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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스려야 할 분노 (창 4: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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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스려야 할 분노 (창 4:6~12)
 
 
한 젊은 청년이 상담 받기를 원하며 쓴 글입니다. 

‘저의 원만하지 못한 성격이, 저를 마음 아프게 합니다. 저의 성격은 조그만 일에도 곧장 분노하고, 화를 내면서 고함도 지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것 때문에 더욱 괴로워하고, 후회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니 다른 사람들은 저와 가까이 하려고 하지도 않고 피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소외되기 싫어하는 성격인데도 소외되니 더욱 미칠 지경입니다.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우리는 이 청년처럼 너무 쉽게 화를 내며 함부로 말을 내뱉지는 않습니까? 때로는 예측할 수 없는 폭력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아,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데, 이런 말은 잠시 참았어야 하는데.’ 라는 후회를 할 때는 없습니까? 
 
어느 누구나 마음속에 화가 생기고, 화를 냅니다. 화를 내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보편적인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주로 어떨 때 화가 납니까? 무시를 받을 때, 버림받았다고 느낄 때, 누군가가 부당하게 대접한다는 생각이 들 때, 누군가로부터 비난받을 때, 때로는 내가 세운 목표에 미달이 되어서 좌절감을 맛볼 때, 누군가가 나의 자존심에 상처를 줄 때 화가 납니다. 
 
여러분은 화가 났을 때 어떻게 화를 풀고 계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화가 났을 때 술을 아주 많이 먹고 잠시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술은 절대로 슬플 때 드시면 안 됩니다. 화가 날 때 술을 드시면 술이 우리를 노예처럼 부리게 됩니다. 술로 화난 것을 다 풀어버리겠다는 것은 결코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화가 나면 무조건 이부자리에 들어가서 잠을 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잠을 잘 수도 없을 만큼 화가 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노래방에 가서 소리를 지르면서 화를 풀기도 하고, 스포츠를 통해서 땀을 흘리며 화를 풀기도 합니다. 
 
어떤 심리학자들은 이런 충고도 합니다. ‘네가 갖고 있는 그릇들을 때려 부숴라.’, 
‘샌드백을 가져다 그 사람 생각하면서 두들겨 패라.’ 
 
그러나 이런 방법들은 잠시 동안은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우리 마음속에 또 다른 분노를 그 위에 쌓아두게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한국 사람들은 화와 분노에 대해서 아주 민감하여 화에 대해서 잘 알고 또 이에 젖어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한국 여자들은, 화를 너무 오래 참아서 가슴앓이를 했고, 한두 번씩은 화병에 다 걸려보았다. 한국의 남자들은, 화를 어떻게 적절하게 표현할지 방법을 알지 못해서 언어폭력과 육체적인 폭력을 행사하고 그것을 행한 다음에는 가슴 아파한다.” 
  
 ‘분노’ 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분노는 우리의 기초적인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입니다. 분노한다고 반드시 악하고, 분노하지 않는다고 반드시 선하다고 말할 수 없는 감정입니다. 분노는 인간 속에 있는 어떤 감정보다 강력한 감정으로 한번 생겨지게 되면 특별히, 나와 내 이웃을 향해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노는 때때로 사람들을 폭력적인 자리에까지 이끌고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분노가 마음속에 막 솟아나올 때, 어떻게 하십니까? 
버럭 화를 내야 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충고를 마음에 새길 수 있어야 합니다. ‘객관적으로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이 분노임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으로 파악할 때까지 잠시 여유를 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화가 나면 심호흡을 하라고 합니다. 숨을 깊이 들이 마시고 내뿜는 것을 몇 번하고 나면, 어떤 화든지 조금은 가라앉게 된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화가 날 때 마음속으로 ‘하나, 둘, 셋!’ 하고 숫자를 세어보라고 합니다. 아마 우리가 버럭 화를 내는 것을 잠시만 쉬어도 그중에 절반 이상은 감소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잠시 걸으면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생각하면서 막 폭발하려는 분노에 제동을 걸 필요가 있다고 권고합니다. 

