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마음대로 살고 싶다고요? (눅 15:11~13)

  • 잡초 잡초
  • 234
  • 0

첨부 1


마음대로 살고 싶다고요? (눅 15:11~13)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돌아온 탕자’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빛의 화가’라고 불리는 렘브란트가 생애 후기(1669년경) 에 그린 그림입니다. 술과 여자 등으로 자기 영혼을 만족시키려 했던 둘째 아들이 결국 몸과 마음이 병든 탕자가 되어 돌아온 순간을 렘브란트는 그렸습니다.(현재 러시아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렘브란트는 자신을 그림 속에 그려 넣기를 좋아하였습니다. 특히 성경의 사건을 그릴 때 자신을 그려 넣기를 좋아했습니다. 이 작품에도 자신을 탕자의 모습으로 그려 넣었습니다. 그는 살아가면서 여러 번 커다란 불행을 겪고 절망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탕자로 그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는 돌아갈 하나님이 계시다는 희망의 빛을 작품에 담아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개의 비유가 있습니다. 잃은 양을 찾은 목자 비유, 잃은 은전을 찾은 여인 비유, 그리고 잃은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세 가지 모두 잃은 것을 찾고 기뻐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들을 통하여 잃은 것을 찾은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잃어버린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말씀하십니다. 비록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리는 세리와 죄인들일 지라도 그들이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행복입니다. 
   
우리는 전도 축제, 해피데이 530을 준비하며 먼저 ‘탕자의 비유’를 주일 예배 본문으로 몇 주일 읽으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기쁨에 대해 생각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은 흔히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또는 ‘탕자의 비유’라고 불리지만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 비유’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 둘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둘째가 아버지에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를 멀리 떠나가 허랑방탕하였습니다.

우리가 먼저 생각하려고 하는 둘째 아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 아들은 어떻게 탕자가 되었습니다. 

I. 아들

12절 첫 번째 구절 말씀입니다.
   :12a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둘째가 아버지를 찾아와 ‘아버지여’라고 합니다. 얼마나 흐뭇한 모습입니까? 아들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정겹습니다.
   
이 비유에는 아버지라는 말이 특히 자주 등장합니다. 12, 17, 18, 20, 21, 22, 27, 28, 29절에 우리말로 무려 20번(헬라어 성경은 12회)이나 ‘아버지’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것은 비유의 중심인물이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것을 말합니다. 
   
1. 아버지에서 출발합니다.
   
아버지는 모든 것의 출발점입니다. 특히 하나님 아버지는 모든 것의 근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모든 것이 나왔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모든 것이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의 근원이십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해서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칭얼대며 아버지를 부르는 아이도 있습니다. 공연히 떼쓰기 위하여 아버지를 찾는 아이도 있습니다. 얄미우리만큼 자기 필요할 때만 아버지께 나오는 아이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때에 하나님 아버지를 부릅니까?

오늘 말씀에서 둘째 아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다시 12절 첫 번째 구절 말씀입니다.
   :12a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이 아들은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자신에게 돌아올 분깃을 요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분깃’[mevro"/메로스]은 글자 그대로 하자면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지역을 말합니다.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몫을 달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아버지의 모든 것이 자신의 재산입니다. 단 아버지의 지도와 감독 아래서 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께 간섭받기 싫다는 것입니다.
   
2. 아버지에게서 독립하기를 원합니다.
   
‘독립’이라는 단어는 자유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지난 주간에 3.1절 기념예배를 드리면서 얼마나 가슴이 벅찼습니까? 부당하게 정치적으로 억압당하지 않고, 경제적으로 속박당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권리입니다. 자유를 갈망하는 것은 고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마음대로 살아도 좋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둘째의 문제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가 진짜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13절 첫 번째 구절 말씀입니다.
   :13a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여기에서 ‘먼 나라에 가’라는 말을 주의 깊게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서 ‘갔다’[ajpodhmevw/아포데메오]는 말은 ‘먼 나라로 가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라’[cwvra/코라]는 말은 두 장소나 경계 사이에 있는 공간을 가리킵니다. 역시 떨어진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먼’[makrov"/마크로스]이라는 말은 가려면 긴 시간이 걸리는 멀리 떨어진 것을 가리킵니다. 서로 멀리 떨어졌다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둘째가 아버지에게서 얼마나 아주 멀리 떠나기를 원하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둘째는 재물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로 갔습니다. 이제까지의 모든 끈을 끊어버리고 할 수만 있으면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갔습니다. 
   
