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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철없는 탕자 (1) (눅 1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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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는 탕자 (1) (눅 15:11~24)


어느 분이 “나는 이제야 철들었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였더니 교통사고를 당해서 다리가 부러졌는데 수술하면서 뼈 속에 쇠를 박았다는 말이었습니다. 말이 되었습니다. “철들었다”는 말은 “사람이 생각이 여물고 성숙해졌다”는 말입니다. 오늘 철든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매일 뉴스를 보면 속이고 싸우고 불화하고 갈등하는 일들이 너무 많은데 그것은 사람과 사회와 국가와 정치가 아직 철이 들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탕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들이 여러 번 읽은 말씀입니다. 이 비유는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이야기로 아주 철없는 아들 이야기입니다. 이름하여 탕자의 비유입니다. 이 탕자의 비유가 나오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잃은 자, 세리, 죄인들을 찾으러 다니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고 설교하고 교육하고 전파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사람이 세 사람입니다. 아버지와 큰 아들과 작은 아들입니다. 앞으로 3주에 걸쳐서 이 세 사람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작은 아들 

오늘은 먼저 작은 아들 편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 작은 아들은 오늘 사람들의 모형이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자기위주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모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인간 군상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이 같은 탕자들이 많습니다. 이 탕자를 보면 곧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 작은 아들 탕자가 아버지의 속을 많이 썩혔고 아버지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하였습니다. 탕자를 둔 부모는 속을 많이 썩게 되어 있습니다. 이 작은 아들이 어느 날 아버지에게 재산 중에서 자기에게 돌아올 몫을 나누어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질 유산을 미리 달라는 말입니다. 당시 문화로 보면 이 태도는 매우 불손한 태도에 해당됩니다. 당시 이 태도는 아버지가 빨리 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해석되어 그런 아들에게는 매질을 할 수 있었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아버지는 순순히 두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장남에게는 2/3를 주었고 작은 아들에게는 1/3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큰 아들이 작은 아들 덕분에 덕을 본 셈입니다. 이렇게 보면 작은 아들은 노골적인 탕자라고 말할 수 있고 큰 아들은 음흉한 탕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큰 아들이 왜 음흉한 탕자냐 하면 아버지가 그렇게 하는데도 아무 소리 안하고 속으로 좋아하면서 그냥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이 큰 아들도 탕자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이런 탕자들이 많습니다. 아들을 선호한다는 것도 이제는 옛날 말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아들들이 하도 속을 썩이니까 풍속이 바뀌어서 딸을 선호하는 시대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잘난 아들은 국가 것이고 돈을 많이 버는 아들은 장모 것이고 빚 많이 진 아들은 부모 것”이라는 말도 생겨났습니다. 

이 탕자가 이제 집을 나가겠으니 재산을 달라고 했습니다. 내 몫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내 몫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가 언제 돈을 벌었습니까. 맡겨놓은 돈을 가져가듯이 달라고 했습니다. 오늘 부모들은 이런 아들을 두면 돈 안주고 못 배깁니다. 안주면 강도같이 달라고 내 놓으라고 덤벼듭니다. 그래서 어떤 부모는 돈 안준다고 아들 손에 죽기까지 한 부모도 있습니다. 이게 깡패이지 아들입니까. 모두 탕자들입니다. 

방탕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는 순순히 두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작은 아들은 그 돈을 받자마자 멀리 떠나갔습니다. 아버지 손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멀리 떠나 버렸습니다. 갈 때는 잘 살아보겠다고 다짐도 했을 것입니다. 보란 듯이 성공해서 고향으로 돌아오겠다고 생각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가다 보면 삶이 내 각오와는 다르게 전개됩니다. 그래서 이 탕자가 멀리 가서 방탕하고 놀고 즐기고 재산을 탕진하고 흥청망청 다 탕진하여 버렸습니다. 

돈을 땀 흘려 벌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돈이 생기면 이런 길을 가게 됩니다. 그래서 부자 3년 못 간다고 했습니다. 돈은 내게로 그냥 저절로 굴러들어오지 않습니다. 돈은 땀이나 피눈물을 흘려도 잘 오지 않습니다. 쉽게 벌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불건전한 생각으로 돈을 벌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모두 철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고치고 실패하고 돈이 생기면 탕진하는 것입니다. 돈을 벌기가 얼마나 힘이 듭니까. 남들이 잠잘 때 나는 잠을 자지 않고 일해야 돈을 벌 수 있습니다. 

