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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 삶을 사는 기초(8) : 소그룹 (행 2:43~47, 행 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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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삶을 사는 기초(8) : 소그룹 (행 2:43~47, 행 5:42)
  

무디의 집에 젊은이가 찾아와서 “왜 그리스도인들은 모여야 하는가?”라고 물었을 때 무디는 말없이 벽난로에서 타고 있는 장작을 꺼냈다. 그리고 다시 벽난로에 집어 넣으니 연기나던 장작이 다시 타올랐다. 그것을 보고 젊은이는 크게 깨닫고 돌아갔다.

신앙의 성장은 누구든지 혼자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장은 언제나 사람과 함께, 사람과 더불어 있을 때 더 뜨겁게 탈 수 있다. 그래서 모이기를 힘쓰고 주일이면 하던 일을 내버려두고 교회로 달려와야 한다. 하지만 오늘 영적 삶의 기초로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대그룹의 모임이 아니라 소그룹 모임에 대해서다.

제도와 교리로 발전해 온 오늘의 교회 생활은 주일 성수로 모임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웬만한 크리스챤은 일주일에 한 번, 바쁜 시간을 멈추어 교회에 나와 예배에 참여하므로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한다. 주일도 못 지키고 교회에 나오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예배자가 된 것이 얼마나 큰 향상인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고착된 생각을 버리고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초대 교회의 모임은 두 개였다는 것이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 사도행전에서 보여주는 모임의 종류는 행5:42을 보면 성전에서의 모임과 집에서의 모임이었다. 그리고 두 개의 모임에서 성전에서의 모임을 위해 강조되는 그 기초적인 모임이 바로 소그룹 모임이었다.

그 소그룹 모임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1. 그 소그룹 모임은 집에서 모이는 모임이었다.

우리는 모임을 중요시 여겨야 한다. 모임을 폐하려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모임이 생명력이 있는 모임이 되려면 집에서 모이는 소그룹 모임에 집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 공동체는 집에서 모이는 모임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의 생성은 성전에서 모이는 큰 모임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보라. 막2, 7, 9, 14장을 보면 누군가의 집에 들어가셨고 성만찬도 집에서 행하셨다. 집이 공동체 신앙을 생성시킨 자리다. 그러므로 집에서 예배할 때 회심이 일어나고 집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집에서 성령의 위로가 진행되었다. 

사울을 보라. 그리스도인들을 찾아내어 박해하려 할 때 행8:3을 보면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겼다고 하였다. 사울이 가정을 찾아다닐 때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숨어 있었다. 집이 바로 신앙의 자리였다. 예배하는 자리였다. 
  

2. 그 소그룹 모임은 관계 공동체였다.

행2:46을 보라.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라고 하였다. 집에서 모이는 이 모임은 그 정체성이 건물이나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이 가정, 저 가정으로 움직이며 교제하고 서로의 삶을 나누며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공동체였다.

공동체란 무엇인가?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고 서로를 책임져 주는 친밀한 모임을 뜻한다. 스커트 팩의 말을 인용한다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깊은 관계를 맺을 줄 아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서로 즐거워하고 슬퍼하며 타인의 처지를 내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런 관계 공동체의 모임이 가능한 것은 소그룹이기 때문이다. 20명 이상이면 어렵다. 떡을 떼고 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는 공동체는 10명 이내의 모임이다. 이 시대의 교회는 공동체 모임의 소그룹 모임이 회복되어야 한다. 사랑의 공동체, 친밀한 관계 공동체가 배제된다면 신앙은 소속감이 없고 사역의 책임감이 없어진다. 결국 외형으로의 교회만 남게 될 것이다. 크게 모이는 모임조차 흔들리게 될 것이다.

  
3. 그 소그룹 모임은 가르치기와 전도하기의 요람이었다.

집에서 일어나는 소그룹 모임의 사역은 교회에서 행하는 사역과 다른 것이 없었다. 오히려 오늘의 교회 사역보다 더 힘차게, 부지런히 모였다. 행5:42을 보면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위해 날마다 모였다. 

