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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을 심을까? (갈 6: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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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심을까? (갈 6:6~10) 


1. 신앙농사

지난 2월 25일, <소그룹 지도자 세미나>의 강사였던 대전 제자들 교회 김동현 목사님은 “傳道는 農事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먼저 전도 대상자의 마음을 沃土로 만드는 작업을 한 후 그에게 말씀의 씨를 뿌려야 한다는 면에서, 전도자는 그 씨가 잘 자라도록 여러 가지 것을 제공해야 한다는 면에서, 그리고 무르익었을 때 구역과 교회로 인도하는 결실의 작업을 해야 한다는 면에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정말 일리가 있는 말씀이었지요.

그런데 여러분, 전도만 농사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 역시 농사와 같다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사실 성경에는 우리의 삶과 신앙생활을 농사로 비유한 말씀들이 정말 많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농부가 되셔서 우리의 삶을 가꾸어 결실을 기대하시고, 때로는 우리 자신이 자기 삶의 농부가 되어 삶을 열심히 가꾸어 결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농사를 잘 알아야 합니다. 자, 여러분!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고 하는데요. 알고 계십니까?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는 먼저 땅이 좋아야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심을 종자가 좋아야 합니다. 셋째는 정성을 다해 수고해야 하고, 마지막으로는 적당한 물과 바람과 햇빛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조건들이 충족될 때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네 가지 조건 중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땅이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묵은 땅에 난 잡초를 뽑아내고 그것을 갈아엎음으로서 공기가 잘 통하는 부드러운 밭으로 만든 후에 씨를 뿌려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옛 조상들은 밭갈이를 잘하는 농사꾼을 제일로 쳐 주었다고 합니다. 성경 말씀 역시 농사를 잘 짖기 위해서는 먼저 땅을 갈고 기경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특히 예레미야 4장 3절과 호세아서 10장 12절 말씀이 대표적입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와 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이 두 구절에서 묵은 땅을 “간다”는 말과 “기경한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원래 이 말의 의미는 ‘박살내다’입니다. 그러니까 묵은 땅을 박살내듯이 갈아엎어야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을 향하여 “갈아엎어야한다”, 혹은 “기경해야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의 상태가 어떻다는 말입니까? 그들의 상태는 “묵은 땅”과 같았습니다.

2. 묵은 땅

묵은 땅이란 어떤 땅입니까? 辭典的으로는 ‘일구지 않고 쓰지 아니하여 묵어 있는 땅’을 의미합니다. 즉 ‘농사하지 않는 땅’, ‘노는 땅’, ‘버려진 땅’입니다. 요즈음은 도시 근교로 조금 만 나가도 농사를 짓지 않아 묵은 땅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땅은 잡초가 우거지고, 가시덤불이 여기저기 보이고, 쓰레기까지 쌓여 있습니다. 왜 주님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그리고 오늘 저와 여러분을 향해 “너희 묵은 땅을 갈아라 … 기경하라”고 말씀하실까요?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영적인 상태와, 삶의 현실이 묵은 땅과 같기 때문입니다. 어떤 모습이 묵은 땅과 같습니까? 그저 편하게만 신앙생활하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져 자신이 옛날에 가졌던 열정이나 헌신만을 추억하거나 자랑한다면, 그리고 지금까지 열심히 했으니 ‘그 정도면 충분하다’면서 스스로 자족하여 현재에 안주한다면, 또 미래와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그리고 주위 사람들과 세상에 대한 복음적인 애정이 없다면, 바로 그런 모습이 묵은 땅이라는 증거입니다. 

교회도 묵은 땅이 될 수 있습니다. 역사와 전통이 있고 무난하게 성장한 교회일수록 묵은 땅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피터 와그너 교수는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기간은 길면 30년이며 …, 그 다음에는 대부분의 교회가 停滯되거나 減少되고 나중에는 生命을 잃어버린다”고 주장했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설교 중에, ‘25년 전 미국의 10대 교회가 지금 10대 교회 그대로 남아 있는 교회는 불과 2개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나머지 8개는 다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미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버렸다고 합니다. 불과 25년 사이에 말입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별 어려움 없이 성장하다가 어느 지점에서 그것에 만족하고 거기에 머물러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잡초, 즉 非福音的인 것들이 교회 안에 자라게 되었고, 교인들은 자연스럽게 교회 밖으로 떠밀려나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묵은 땅입니까? 아니면 잘 開墾된 沃土입니까? 좋은 땅은 은혜로 촉촉이 젖어 있는 땅, 말씀을 잘 흡수하는 땅, 기도와 전도와 헌신으로 거름을 주는 땅, 그리고 감사와 찬양의 바람이 부는 땅, 그래서 좋은 열매를 많이 맺는 땅입니다. 그러나 묵은 땅은 말씀과 기도가 없는 땅이요, 영적 재생산이 없는 땅이요, 매사에 감사가 없고, 불평과 원망이 많습니다. 그런 묵은 땅은 빨리 갈아엎어야 합니다. 