남들이 먹을 때 나는 굶어야 돈을 벌 수 있습니다. 돈을 번 1세대들은 모두 그렇게 살았습니다. 남들이 갈비탕 먹을 때 나는 자장면을 먹었습니다. 남들이 요리를 먹을 때 나는 갈비탕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돈을 모은 것입니다. 그래서 1세대들은 두려워서 아까워서 그 돈을 쓰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탕자가 그런 세상의 이치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니 돈이 생기니까 흥청망청 탕진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무일푼으로 노숙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잠잘 곳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토록 의기양양하던 이 아들이 마지막에는 돼지 치는 집에 붙어 살았습니다. 돼지가 먹는 음식을 얻어먹으며 연명을 하였습니다. 몰골이 앙상해졌을 것을 것이고 몸이 수척하고 여위였을 것입니다. 

탕자에게 있어서 이 단계는 그의 인생을 위하여 다행스런 단계입니다. 탕자는 반드시 이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아니면 사람 되기 어렵습니다. 이 과정이 없으면 이 탕자는 평생 탕자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됩니다. 이 과정이 탕자로 하여금 철들게 하는 과정이고 눈뜨게 하는 과정이고 사람 되게 하는 과정입니다. 이 탕자가 마침내 이 과정을 거치는 동안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이 탕자가 제정신이 들었습니다. 제 정신이 드니까 아버지의 품이 생각났습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잘못된 자리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옳은 길이 아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알고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알고 발견하고 깨달으면 바로잡고 고칠 수 있습니다. 병자가 아픈 것을 알게 되면 고칠 수 있습니다. 수술할 때는 아프지 않지만 마취가 깨어날 때는 아프기 시작합니다. 아픔이 시작되는 것은 회복이 되고 있다는 징조입니다. 그런데 아픈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고 비극이고 사건입니다. 암이 무서운 것은 아프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찍 아픔이 있으면 암은 결코 무서운 병이 아닙니다. 다 고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탕자는 비로소 외칩니다. 18-19절을 보면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하지 마시고 나를 품꾼의 하나로 써 주소서”하고 말하자 하고 탕자는 집으로 갑니다. 늦었지만 다행입니다. 못난 아들 같았으면 창피하니 죽어버리자 하고 자살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탕자가 잘못했으니 돌아가서 아버지께 용서를 빌자하고 돌아갔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여기서 이 탕자의 자세를 보면 진정한 참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 계산이 깔려 있습니다. 

오늘은 흉년이 들어 살기가 힘든 때입니다. 더구나 일감도 없고 지금 온 세상이 흉년이 들어 직원도 머슴도 내 보내고 구조 조정할 때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 집도 구조조정 할 판인데 내가 아버지 집에 가면 아버지 지출이 또 늘어날 것이 뻔입니다. 지금 아버지 집에는 나 같은 무능한 일꾼이 아니고 유능한 일꾼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쓸모없이 병들고 지친 몸으로 돌아갑니다. 내가 돌아가서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이 탕자가 돌아가는 것은 아버지를 생각해서 도와 드리려고 가는 것이 아니고 내 필요 때문에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뉘우침이 아닙니다. 그래도 집으로 갑니다. 

 멀리서 아버지가 아들을 알아보셨습니다. 아들도 기민맥진 하였지만 그 아버지도 기진맥진하여 있었습니다. 아들 때문에 지치고 시달리고 마음 고생하여 온 몸이 지쳐 있었습니다. 우리는 탕자만 지친 모습으로 보아왔지만 그 보다 더 지친 아버지의 지친 모습을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못 말립니다. 그토록 초죽음이 되어 있었는데 아들이 돌아오니까 힘이 솟아 아들을 맞아 들였습니다. 아주 측은한 마음으로 아들을 맞아 들였습니다. 

그 탕자 아들을 거부하지 않으시고 큰소리도 치지 않고 매를 들지도 않고 그냥 받아들이십니다. 그리고 잔치를 베풀고 송아지를 잡아 동네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벌였습니다. 아들이 실패하고 돌아온 것이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병들어 돌아온 것이 동네 사람들 보기에 창피할 법도 한데 아버지는 그런 것과는 상관도 없었습니다. 부끄럼 따위는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죽었던 아들이 돌아온 것만도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그래서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탕자가 이 같은 아버지의 심정을 어찌 알겠습니까. 이상이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여기에 몇 가지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탕자 ? 

여기 탕자는 나 자신입니다. 아버지 품이 싫다고 거부하고 재산을 내 놓으라고 아버지를 협박하고 집을 떠난 탕자는 곧 나 자신입니다. 내 안에는 이 탕자의 기질이 충만하게 들어있습니다. 내 안에는 타락한 심성들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신앙 안에 일찍 들어와 있으면서도 자꾸만 하나님 곁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 있습니다. 어려서 잘 나가던 교회도 머리가 조금 커지니까 떠나고 싶어집니다. 어렸을 때 순수하던 신앙도 좀 커지면서 거세지고 뻣뻣해지고 메말라집니다. 

