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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으로 살아야 기쁘시게 합니다 (욜 2:28~30, 롬 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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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으로 살아야 기쁘시게 합니다 (욜 2:28~30, 롬 8:5~8)


서로 던져 주고받는 놀이기구인 플라스틱 원반인 프리스비 제조회사인 왬오에서 1990년 아프리카 앙골라의 고아원에서 사역하는 수녀에게 7천 개의 프리스비를 보냈습니다. 이 회사의 사장 존 보우즈는 얼마 후에 이런 답신을 받았습니다. “보내주신 접시들은 훌륭합니다. 우리 모두 거기에 음식을 담아서 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아이들이 일종의 게임으로 그것을 던지고 있습니다. 당신에게도 좋은 아이디어가 될 것 같습니다”. 프리스비의 원래목적이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되면서 원래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마치 굉장히 신기한 것을 발견한 것같이 느껴진 모양입니다. 
  
원래의 목적이 변경되어 자기들 마음대로 그 도구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이런 잘못을 범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의 모든 것은 영적 도구입니다. 영적인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육체마저도 영적 도구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육체를 육적인 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육체를 쾌락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육적인 목적이 앞서 있습니다. 
  
로마서 1:27에는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순리대로 자신의 육체를 쓰지 않았습니다. 28절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라고 합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육체를 비정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창조를 모두 마치신 후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혼돈과 흑암을 질서와 빛으로 바꾸셨습니다. 사람을 살아있는 영으로 만드셨습니다. 질서와 빛은 영입니다. 혼돈과 흑암은 육입니다. 질서와 빛은 선입니다. 혼돈과 흑암은 악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살아있는 영으로 만드셨으므로 사람이 살아있는 영으로 살아야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으로 살아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영으로 살아야 자신에게도 만족을 줄 수 있고 행복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진노, 주의 진노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탄하사 근심하시기도 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들이 보시기에 좋지 않습니까? 영으로 만든 사람이 육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6:3에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는 실패가 없습니다. 사람을 지으신 것도 완전한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사람들이 죄를 범하고 육체가 되었기에 하나님의 실패작이 아닙니다. 사람에는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인간이 그 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죄를 지은 것이고 타락하여 쫓겨난 것입니다. 민수기 23:19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15:11에는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라고 하십니다. 35절에는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고 합니다. 사울이 하나님을 공경하던 영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보다 사람에게 의존하고 육체의 사람이 되므로 하나님이 후회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이 후회하십니까? 영의 사람이 육의 사람이 될 때에 하나님은 후회하십니다. 육의 사람이 되었다는 말을 공동번역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등을 돌렸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등을 돌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리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 8절에는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육신에 있는 자들이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의 사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므로 기쁘시게 못합니다. 

6절에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라고 합니다. 7절에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라고 합니다. 육신을 좇는 자와 영을 좇는 자, 육신 일과 영의 일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육신과 영의 대결을 말합니다. ‘육신을 좇는 자’란 육신을 위해 모든 목표를 세우며 그것을 추구하는 자입니다. ‘영을 좇는 자’는 하나님을 위해 목표를 세우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자입니다. 
  
육신의 생각이란 가장 깊은 사고의 원천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육신이란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생각 곧 자기중심적인 생각만 나오는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전형적 인간의 모습을 말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육적인 것만을 추구하게 되며 하나님과 친구가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육신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에 속한 자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을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우리 속에는 반대쪽으로 서로 끌어당기는 두 마리의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두 세계로 끄는 힘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그 가운데 끼여 있습니다. 우리는 진창에서 뒹구는 천사요, 날기를 시도하는 포유동물입니다. 우리 안에는 항상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는 법이며 영과 육의 싸움이 끊이지 않습니다.  
  
알렉산드로 솔제니친은 ‘수용소 군도’에서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은 국가의 경계를 긋는 것도 정당의 차이를 보여주는 선도 아니다. 그 선은 우리 모두의 마음에 그어져 있다”고 하였습니다. 영과 육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의 생각과 육체의 생각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영을 추구하지 않고, 육을 추구하는 것도 마음에 있습니다. 마음에는 영이 있어야 하는데 육이 있는 것이 문제이며, 인간의 죄인된 모습입니다. 
  