소그룹 모임은 어느 한 가지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가르치기가 없는 전도를 한 것이 아니다. 반면 전도 없는 가르치기를 한 것이 아니다. J. Smart는 이것을 가리켜 “전도 없는 가르치기는 주지주의가 된다.”고 하였다. 또 “가르치기가 없는 전도는 감정주의가 된다.”고 하였다. 전도를 통한 회심과 가르치기를 통한 양육은 함께 가야 한다. 그런데 이 중요한 일이 소그룹 모임에서 일어났으니 집에서 모이는 모임을 어찌 폐하고 외면하는가? 집에서 모이는 모임은 막연히 소그룹 운동이 아니다. 그 소그룹 모임 자체가 교회인 것이다. 오이크스(집)에서의 모임은 교회의 진정한 본질인 것이다. 어찌 영적 삶의 기초가 아닌가?

  
4. 그 소그룹 모임은 영적 은사가 나타나는 성령님의 자리였다.

행10:44~48을 보면 고넬료의 집에 성령이 부어진다. 베드로의 설교가 진행될 때 성령의 임재는 그 집에 있는 모든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의 모임 속에 나타났다. 그 성령의 부어주심으로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역사가 나타났다. 또 사람들이 모일 때 고전14:26을 보면 다양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났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학자들에 의하면 고린도교회의 모임은 20개 정도로 모이는 가정 집의 모임이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은사를 나타내셨다. 은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효과적으로 살며 교회 안에서 서로 덕을 세우기 위해 주시는 선물이었다. 신약 시대의 교회에는 적어도 25가지 이상의 영적 은사가 있었다. 성도들은 그 은사를 가지고 서로를 섬기고 서로에게 유익이 되도록 하였다. 이렇게 영적 은사가 나타나는 자리가 소그룹이었다. 이제 그 은사로 인해 소그룹이 얼마나 역동적이었는지는 물을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5. 그 소그룹 모임은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는 생명 출산의 자리였다.

행2:47을 읽지 않더라도 초대 교회의 기독교는 소그룹 모임에서 구원 받는 사람을 더하였다. 생명은 생명을 낳는다.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재한 후 소그룹 존재의 이유는 구원 받는 사람의 증가에 있다. 하나님의 뜻은 죄와 죽음에 처한 사람을 살려내어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 것이다. 구원 받은 사람이 더해지는 출산과 배가, 성장이라는 것은 생명의 당연한 현상이다. 

행4:4, 5:14, 6:7, 9:31, 11:21은 모두 다 믿는 사람의 수가 더하여 가고 허다한 사람이 주께 돌아오는 것에 대한 기록이다. 소그룹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복음을 향해 집중되어 있고 오직 예수,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 하에 돌보며 전도하는 증인이 되었기에 구원의 생명 출산이 계속된 것이다. 

오늘의 시대에 진정으로 회복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잊어버리고 있는 모습이 무엇인가? 

우리들이 세속적인 삶에 짓눌려 마땅히 보여주고 있는 소그룹의 모임을 아예 포기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리고 거기서 전도가 일어나야 함을 잊은 것이 아닌가? 바쁘다는 핑계로 아예 소그룹 모임, 속회 모임 따위는 폐한 것이 아닌가? 

영적 삶의 기도를 다시 세우기를 원한다면 소그룹 모임에 참여하라. 그것은 교회 본질의 문제로 돌아가는 것이다. 소그룹 모임인 속회는 조직이 아니다. 운동이 아니다. 한 시대의 유행도 아니고 목회의 프로그램이 아니다. 성도의 길이고 성령의 길이고 하나님의 방법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을 보내시는 자리다. 교회가 사는 길이고 영혼의 사는 길이고 사람을 살리는 자리고 평신도가 진정으로 평신도가 되는 자리다. 

왜, 집에서 모여야 하는가? 반문하거나 의심해서는 안된다. 집에서의 모임이 대그룹 모임을 지탱하는 기초인 것이다. 나의 집의 대문을 열고 남에게 보여주기 싫어서 폐쇄적인 모습이 되어서는 안된다. 바울은 사도행전 끝장(행28:30)에서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셋방, 전세로 머무는 집도 신앙의 자리로 사용되었다. 무엇을 망설이는가? 집이 교회가 되도록 하라. 가르치고 선교하고 섬기는 자리가 되도록 하라. 신앙의 관점을 바꾸라. 적극적인 태도로 문을 열라.

소그룹, 집에서의 모임이 영적 삶의 기초가 되는 자리로 매김질을 하라. 이것을 인지하는 성도들은 CM 교인이 참 교인이라고 외치는 것이다.

“CM 교인이 OMC 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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