외부로 나가는 모든 편지를 검열하는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가 아내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당신이 없으니 너무 힘들어요. 밭에 감자를 심어야 하는데 일할 사람이 없어요.” 아내의 편지를 받은 죄수는 다음과 같이 답장을 보냈습니다. “여보, 우리 집 텃밭은 어떤 일이 있어도 파면 안 되오. 거기에 내가 총과 많은 금괴를 묻어놓았기 때문이오.” 며칠 후, 아내에게서 다시 편지가 왔습니다. “여보, 큰일 났어요. 수사관들이 여섯 명이나 들이 닥쳐서 다짜고짜 우리 텃밭을 구석구석 파헤쳐 놓았어요.” 그러자 그 죄수는 즉시 답장을 보냈습니다. “이제 됐소. 얼른 감자를 심어요.” 

여러분, 이 이야기처럼 누군가 우리의 밭을 대신 갈아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어느 누구도 대신해 주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밭을 일구어 신앙의 씨, 삶의 씨를 뿌릴 준비를 할 사람은 오직 여러분 자신입니다. 이 봄에 여러분의 영혼과 삶의 밭을 갈아 옥토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3. 무엇을 심을까?

그렇다면 여러분, 그렇게 갈아엎은 땅에 무엇을 심어야 합니까? 이 역시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흔히 “땅은 정직하다”고 말합니다. 심은 대로 나고 거두게 하니까요. 세상의 토지가 정직한 것처럼 우리의 영혼이라는 땅, 우리의 삶이라는 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우리의 영혼에, 우리의 삶에 무엇을 심어야할까요? 한 여론 조사기관에서 우리 국민 천 명에게 ‘올 한해 이루고 싶은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20대, 30대, 40대, 50대가 각각 다르게 답을 했습니다. 20대는 ‘자기 개발을 더 많이 했으면 좋겠다.’ 30대는 ‘돈을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 40대는 ‘수입이 늘고 자녀 교육이 잘 됐으면 좋겠다.’ 그런데 50대는 ‘더 건강해 졌으면 좋겠다.’ 라고 함으로서 자기 개발이나 돈보다 건강을 우선으로 여겼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사람들은 각자 자기 나이와 형편에 따라 심고 거두고 싶은 것이 다 다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인 여러분은 무엇을 심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이 그 답을 주고 있습니다.

1) 성령을 위하여 심으라!

6절 말씀,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이 말씀에 따르면, 여러분이 심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육체를 위한 것’, 즉 ‘육체적인 것’이며, 둘째는 ‘성령을 위한 것’, 즉 ‘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결론부터 말하기를 ‘육체를 위한 것’, ‘육체적인 것’은 심어봐야 썩어서 없어질 것이고, ‘성령을 위한 것’, ‘영적인 것’은 영원히 지속되니 그것을 심으라고 말씀합니다.

‘육체를 위한 것’, ‘육체적인 것’을 심는다는 것은 하나님 없는 삶을 의미합니다. 곧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하나님 노릇을 하며 산다는 의미이죠.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밭에 자기 計劃과 熱情 만을 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 일을 합니다. 자기의 만족을 위하여 사는 것이죠. 또한 세상 것에 목적을 두고 삽니다. 그렇다 보니, 그가 심고 기대하는 모든 것은 세상에서 잘되고 세상에서 富饒해지는 쪽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사람은 말씀의 인도보다는 자기의 생각대로 행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사는 것의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6절, “육체를 위하여 심은 자는 육체로부터 썩을 것을 거둔다!” 무슨 말입니까? 그렇게 열심히 악착같이 심었으나 그 모든 것들이 다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러니 성도는 당연히 영적인 것, 성령의 것을 심어야 합니다. 영적인 것, 혹은 성령의 것을 심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첫째로 성령에게 자신의 삶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성령은 여러분을 너무나 잘 압니다. 여러분의 弱點이 무엇이고 强點이 무엇인지 잘 압니다. 그리고 성령은 여러분을 强壓的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결단하고 믿음으로 행하기를 기다리시죠.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면서도 돕는 자, 조력자로 여러분 곁에 계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모든 것을 자기에게 맡겨주기만 하면 그 다음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여러분에게 일어나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 여러분의 삶을 맡기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에게 풍성한 열매를 주실 것입니다. 

어떻게 삶을 성령께 맡길 수 있습니까? 성령께 자신의 삶을 맡기는 것은 세상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성령님께 자신의 삶을 맡기는 사람은 항상 기도할 수밖에 없고, 말씀을 가까이 할 수밖에 없으며, 자기 뜻과 방법을 버리고 철저히 믿음으로 살려고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영적인 것, 성령의 것을 심는” 삶입니다. 아직도 자기 목표와 주관과 계획이 말씀과 기도보다 앞서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삶을 오직 성령님께 맡기고 그 분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영적인 것을 심는 삶입니다. 