하나님은 전도서 7장 9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바라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성급한 마음과 분노는 늘 함께 가기에 성급함을 어느 선에서 단절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분노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가슴에 계속 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노를 계속 품는 것은 어리석음의 표시일 수가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분노가 있다가도 어느 순간에 이 분노를 단절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 속에 분노가 솟구쳐오를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분노라는 것 자체가 이성이 마비되는 현상이고, 때로는 내 생각조차도 끊어버리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지금 내가 화를 낼 수밖에 없는 때인가? 화를 내는 것이 지금이 적절한 것인가?’ 라고 반드시 물어봐야 합니다. 
 
이것을 잠시 쉬면서 물어보고 만약 그런 후에도 화를 낼 때라는 대답이 생기면 화를 내야 합니다. 그러나 아마 우리가 화를 내는 대부분의 90% 이상은 스스로에게 물어보면서 절제하고 통제할 수 있는 화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지금 화를 낸다고 해서 지금 처한 환경이나 처지가 달라질 것인가?’ 물어봐야 합니다. 환경이나 처지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화를 내는 것은 미련한 일입니다. 갑자기 분출하는 분노를 절제하기 위해서 이런 질문을 해야 되지만, 더 큰 위협으로 다가오는 분노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 안에 있는 화를 하나 둘 축적하는 것입니다. 마치 탑을 쌓아놓듯이 쌓아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쌓여진 분노가 폭발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오늘 성경 본문의 주인공인 가인입니다. 가인은 처음부터 분노가 그렇게 갑자기 치솟지 않았을 것입니다. 단지 처음에는 ‘하나님, 내가 그렇게 열심히 드리던 제물을 잘 받으셨는데 왜 이번 제물은 하나님께서 거절합니까?’ 하고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화가 축적되고, 축적이 되던 어느 날, 갑자기 화가 폭발해서 자기의 사랑하는 동생 아벨을 쳐서 죽이는 끔찍한 일을 벌이게 됩니다. 처음에는 아마 불쾌하고 짜증이 났던 감정이 나중에는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무시하는 것일까?’ 이런 마음이 쌓여지면서 마음속에 분개하는 마음이 일어서게 됩니다. 
‘어떻게 동생 아벨 것은 받으시고, 내 것은 거절하시는가?’ 하고 질투심이 생긴 것입니다. 그 안에 시기심이 덧붙여지고 분한 마음이 응어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마음속에 응어리가 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앙갚음하기를 원하게 됩니다. 
 
‘너 가다가 넘어져봐라, 너 하던 일 한번 망가져봐라, 네가 갖고 있었던 네 삶의 그 좋았던 것을 다 빼앗겨봐라.’ 하고 마음속에 보복하려는 마음이 생겨집니다. 이때부터 감성이 조절이 안 되고, 자기의 생각이 자기의 통제 속에 들어와 있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서 언어적인 폭력과 육체적인 폭력이 우리의 마음을 붙잡게 되면서 쏟아 나오게 됩니다. 그때 우리의 분노는 격분이 되고, 격분은 격노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의 격노는 미친 것과 같은 광분의 형태로 나타나면서 다른 사람을 향해서 상처를 쏟아내고, 자기 자신을 향하여 상처를 주는 모습으로 바뀌어 집니다. 
 
우리가 사는 우리의 사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 사회가 자꾸만 난폭해지고, 사나와지고 있다고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사랑해야 할 부부가 화가 난다고 남편은 아내에게 상처를 주고, 아내는 남편의 마음속에 절망을 주고, 드디어는 아내를 죽이고, 남편을 죽이는 일이 우리가 살아가는 땅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효도해야 할 어머니와 아버지를 때려 상처를 주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녀를 화가 난다고 죽이는 사태가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신문지상에 나타나고 있는 대부분의 사건과 사고는 대부분 이러한 ‘화’ 때문에 생겨진 것입니다. 
 
