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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빌 바를 알지 못하나 (롬 8: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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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빌 바를 알지 못하나 (롬 8:26~28) 
  

들어가는 말

어떤 칼럼니스트는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이룬 세 ‘새’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가 지적한 세 가지 ‘새’란 새마을운동, 새벽조찬모임, 새벽기도회입니다.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저절로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고, 저절로 땅에서 솟구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누가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갖다 준 것도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모든 민족 구성원들이 일군 땀과 눈물의 결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새마을운동, 새벽조찬모임, 새벽기도회는 달리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 새마을운동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1970년대 아침마다 스피커를 통해 우렁차게 울려나왔던 새마을노래가 아닙니까?
이 노래는 당시 나태, 음주, 도박으로 시들어가던 농촌마을에 새로운 기운을 돋우었습니다.
결국 새마을운동은 수천 년간 숙명처럼 여겨졌던 보릿고개를 극복하고, 가난에 찌든 한국사회를 근대화시킨 사회운동이 되었습니다.

㉡ 새벽조찬모임

그즈음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조찬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조찬모임은 시간이 금이고, 시간이 돈인 사람들에게 때 이른 아침식사를 나누며 고도성장을 위한 아이디어를 나누기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맑은 정신으로 정보를 나누고 인맥도 쌓으니 일석이조였습니다.
새벽조찬모임은 시회지도층의 생활패턴도 바꾸어놓았습니다.
아침 일찍 모임에 참석하려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함으로 질펀한 밤 문화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 새벽기도회

새마을운동이 인성을 깨운 운동이고, 새벽조찬모임이 지성을 깨운 모임이라면 새벽기도회는 영성을 깨운 모임입니다.
후진국에서 새마을 운동을 그들 사회에 접목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렇지만 실패해요.
그 이유는 그들에게 영성을 깨우는 새벽기도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새마을 운동은 흉내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새벽기도회는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다릅니다. 
  
우리 교회는 3월 14일부터 4월 3일까지 ‘봄철 다니엘 세이레 새벽기도회’를 갖게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미리 생활계획에 참조하셔서 한 분도 빠짐없이 이 특별한 영적 축제에 참석하시길 바랍니다.
조지 허버트는 ‘기도는 영혼의 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빈혈이 있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다가 때로 어지러운 것은, 때로 쓰러지는 것은 영혼의 피인 기도가 모라라서가 아닙니까?

기도하는 사람은 마치 손만 뻗으면 하나님의 옷자락을 잡을 것 같은 영적인 친밀감을 갖습니다.
마치 주님과 동산을 거니는 것과 같은 영적인 포근함과 안식으로 세상의 온갖 근심과 걱정과 근심을 잊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때가 가장 즐겁다./ 이 세상 근심 걱정에 얽매인 나를 부르사/ 내 진정 소원 주 앞에 낱낱이 바로 아뢰어/ 큰 불행 당해 슬플 때 나 위로 받게 하시네.”

1. 우리는 ‘빌 바’를 잘 알지 못합니다.

본문 롬8: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즉 우리의 기도의 목적과 내용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놀랍게도 바울 사도는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부류 속에 자신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바울 사도는 영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바울 사도의 선교 사역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바울 사도의 마음은 영혼들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자신’도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만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타난 많은 신앙의 사람들도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세요.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아닙니까? 
그런 아브라함이 얼마나 엉뚱한 기도를 드렸습니까?

창15:2-3절입니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나의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상속자로 아들을 주시겠다고 분명히 약속했건만 정작 아브라함은 자신의 종인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겠다고 엉뚱하게 기도했습니다. 

사무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무엘이 누굽니까?
사사시대와 왕정시대를 연결하는 다리와 같은 인물, 사울과 다윗을 기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운 큰 인물이 아니었습니까?