3. 아버지에서 멀리 떠났습니다.
   
둘째가 갈구했던 독립은 아버지의 재산을 마음대로 처리하려는 욕심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아버지가 생존해 있을 때 재산을 물려받았다면 그것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었습니다. 상속받는 재산으로 이익을 남겨도 아버지에게 돌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둘째는 아버지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챙기기 위하여 멀리 떠났습니다. 아버지의 품에서 멀리 떠났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나는  죄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타락한 인간이 누리려는 자유의 속성이 얼마나 천박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권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욕심을 채우려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고상하게 이야기하지만 욕심에 사로잡혀있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더욱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려는 것이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단지 더 많은 것을 원하고, 더 넓은 것을 원하고, 더 좋은 것을 원한다면, 그리고 그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바로 타락한 둘째가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하나님 안에서의 참 자유를 누리기를 소원합니다.

결국 둘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13절 두 번째 구절 말씀입니다.
   :13b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여기서 ‘허랑방탕하다’[ajswvtw"/아소토스]는 말은 구원에 합당치 않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아들로써 합당하지 않게 무절제하고 방탕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력이 없는 곳으로 가서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였습니다. 
   
4. 아버지와 관계없이 살아갑니다.
   
그는 아버지의 마음에 무관심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아버지와 관계에는 무관심하였습니다. 아버지와 친밀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몰랐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는 재산을 얻고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람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일찍이 호세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고. 하나님께서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닙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물보다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라셨습니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달라고 하십니다. 
   
둘째의 문제는 아버지에게서 벗어나 자신의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영향력이 없는 곳으로 가서 아버지와 관계없이 살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죄인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벗어나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적인 복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는 관심조차 가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 있는 탕자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곳에 사람의 행복이 있습니다. 자신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라도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 하나님의 기쁨을 자신의 행복으로 누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의문이 드는 것이 있습니다. 둘째 아들의 태도는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아버지가 하신 일에 의문이 듭니다. 왜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를 들어주었을까요? 아버지가 왜 그렇게 하였을까요?

II. 아버지가

12절 두 번째 구절 말씀입니다.
   :12b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둘째의 요구에 대한 아버지의 반응을 아주 간결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재산을 요구하는 둘째에게 뿐만 아니라 첫째에게도 각각 재산을 나눠주었습니다. 재산을 갈라 두 아들에게 나누어주었다는 것이 문제일 수는 없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아버지를 떠나 재산을 챙겨서 집을 나간 둘째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둘째가 그렇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아버지가 미리 알고도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면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아들이 재산을 정리하여 집을 나가도록 그냥 두었다면 아버지에게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아버지와 자식의 이야기라면 아버지가 몰라서 그렇게 하였다고 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와 인간들의 문제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아시면서 그냥 두셨느냐는 것입니까? 모른다면 몰라서 그랬다고 하겠지만 알면서도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잘못될 것을 아셨다면 아예 허락지도 말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죄 지을 자유까지 허락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이것은 시험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왜 선악과를 만드셔서 인간을 타락하게 하셨느냐는 오래된 질문이기도 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6-17)고. 그런데 유혹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그것을 먹는 날에는 그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유혹이 있다는 것은 누구의 잘못입니까?
   