정치세계는 어떻습니까? 여야가 정책을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말꼬리를 잡고 상대방이 무너질 것을 기대하면서,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 고 어떻게 하든 상대방이 갖고 있는 인격마저도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한 기업에 노사가 원수이고 적대자들로 죽기 살기로 노사분쟁을 하면서 서로 얼굴을 붉히고 다시는 같이 일하지 않을 사람처럼 서로 다투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사회 곳곳에 그리고 우리들 속에 분노가 있습니다. 때로는 그럴 듯하게 포장하고 있지만 우리들 마음 깊은 곳에 이 분노하는 마음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분노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일까요? ‘프레드릭 뷰크너’ 라는 사람은 분노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분노란, 자기 자신의 상처를 핥고, 해묵은 불평거리에 입맛을 다시고, 다가올 잔혹한 대결에 이를 갈며, 자신이 당한 고통과 되갚아줄 고통을 최후에 한입까지 음미하고, 음미한다는 것, 어찌 보면 왕에게나 걸 맞는 향연인 셈이다. 안타까운 점은, 게걸스럽게 뜯어먹고 있는 상대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 향연의 식탁에 놓인 해골은,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종종 남을 상처 나게 하는 분노를 하며 게걸스럽게 달려가 보면, 결국 그 음식의 살은 내 살이고, 식탁 위에 놓여 있는 해골은 내 해골이라고 하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처럼 분노는 상처투성이의 자기 자신을 만들고 맙니다. 그래서 드디어는 해골의 뼈다귀만 남은 자기 파괴의 주범이 바로 분노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가인을 보면 가인의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가인이 왜 그렇게 분노했을까? 우리도 가인처럼 분노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이 어떻게 했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묻습니다. 
“가인아, 너 왜 화를 냈느냐? 네 얼굴 표정이 그게 뭐냐?” 
하나님이 그렇게 질문한 것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가인아! 한번 내게 이야기해봐라, 네가 왜 화났는지, 네가 왜 그렇게 분노하고 있는지, 네 얼굴이 왜 그렇게 일그러져 있는지!” 
 
가인은 그 순간,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화난 심정을 토해냈어야 합니다. 
우리가 화를 낼 때에, 분노가 치솟아 오를 때에 그것을 갑자기 터트리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지만 그 분노를 속에 계속해서 쌓아두는 것도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분노를 어떻게 해결해야 될까요? 
분노가 생길 때 하나님 앞에 토해내야 합니다.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왜 내 제물은 안 받으셨어요? 왜 거절했어요? 내게 무슨 문제가 있어요?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겠어요? 왜 동생 것은 받으셨어요? 저와 동생의 차이가 무엇인가요?”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 하나님과 씨름하고 하나님께 도전했어야 됩니다. 여러분, 섭섭하고 힘들고 어려운 것이 있을 때 도망가지 마세요. 하나님과 부딪히세요. 하나님께 질문하세요. 하나님께 도전하세요. 
“하나님, 어떻게 하시려고 나를 이렇게 하십니까?” 하고 하나님께 질문이 생길 때, 가인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이해하지 못해! 하나님은 나하고 상관이 없어!’ 하면서 가인은 그 자리에서 도망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화가 날 때 하나님께 물으셔야 됩니다. 어떤 것도 괜찮습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나를 화나게 만들고 질투와 분노가 가득 차게 될 때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가인은 자기 자신을 향해서 분노했어야 합니다. 만약 가인이 그랬다면 그의 분노가 창조적이고 생산적으로 바뀌어졌을 것입니다. 
 
‘나는 본래 아무 것도 아니지, 나는 피조물이지.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만 해도 감사하지. 내게 부족한 것이 있어, 내가 하나님을 대접하지 못했어.’ 라고 생각하면서 자기의 잘못된 것을 향해서 이야기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향한 분노가 솟구치면서 하나님을 거절했고, 자기 자신을 꽁꽁 닫았습니다. 
  
분노를 쌓은 그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죄가 네 문 앞에 기다리고 있다.’ 
 