잠언 6:16-19에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이 무엇입니까? 육신적인 일입니다. 영적인 일이 아닌 일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요즘 신조어를 보면 신체부위를 가지고 만든 말들입니다. 꿀을 발라놓은 듯한 허벅지라고 ‘꿀벅지’라고 합니다. 밴쿠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이상화선수에게 이 별명을 붙였습니다. 아름다운 골반이라는 뜻의 ‘황금 골반’이란 신조어도 있습니다. 초콜릿 복근(초콜릿처럼 생긴 복근이라고 하여 ‘초콜릿 복근’이란 말도 있습니다. 얼짱, 몸짱, S라인 등은 이미 잘 알려진 말들입니다. 외모지상주의와 웰빙 열풍이 맞닿아 몸매에 관련한 신조어가 부쩍 늘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육체의 삶에 지나치게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들을 염려하면 하나님이 좋아 하시겠습니까? “날 어떻게 보고 그런 걸 가지고 염려하지?” 하시지 않겠습니까? 이런 인간적인 염려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얼마 전 ‘타임’지에 타이태닉(Titanic)과 ‘루시타니아’(Lusitania)를 비교하는 글이 실렸습니다. 1912년 4월 14일, 타이태닉은 빙산에 충돌하여 2,207명이 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68.7%가 죽었습니다. 1915년 5월 7일, 루시타니아는 독일 잠수함 어뢰에 맞아 1,949명이 타고 있었는데 67.3%가 죽었습니다. 두 배가 다른 점은 타이태닉은 배가 가라앉는데 2시간 40분이 걸렸습니다. 루시타니아는 어뢰에 맞은 지 18분 만에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타이태닉은 천천히 가라앉았기 때문에 승객들이 이성적, 신사적 행동을 하였습니다. ‘타임’에는 ‘socially determined behavior’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급속도로 가라앉은 루시타니아의 승객들은 동물적, 본능적 행동을 했습니다. 인간에게 동물적 본능만 남는다면 동물보다 더 못하게 됩니다. 이런 동물적 본능으로는, 육체적 생각만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늑대는 그 이빨을 잃어도 성품은 잃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품이 변화되지 못하고 육체만 가지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2:2에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합니다. 육적인 생각이 영적으로 변화를 받아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알게 됩니다. 정채봉씨는 생선이 소금에 절임을 당하고 얼음에 냉장 당하는 고통이 없다면 썩는 길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이런 육체적 고통을 외면한다면 육체적으로만 살게 되고 이런 삶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삶이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둘째,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므로 기쁘시게 합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합니다. 영의 생각이란 영에게서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생각이 나온다는 뜻입니다. 영의 생각을 가진 자는 오직 영의 일만을 좇게 됩니다. 그래서 영의 생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영의 생각이 왜 생명입니까? 영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고 합니다. 영의 생각이 왜 평안입니까? 영이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합니다. 평안은 성령 때문에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전혀 기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는 행위에 기초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원리대로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나무의 원리 안에 거하는 삶을 원하십니다. 선악을 아는 율법적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생명나무의 원리는 은혜이며 영의 삶이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오래 전 1970년 초반에 저의 형님이 미국에 갈 때에 저의 선친께서 삼형제를 모이게 하셨습니다. 선친께서는 아들은 아버지의 유업에 대한 책임이 있는데 둘째가 아버지를 이러 목사가 되겠다니 고맙다고 하시며 목사는 돈을 버는 직업이 아니니 첫째는 동생을 잘 챙겨주고, 셋째는 사업을 한다니 돈을 많이 벌어서 형을 도와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못 받았습니다. 성직은 영의 생각입니다. 저도 인간의 생각으로 목사가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의 생각은 아버지를 기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영의 생각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인생에서 육의 일이 필요 없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육의 일이 필요하지만 육적인 일에만 빠져 살고 영적인 생각이 없으면 안 됩니다. 물질이 중요하지만 물질 중심의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아닙니다. 삶의 지식이 있어야 하지만 지식적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율법이 필요하지만 율법적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구약성경은 혼인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결혼한 사람은 군대에도 보내지 않고 가정에 충실하게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7:32에서 바울은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라고 합니다. 장가든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아내를 기쁘게 할까 라고 합니다. 시집간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남편을 기쁘게 할까 라고 합니다. 무엇이든 하나님보다 앞서고, 영적인 삶 보다 앞서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우리도 하나님 영, 그리스도 영으로 옷 입혀졌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옷 입는 것은 우리가 부활의 몸, 신령한 몸을 입을 사실에 대한 보증입니다. 신령한 몸을 입으면 더 이상 슬프게 할 일이 없습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며 평안입니다. 영을 입어야 생명을 얻으며 평안을 얻습니다. 
  
에스겔 37장에는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골짜기의 마른 뼈들은 생기가 들어가기 전에는 무력한 뼈였습니다. 그러나 마른 뼈에 생기가 들어가니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흩어진 마른 뼈는 보잘 것 없는 뼈입니다. 그런데 “내가 생기를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고 말씀하시고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붙어서 살아나게 하라”고 명령하실 때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라”고 합니다. 생기는 ‘루아흐’ 즉 영입니다. 영이 없으면 그냥 뼈이지만 영이 들어가면 큰 군대가 됩니다. 영이 들어가야 힘이 생깁니다. 꿈이 생깁니다. 활력이 생깁니다. 영이 들어가야 생명이 있습니다. 평안이 있습니다. 영이 없으면 아무리 많은 뼈라고 하더라도 무기력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마른 뼈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6:1에는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신령한 너희는”이란 말은 우리말 성경에는 “영의 사람인 여러분은”이라고 번역합니다. 영의 사람은 하나님의 숨이 있는 사람입니다. 영의 사람은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입니다. 영의 사람은 영적 훈련을 하는 사람입니다. 

  결론 

“인생을 살다보면 날뛰는 황소의 꼬리를 잡아서 그 상황에 직면해야 할 순간이 반드시 있다”고 합니다. 황소 꼬리 잡지 말고, 하나님의 손을 잡는 훈련을 하세요. 보화를 캐는 지혜를 가지세요. 세상의 것을 잡으려고 버둥거리지 말고 영의 것을 제대로 잡아야 합니다. 든든하고 불변하고 안전한 것은 하나님의 손입니다. 영으로 살아야 하나님의 손을 잡습니다. 영적인 생각을 합니다. 
  
요엘 2:28에는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라고 합니다. 사도행전에는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말세에”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를 말합니다. 성경은 종말의 현상을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라고 합니다. 요즘이 말세입니까? 말세에는 영이 아니면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숨결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고 우리가 살아 숨 쉬는 것이 하나님께는 기쁨이 됩니다. 살아있는 영으로 지음 받은 우리들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의 원수가 되지 말고 영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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