 언약을 지키기 위해 契約更新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언약을 갱신하고, 내가 너 유다를 回復하겠다, 救援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도 이와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믿으십니까? “아멘”하여 응답하는 자에게, 구원이 임할 것입니다.

(3)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이사야 55, 12-13말씀을 보면, 바벨론에 패망한 유다 백성들에게 제2의 출애굽과 같은 구원이 임박하였다고 선포합니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리라 하십니다. 폐허가 되어버린 예루살렘 (한두 해만 땅 갈지 않으면, 묵은 땅 됩니다. 삼풍백화점 무너진 자리, 방치된 것을 보았는데, 그 자리에 언제 백화점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잡초만 무성…) 70년 동안 갈지 못한 땅, 그 실상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뭐라 하십니까? 山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다/ 잣나무가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날 것이다/ 花石榴(꽃석류)가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다/ 이것이 여호와의 記念이 되며, 영원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라 하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矜恤과 慈悲, 구원으로 부름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 되십시다. 亨通한 성도님 계십니까? 以前보다 하나님을 더욱 敬畏하십시다. 힘들 때에도, 고난의 때에도 섬기던 하나님, 형통할 때에,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기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셨습니다. 財物 얻을 能力 주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십시다.

혹, 고난 중에 계신 성도님 계십니까? 사랑의 채찍 맞아 아픈 성도님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惡人은 그 길을, 不義한 者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矜恤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아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도, 갈보리 언덕에 높이 세워진 예수님의 十字架를 바라보십시다. 거기, 내 人生의 모든 문제의 答이 있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救援과 生命이 십자가에 있습니다. 예수님 좌우편에 달렸던 강도 중 하나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할 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樂園에 있으리라”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20세기 신학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J. Moltmann은 제2차 세계대전 한 복판에서,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물었습니다. “하나님, 이런 역사적인 절망에 빠진 나에게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하나님 당신은 도대체, 이 역사에 대하여 무어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까?” 몰트만이 던진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答은, 十字架에 달려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절규하시는 예수님에게서 자신과 역사의 참 希望을 발견했습니다(希望의 神學). 그리고 나아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의 부활 속에, 구원과 승리를 주시는 십자가의 의미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기쁨을 주시는, 주님께로 나아가십시다. 주님이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아멘.

하나님, 우리 믿음, 우리 삶은 늘 흔들립니다. 하나님 말씀에 신실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보다, 세상과 우상을 더 섬겨왔습니다. 주여,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구원의 잔치에 應答하여 배부름 얻기 원합니다. 구원의 기쁨 회복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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