 “영적인 것, 성령의 것을 심는다”는 말씀의 두 번째 의미는 갈라디아서 5장 22, 23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성령의 열매와 관련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의지하여, 사랑을 심고, 희락을 심고, 화평과 오래 참음 등을 심으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사랑을 심으면, 사랑의 열매를 거둘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랑을 주님과 사람들로부터 받게 될 것이고, 더 크고 위대한 사랑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和平을 심으면, 원수가 친구로 변하는 열매를 거둘 것입니다. 여러분이 慈悲를 심으면, 힘들 때 여러분에게 다가와 친구가 되어주는 사람이 많을 것이고,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친절한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다른 성령의 열매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성실한 농부는 아무리 날씨가 좋지 않아도 씨앗 심는 시기를 놓치지 않습니다. 혹시 비가 오지 않을지라도 제 시기에 씨앗을 심고 물을 뿌려 씨앗의 싹틈을 돕습니다. 그처럼 바로 지금이 여러분의 播種期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봄, 여러분은 성령님에 관한 씨앗을 심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의 밭, 영혼의 밭에 영적인 씨앗을 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속지 않으시고, 또 우리를 속이지도 않습니다. 즉 심은 그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그러니 성령의 것을 심어 성령의 열매를 거두되, 30배, 60배, 100배로 거두는 여러분의 올 한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2) 선행을 심으라!

이어서 오늘 본문은 여러분이 두 번째로 심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9절, 10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기회가 생길 때마다 모든 사람에게 착한 일, 선행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선행, 착한 일은 기독교만 하라고 강조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요? 불교, 이슬람교, 유교, 힌두교를 막론하고 세상 모든 종교는 “선을 행하라”고 가르칩니다. 착하게 살고, 어려운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며 살라고 가르치죠. 또한 세상 모든 도덕과 윤리도 “선을 행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가르침은 그 모든 것들과는 다릅니다. 그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본문 9절에 나오는 “선(칼론)”은 ‘윤리적인 아름다움’이며, 10절에 나오는 “착한(아가돈)”은 철저하게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단어입니다. 즉 선행이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선한 행동’을 뜻하는데, 성도의 선행은 그 정도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거기서 더 나아가 물질적인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삶이라는 것, 그리고 거기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는데, 바로 그것이 기독교의 선행과 착한 행실이 다른 종교와 차이가 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선으로 인한 고난”입니다. 

즉 성경이 말하는 선행, 착함은 ‘남을 도와준다, 베푼다’ 정도가 아니고, ‘남이 곤경에 처했을 때 그 곤경 속으로 들어가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도와주는 것’이며,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그 사람으로 인하여 고난을 감수하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선행과 착한 행실은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의 고난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대신해주는 것입니다. 성도는 어려운 사람을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보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단지 그 사람의 문제일 뿐이다’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아무도 고난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도 아픔을 겪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원치 않는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여러분 주변에 있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그 사람을 대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번에 서울 시장 선거에 나선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은 자신의 著書 「사랑의 정치」에서 “정치의 출발점은 사랑”이라는 정치 철학을 표현했습니다. 그는 “함께 울어줄 수 없다면, 눈물을 닦아줄 수 없다면, 대신 울어줄 수 없다면, 그건 정치가 아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정치하지 마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말이지 않습니까? “함께 울어줄 수 없다면, 눈물을 닦아줄 수 없다면, 대신 울어줄 수 없다면, 그건 신앙이 아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信仰人이라 말하지 마라!” 

그래서 오늘 본문과 성경 여러 곳에서는 주고, 나누고, 베푸는 삶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주면 손해보고 축나는 것처럼 생각하지요. 그러나 주 안에서는 그만큼 확실한 투자도 없습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에는 도적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눅 12:33).” 그리고 주님께서 더 크고 놀라운 것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작은 자에게 준 냉수 한 그릇도 잊지 않고 갚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 19:17).” 하나님께서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갚아 주실 것입니다(눅 6:38).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 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잠 25:21-22)”라는 말씀처럼 원수에게까지 착한 일을 하여야 합니다. 

이사야 58장 7절에서 11절,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하나님께서 베풀고 나누는 성도에게는 그가 주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 갚아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성도 여러분, 계산하지 말고 베푸십시오. 보상을 바라지도 마십시오. 여러분이 베푸는 그들로부터는 되돌려 받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냥 베푸는 것으로 끝나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 보시고 아시는지라, 그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나눠주라’ 하면 나누고, ‘심으라’ 하면 착한 행실을 심으시기 바랍니다. 