학교에서 학생들이 시험을 치렀습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유혹에 빠져서 부정한 행위를 하여 처벌받았습니다. 그것은 학생의 잘못입니까 아니면 학생이 유혹에 빠질 수도 있는 시험 제도를 둔 학교 당국의 잘못입니까? 학교에서는 시험을 통하여 학생들의 실력을 기르기 원하였지만 학생이 유혹에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40년간 방황하게 하신 것에도 이유가 있습니다(신 8:2). 그것은 그들을 낮추시고 시험하여 그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알려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로봇으로 짓지 않으셨습니다.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우리들에게 유혹거리가 있는 것은 넘어지게 하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험에 통과하여 더욱 성숙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더욱 성숙한 인격으로 나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2. 이것은 훈련일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 중 잘못된 선택으로 광야에서 40년간을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을 통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하셨습니다. 이 과정 중에 하나가 만나를 먹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 하셨습니다(신 8:2).
   
아버지는 아들이 요구하는 것을 허락하여 아들을 훈련하기를 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는 것을 우리의 삶에 허락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이런 훈련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는 것을 떼를 쓰며 억지로 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은 우리에게 허락하셔도 고생입니다.
그러나 훈련이 있다면 통과하여 정금같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 이것은 방임일 수 있습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고 400년 동안 왕이 없었습니다. 대신 필요한 일이 있을 때만 군대를 소집하거나 재판하는 일을 하는 사사들이 백성들을 다스렸습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는 사무엘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의 시대에 백성들이 사무엘을 찾아와서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이때, 사무엘은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헌데 사무엘이 이 문제로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나님은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고 말씀하셨습니다.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는 것은 사무엘을 거부하는 것이자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백성의 요구를 들어주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하나님께도 적용되는 듯합니다. 하나님의 깊은 뜻이 무엇일까 의아하기도 합니다. 백성들의 요구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것을 그냥 버려두셨다는 뜻에서 방임적 허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대로 더러움에 살도록 내버려주시기도 하십니다(롬 1:24).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하려고 하는 일을 강제로 막지 않으시고 그대로 두시기도 하십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막지 않으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허락하신 것이라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려고 하는 것을 하도록 버려두시기도 하십니다.

세상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지만 하나님께 버림을 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간섭 속에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4. 이것은 심판일 수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 중에 자신은 아무리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는데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은 기도도 하지 않는데 척척 이루어진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몹쓸 짓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조롱하듯이 태평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모든 것이 축복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욕심대로 버려두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성경은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1:28)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두셨습니다.
   
사람들의 잘못된 요구를 하나님께서 그대로 허락하시는 것은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기 위한 시험과 훈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에 그대로 두는 방임이거나 잘못을 심판하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습니다. 
   
둘째 아들의 요구에 아버지가 그대로 재산을 나누어 준 것은 시험이거나 훈련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둘째의 잘못에 대한 방임이거나 심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판단하시고 결정하실 일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자신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실지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버지는 아들의 어리석은 요구에 그가 깨닫고 돌아오기까지 기다리기로 하셨습니다. 재산을 잃는 것보다 아들이 진정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성이나 인격을 무시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마음에 없는 억지가 아니라 진정한 순종을 원하십니다.
   
렘브란트 말년에 그린 ‘돌아온 탕자’보다 30년이나 일찍 그린 ‘유산을 탕진하는 탕자’(유화, 1636)가 있습니다. 그림은 탕자의 생활을 낱낱이 보여줍니다. 온갖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을 한 탕자는 술잔을 높이 쳐들며 음흉한 미소를 짓습니다. 무릎 위에 앉은 여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렘브란트의 아내인 사스키아를 모델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탕자는 바로 렘브란트 자신을 모델로 하였습니다. 렘브란트는 자신이 탕자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훗날 돌아온 탕자를 그렸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사람들이 원하는 잘못된 것을 허락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니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뒤늦게 후회하면서 그 때 때려서라도 좀 말리지 그랬느냐고 하지 마십시오. 반대로 우리들이 구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복입니다. 자신의 자유까지 맡기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마음대로 살고 싶다고요? 자신의 마음대로 사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마음대로 살기를 구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에 소원을 두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축복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