그런 그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데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고 대신 다윗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여전히 하나님이 버린 사울을 붙들고 슬퍼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삼상 16:1).
이렇게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기도를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2. 그래서 거절의 응답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울 사도는 ‘육체의 가시’를 뽑아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고후12:8절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 사도의 기도를 거절로 응답했습니다.
고후12:9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하나님의 뜻은 다른 데에 있었습니다.
고후12: 9절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사람이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기 지성이 얼마나 우둔한지, 자기 의지가 얼마나 박약한지, 자기 감정이 얼마나 변덕스러운지를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약하다는 사실을 통절히 깨달으면 그때야 비로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때 하나님의 지혜가 자기의 지혜가 되고,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의 능력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의 사랑이 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약한 자가 강한 자가 되고, 부족한 자가 온전한 자가 되는 역설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체험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바울 사도의 기도를 거절로 응답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어거스틴은 회심하기 전에 영적으로 심한 방황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었던 그의 어머니 모니카에게 방황하는 아들이 기도제목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모니카는 아들이 로마에 가서 살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아들이 로마에 가지 못하도록 붙잡아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아들이 로마에서 더 방탕한 삶을 살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은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니카의 기도를 거절로 응답하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어거스틴은 로마에서 암브로시우스 감독을 알게 되었고, 그를 통하여 놀라운 회심의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모니카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어거스틴의 삶을 이렇게 인도하실 줄 꿈에서라도 상상했겠습니까?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기 위하여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수단을 사용하실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전반부인 교리 부분을 끝마치면서 롬11:33-36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3.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옳으십니다.’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메시지입니다. 
성도들이 절망적인 상황에 맞닥뜨리면 사용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찌하여’라는 단어입니다.
시편에서 몇 구절 인용해 보겠습니다.
시22:1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74:1절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기르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뿜으시나이까.”
‘어찌하여’라는 질문은,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질문은 성도가 할 바른 질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고통스럽지만 의식적으로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옳으십니다.”
낭패를 당해도 하나님은 옳으십니다.
손해를 봐도 하나님은 옳으십니다.
부도가 나도 하나님은 옳으십니다.

실패를 해도 하나님은 옳으십니다.
합격을 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옳으십니다.
병들어도 하나님은 옳으십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이유는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옳으십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나면, 원망이 사라지고, 감사가 터져 나와요.
이렇게 고백하고 나면 불평이 사라지고, 찬송이 터져 나와요.
이렇게 고백하면 눈물이 터져 나와요.

천안대 기독교학과장인 유호준 박사께서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어린 시절, 운전기사였던 아버지는 집사였지만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분이셨답니다.
방학이 되면 방학기간 38일 중에서 30일은 아이들을 기도원에 데리고 가서 성경을 읽히고, 기도를 시킬 정도였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아들이 15살 되던 해에 백혈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가장이 사망하니 집안 살림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무진장 고생을 했습니다.
그 때 아들은 ‘어찌하여’를 연발하며 하나님께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유호준 교수는 이렇게 그의 간증을 맺었습니다.
“그 당시 내가 이렇게 학위를 얻고 이런 자리에 있게 될 줄 꿈엔들 생각했겠습니까?”
어려운 시련조차 ‘하나님은 옳으십니다.’라고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그의 신실하심을 보여주십니다.

찬송가 418장-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영국의 아주 작은 마을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그 마을은 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는 작은 어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부들이 바다로 고기잡이를 떠난 뒤, 갑자기 폭풍이 불더니 삽시간에 죽음의 바다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마을에 남아 있던 가족들은 달리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함께 모여 기도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고기잡이를 나간 남편과 아빠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캄캄한 밤이 되었습니다. 
응답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마을 한편에서 불기둥이 솟구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알고 보니 설상가상으로 한 집에서 불이 나 옆집으로 옮겨 붙어 두세 채를 다 태워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절망했습니다. 
분노와 원망이 머리끝까지 치밀었습니다. 
그렇게 긴 밤이 지나고 동녘이 밝아왔습니다. 
그런데 먼 수평선에서 몇 척의 배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하던 바로 그 어부들의 배였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껴안고 흐느꼈습니다. 
감격이 진정될 즈음에 한 어부가 어젯밤에 자신들에게 일어났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들은 갑자기 거세진 풍랑과 파도에 방향을 잃고 표류하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넘실대는 파도와 어둠을 뚫고 희미한 불빛이 비쳐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들은 불빛이 비치는 곳을 향해 열심히 배를 몰았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불빛이 바로 어젯밤 마을에서 일어났던 화재 때문에 생긴 빛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어느 누가 화재를 보면서 “아, 하나님의 응답이구나!”라고 말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분명 그들이 드린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참으로 인간의 지혜로 다 설명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신비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길과 우리의 길이 다름과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보다 높은 것을 인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기도하는 사람이 날마다 배우고 가슴 깊이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불행한 일이나 불길한 징조들이 보인다고 해도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사랑하심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기도의 결과가 무엇이든 우리에게 최상의 축복과 부요함을 가져다 줄 것을 믿으십시오.
비록 홍해가 이스라엘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으나 실상은 애굽을 떠나 자유의 땅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니었습니까? 
비록 요단강이 이스라엘의 앞길을 막고 있었으나 실상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길목이 아니었습니까? 
기도하면 최상의 축복과 부요함을 얻게 됨을 믿으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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