원수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착한 일을 해야 하니, 같은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들은 여러분의 형제요 자매입니다. 서로 짐을 나누어지고, 어려움과 아픔을 나누며, 그리고 사랑을 베풀 때, 하나님은 더 풍성한 것을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나는 가진 것이 없어 줄 것도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아무 것도 없어도 위하여 기도 할 수는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사랑을 나눌 수도 있습니다. 

옛날, 충청도 어느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이 친구를 따라 교회 부흥회에 참석했습니다. 그 날,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고,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즐겁게 드리는 사람은 100배의 축복을 받는다는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 설교가 자기 들으라고 하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가자 말자, 집을 팔기로 하고 살려는 사람으로부터 쌀 두 가마니를 미리 받았습니다. 다음 날, 그 쌀 두 가마니를 교회에 드리면서 ‘200 가마니를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제 집을 팔았기 때문에 이사를 가야 하는데, 갈 데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자기 집을 산 사람이 이사를 못 오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 사람이 점쟁이에게 갔더니 그 점쟁이가 그 집은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쌀 두 가마니는 공짜로 받아 하나님께 드리고 자신은 자기 집에 그대로 살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경험한 이 분은 그때부터 더 열심히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복을 얼마나 주시는지! 나중에는 이 분이 그 동네 땅을 거의 다 샀고, 그 동네에 중고등학교를 세우는 등 놀라운 하나님의 큰 복을 누렸다고 합니다. 

이제부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어려운 이웃들에게, 그리고 형제자매들에게 즐거이 착한 일을 행하여 주님으로부터 30배, 60배, 100배로 돌려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4. 좋은 것 심어 풍성한 수확을! 

말씀을 맺겠습니다. 

봄을 맞아 주님은 먼저 여러분의 밭을 기경하라고 하십니다. 묵은 땅을 沃土로 만드는 일부터 시작하라는 것이죠. 옛날 우리 조상들은 농사꾼을 “上農, 中農, 下農”으로 구분하여 불렀는데요. “上農”은 밭갈이를 잘하는 농사꾼을 말합니다. 그들은 봄에 씨를 뿌리기 전에 먼저 땅을 비옥하게 가꾸기 위해 논과 밭을 갈아 둡니다. 그 다음에 씨를 뿌리죠. 그래서 상농에게는 삯도 많이 주고 대우도 잘 해주었습니다. “中農”은 곡식 자체를 잘 가꾸는 농사꾼을 말합니다. 

그들은 때를 맞춰 김매기도 하고 가뭄과 홍수를 만나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열심히 관리합니다. 그리고 “下農”은 미리 밭을 갈아 옥토로 만들지 않고, 씨도 제대로 뿌리지 않으며, 빈둥빈둥 놀다가 뒤늦게 와서 삯이나 받으려고 하는 게으른 농사꾼을 말합니다. 이런 下農은 어느 누구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하고 대접도 받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농사꾼이 되고 싶습니까? 봄을 맞아 열심히 삶의 땅, 영혼의 밭을 起耕하여 沃土로 만드는 칭찬받는 농부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먼저 땅을 기경’한 후, 그 다음은 거기에 ‘무엇을 심을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무엇을 심어야 합니까? 육체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은 아무리 심어봐야 다 썩어 없질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영적인 것, 성령의 열매를 심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선행과 착한 행실을 심으라”고 하셨습니다. 가라지를 심고 보리나 쌀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惡習을 심고 高邁한 인격의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시기와 증오를 심어놓고서는 우정과 사랑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中傷과 謀略을 심고서는 선으로 돌려받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남을 무시하고 멸시해놓고서 존경받기를 기대한다면, 탱자를 심어놓고 감귤을 기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게으른 사람이 성공을 기대하는 것은 심지 않은 밭에서 곡식을 기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본문 7절에서 주님을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스스로 속이지 마십시오. 사람은 속일 수 있으나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 이것은 자연의 鐵則이요, 하나님의 法則입니다. 

삶은 종자를 심고 거두는 것과 같습니다. 봄을 맞아, 지금 심어야 오는 가을에 거둘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금년에 심고 내년에 거두거나, 아니면 3년, 5년, 혹은 10년 후에 거두기도 합니다. 또 靑年 때에 심고, 老年 때에 거두며, 父母가 심은 씨앗을 子孫들이 거둘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今生에 뿌린 씨를 來生에서 거두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 심든지 반드시 거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봄에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영적인 것, 성령의 열매를 심으시고, 선행과 착한 행실을 여러분의 삶의 밭, 영혼의 땅에 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나중에 그것을 30배, 60배, 100배로 거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씀대로 심고 뿌리는 사람은 그 인생 농사, 가정 농사, 직장과 사업 농사도 더불어 잘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이 모든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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