아이들을 보십시오. 어렸을 때는 말 하면 그대로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크면 불신하고 반항심이 솟아나옵니다. 부모의 말을 잔소리라고 듣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뜻을 어깁니다. 반항합니다. 이것이 모두 탕자적 기질 때문입니다. 아이들만 그러는 것도 아닙니다. 어른이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른이 되어도 반항하고 싶고 떠나고 싶어 합니다. 어느 날 20세 된 아들이 집이 답답하고 엄마 잔소리가 듣기 싫다고 집을 나가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나를 말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다 이렇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재빨리 아들을 따라 나섰습니다. 아들이 “왜 이러세요. 날 말리지 말라고 했잖아요”하고 막무가내로 나오자 아버지가 아들 말은 듣지도 않고 신발을 신으시며 “누가 널 막는다고 그러냐, 어서 앞장서라, 같이 떠나자”고 했습니다. 모두 떠나고 싶어 합니다. 여기 탕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나입니다. 나 자신이 탕자입니다. 내 안에 이 탕자의 기질인 반항심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내가 곧 탕자입니다. 

탕자의 결국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떠납니다. 떠나면 무슨 수가 있는 줄 알고 떠나갔습니다. 여서 본문은 하나님을 떠나면 만들어지는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그대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병들고 지치고 외롭고 후회의 삶만 남고 그래서 반드시 후회하면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모습을 성경은 탕자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둠속의 빛”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가미옹카라는 주인공이 작품실에 묻혀 일하다가 피곤하여 잠시 침대에 누워 잠을 잤습니다. 그때 꿈을 꾸며 환상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꿈속에서 보니까 산기슭 언덕에 허름한 집이 보이고 남루한 작업실이 보이고 거기 누군가가 낡은 침대에 누워 있습니다. 

그 사람의 모습을 보니까 마치 죽어가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입은 쩍 벌리고 얼굴은 초췌하고 영은 몹시 메마르고 앙상하고 갈급한 상태에서 다 죽어가는 사람의 해골같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하기를 “누가 저렇게 죽어가고 있는가, 참 비참하구나”하고 쳐다보고 있는데 순간 스쳐가는 생각이 있어 자세히 보니까 그것이 자기 자신의 모습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꿈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객관화해서 보여준 나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상의 진면목입니다. 그것이 탕자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본문의 의도는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나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내 안에 탕자의 기질이 충만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곁을 떠나지 못해 안달하는 탕자의 모습은 곧 나의 모습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 곁을 떠나면 결국 어떻게 되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한 가지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처음에 잘 나가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탕자의 길을 가더라는 것입니다. 좀 늦게 깨이는 사람들은 겸손하고 방자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잘 나가던 사람은 하나같이 성공을 장담하고 자신만만하며 마침내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러다 마침내는 탕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것이 공식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사람이 되고 자신의 길과 위치를 찾게 되고 철이 들어 겸손한 자가 된다는 점입니다.   

아버지 

여기 집을 나간 탕자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아버지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나누어 준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오는 아들을 아무소리 안하시고 맞아들이시는 아버지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강하시고 벌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아주 약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아버지는 마음이 약하십니다.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맞이해서 왜 그랬느냐, 나가라, 창피하다, 겨우 그 꼴이냐, 아버지 망신시켰다고 말 한마디를 못하시는 아버지가 하나님의 마음이십니다. 이것이 오늘 부모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이 부모의 마음을 자식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어느 외아들이 커서 군에 가게 되었습니다. 부모들이 추운 날 아들만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매일 편지를 보냈습니다. 어느 날 엄마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며 “보고 싶은 아들아, 네가 보고 싶구나, 네 침대에는 아직도 네 온기가 그대로 남아 있어 따끈따끈 하구나, 흑흑흑” 그랬더니 한 번도 답장을 보내지 않던 아들이 곧 바로 답장이 왔습니다. 기대를 걸고 뜯어보니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엄마 제방 침대 시트 밑에 있는 전기장판 그냥 두고 왔어요, 전기 꺼주세요?” 우리는 모두 자식들에게 속고 살아갑니다. 

부모의 마음은 곧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은 오늘도 이 탕자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는 모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바리새인들, 제사장들은 모두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말은 하였지만 모두 탕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잊어버리고 율법만 고수하고 제사의 알맹이는 다 빠지고 형식만 남았습니다. 그런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너희들이 탕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는가 하면 이 탕자들을 부르시고 찾으시고 구원하시고 깨닫게 하시려고 보내셨습니다. 내가 탕자입니다. 주님은 나를 부르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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