사탄이 언제 우리를 무너뜨립니까? 화를 낼 때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사탄이 제일 쉽게 들어올 때가 언제입니까? 버럭버럭 화를 낼 때, 내 속에 미움으로 가득 차서 분노할 때, 사탄은 우리들에게 와서 ‘잘 왔다! 더 화내! 더! 상대방을 무너뜨리려면 더 화를 내야 돼!’ 하고 우리의 마음에 불을 지르고 있는 것이 사탄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죄가 네 문 앞에 다가오고 있다. 죄를 다스릴 줄 알아야 된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는 이 부분을 ‘must control’ 이라고 표현하면서 ‘must’ 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렇게 해야만 된다.’ 는 것입니다. 
“죄는 느슨하게 놔두면 안 된다! 분노는 네가 그것을 그쳐야 된다!” 
 
여러분, 분노가 없으신 분이 계십니까? 누구나 때로 화가 나고, 분노할 때가 있는데 우리는 그 분노를 어떻게 해결해야 될까요? 
 
첫째는 성경에 있는 것처럼 분노를 하루 이상 끌고 가지 말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화를 다 내버리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아내에게 상처 나는 말을 해서 아내의 가슴속에 못을 박는 남편들이 있습니까? 남편들의 자존심을 무너뜨리고, 남편이 갖고 있는 기개를 깨뜨리며 분노하는 아내들이 있습니까? 그렇게 사랑하던 사람이 왜 나중에 이혼을 합니까? 마음 안에 분노를 자꾸만 쌓아두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해가 지기 전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분노를 멈추는 법을 가져야 됩니다. 
 
두 번째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분노가 내 자신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스스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 분노 때문에 내가 내 자신에게 상처주지 않도록,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않도록, 분노 때문에 나도 미워하고, 상대방도 미워하는 일이 없도록 해 주세요.” 
  
하나님은 잠언 29장 1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분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억제하느니라” 
  
성경은 분노할 때마다 다 터트리는 사람을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분노를 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잠언 16장 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어떤 사람은 분노하면서 자기를 ‘나는 솔직한 사람이야.’ 라고 칭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솔직한 것이 아닙니다. 화를 내는 것은 솔직한 것이 아니라 철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화를 절제할 줄 알아야 하기에 우리는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화가 날 때 나의 연약한 점, 문제점을 하나님께 아뢰며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제 안에 잘못된 것이 있습니까? 제 안에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이 분노가 저를 성숙시키는 기회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더 거룩하게 하나님을 닮아가게 하시고, 성숙한 자리, 창조적인 자리, 변화의 자리로 바꿔주옵소서.” 
 
류시화 시인의 시집 중,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에 이런 시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짧은 시로 사실은 ‘알프레드 디 수자’의 시입니다. 
  
 “춤춰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분노로부터 자유로워야 우리가 아무 것에도 상처받지 않는 사람처럼 또 사랑을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돈 때문에만 일하지 않는 마음을 가질 때 돈이 필요하지 않는 사람처럼 내 일에 열심을 내서 일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이 내게 주신 마지막 날인 것을 생각할 때 열심히 살며 춤추고,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노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풍요로운 삶, 넉넉한 삶, 아름다운 삶이 얼마나 찌들어가고 있습니까? 이 분노를 우리 주님 앞에 맡기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의 분노와 죄악 때문에, 그 분노와 죄악을 다 가슴에 품고, 골고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분 앞에 내 분노를, 화난 것을, 섭섭한 것을 맡기세요. 그리고 기도로 주님 앞에 다 토해내세요.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사랑의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상처 난 것을 닦아줄 눈물을 우리들에게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노래하세요. 다시 춤추세요. 다시 사랑하세요. 다시 일하세요. 다시 내게 주신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우리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복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출발하세요!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조그만 것을 갖고 화를 내며 하나님을 탓하고 다른 사람을 탓하며, 우리의 일생을 일그러진 상태로 살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주님,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제는 정말 주님 앞에 모든 화와 섭섭함과 분노를 맡기며 토해내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사랑과 평안을 경험하며 이 땅 위에서 풍성하게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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