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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우리의 괴로움을 짊어지신 주님 (요 1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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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괴로움을 짊어지신 주님 (요 13:12~20)


본문 

12절은 오늘 본문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일 직후에 그들에게 하신 말씀임을 보여줍니다. 요13:4-5에 보면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기 위해 벗으셨던 옷을 다시 입으시고 식사자리로 다시 돌아와 앉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즉 당신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그 행동의 의미를 아는지, 그 행동을 통해 당신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단 그 물음에 대한 제자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으시고 곧바로 그 대답을 주셨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상상도 못하던 스승의 행동 앞에서 너무 놀라 얼떨떨해 하느라고 예수님의 질문에 답할 경황이 없었기 때문인가 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행동에 대해 예수님 자신이 설명하신 의도와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봅니다. 본문 13-17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먼저 두 가지 사실을 주목합니다. 첫째는, 본문 13-15절에 있는 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제자들도 따라하도록 본을 보이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제자들 스스로 예수님을 선생이라고도 하고 주라고도 부르고 그 말대로 예수님은 선생이시고 주이시기도 한데 선생도 되고 주도 되는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다면 제자들끼리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니냐? 

그러니 제자들이 그렇게 하라고 예수님께서 먼저 친히 남의 발을 씻어주시는 본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16-17절에서 보는 대로 그렇게 남의 발을 씻어줄 줄 아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다는 사실입니다. 
주인이 당연히 종보다 큰 사람이지만 자기가 발을 씻어주는 사람이 자기의 종이라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그 종의 발을 씻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신분이 어떠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남의 발을 씻어주는 행동은 복을 가져다줄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이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의 행동과 그의 말씀으로부터 우리가 이끌어낼 수 있는 윤리적, 사회적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의 공동체에서는 서로가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며 섬기기를 힘쓸 때 행복한 공동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보다 더 주목해야 할 점은 다른 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을 바로 뒤따르는 요13:21에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셨다.” 합니다. 이 21절에서 “이 말씀”이라 한 것은 바로 오늘 본문의 18-20절 말씀일 것입니다. 그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심령으로 괴로워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제자 중 하나가 당신을 팔아넘길 것이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18-20절의 말씀은 곧 가룟인 유다의 배신에 관한 말씀인 것입니다. 다시 봅니다: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먼저 18절의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하신 말씀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앞의 1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즉 제자들이 예수님의 본을 따라 서로 발을 씻어주는 섬김의 삶을 살 때 복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열두 제자가 모두 그렇게 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다는 것입니까? 뒤따르는 말씀이 설명합니다: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제자로 택하신 열두 사람을 다 잘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하나가 배신할 것도 알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그가 누구일지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내 떡을 먹는 자”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보다 조금 뒤에 따라오는 26-27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셨다.” 합니다. 

이 식사자리에 유다는 예수님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앉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쉽게 떡을 찍어 먹는 소스에 떡 한 조각을 적셔서 유다에게 건네주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손과 유다의 손 사이에 오고간 것이 다른 제자들 눈에 잘 띄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으로부터 떡 조각을 받아 먹은 유다는 곧 사탄에 이끌려 예수님을 팔아넘기기 위해 나갔습니다.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는 말씀은 유다의 그 배신행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유다의 배신행위에 대하여 나머지 제자들에게 뭔가를 말씀해주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제자들이 유다의 배신을 알게 될 때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를 염려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니 주님께서는 자기 제자 하나가 당신을 배신할 것도 모르고 계셨단 말인가?”, “배신자가 될 사람은 측근 제자로 택하신 주님의 안목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어찌 유다의 배신을 사전에 예견하고 대비하지 못하실 수 있었단 말인가?” 등등의 의문가 불신이 불거질 수도 있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18절 하반절의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하신 말씀입니다. 메시야이신 주님께서 제자의 배신을 당하는 일은 이미 성경에 언급된 바이고, 메시야가 그의 구원사역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쓰인 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성경이란 시41:9입니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한 다윗의 시편의 한 구절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다윗은 그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의 모본 또는 예표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즉 고난과 연약함과 배신 등 다윗의 삶의 여러 가지 경험들은 메시야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이 자기 자신에 관해서 시41:9에서 한 말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에게 이루어질 일로 여기고 계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시인 시편 41편의 9절 말씀을 당신에 관한 예언으로 알고 계셨기에 제자 중 하나인 가룟인 유다의 배신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요6:70-71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하고, 요13:10-11에서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배신을 알고 계셨으면서도 그것을 피하려 하지도 막으려 하지도 않으시고 내버려두실 뿐 아니라 오히려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재촉하시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시는 예수님의 의중을 잘 드러낸 말씀이 본문 19절입니다: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여기서 일어날 일이란 유다의 배신과 그로부터 귀결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일 것입니다. 그러한 일련의 일들이 일어나도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이해와 믿음이 변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미리 예고해 두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이런 예고가 없다면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이해와 믿음이 다 흔들려버릴 수 있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메시야이신 줄 알았는데 제자한테 배신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 보니 메시야가 아니었나 보다. 진짜 메시야라면 그렇게 당할 수는 없겠지.” 하는 생각을 누구나 해볼 수 있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신 말씀이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입니다.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하신 말씀에서 “내가 그라.”는 것은 떨기나무에 붙기는 했으나 나무를 태우지는 않는 불꽃 안에서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인도해내라고 모세를 보내려 하실 때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대답하신 말씀 즉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 하신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여러 차례 자기 자신을 가리켜 붙이신 이름들과 같은 것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라.”(요6:35, 48),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라.”(요6:51), “나는 세상의 빛이라.”(요8:12), “나는 양의 문이라.”(요10: 7), “나는 선한 목자라.”(요10:11, 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요11:25),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14: 6), “나는 참포도나무라.”(요15:1) 등등이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붙이신 호칭이었습니다. 유다의 배신과 뒤따르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변함없이 그런 존재임을 굳게 믿어야 할 것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일은 뜻밖의 놀라운 일이었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주님이셨던 것처럼 메시야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일도 한없이 믿어지지 않을 일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모든 사람의 유일하신 구원자이심을 제자들은 믿고 그 사실을 가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본문 20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내가 보낸 자”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전하라고 보내시는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란 제자들이 전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모든 사람의 유일하신 참 구원자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하신 말씀의 뜻은 달리 말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보내신 그의 아들로 믿는 이들만이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하셨습니다. 그 괴로움의 정체가 무엇이겠습니까? 당신을 배신할 자를 제자로 삼고 다 아시면서도 그와 삼 년간의 삶을 나누셔야 했던 고뇌, 나머지 제자들도 다 주님을 부인하거나 버리고 흩어질 일에 대한 연민의 정, 무엇보다도 곧 당하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으로 말미암는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져야 할 죄와 괴로움의 짐입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대신 지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안과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괴로움을 짊어지시고 당신의 길을 묵묵히 가신 주님을 깊이 묵상하는 이번 사순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그가 우리에게 베푸신 죄 용서와 구원과 영원히 복된 삶의 그 놀라운 은혜를 되돌아보며 새로운 감격과 감사에 넘치는 우리의 사순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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