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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단 하나의 소원 (시 2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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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소원 (시 27:1~6)


[주님이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신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이 내 생명의 피난처이신데,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랴? 나의 대적자들, 나의 원수들, 저 악한 자들이, 나를 잡아먹으려고 다가왔다가 비틀거리며 넘어졌구나. 군대가 나를 치려고 에워싸도, 나는 무섭지 않네. 용사들이 나를 공격하려고 일어날지라도,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려네. 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나는 오직 그 하나만 구하겠습니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재난의 날이 오면, 주님의 초막 속에 나를 숨겨 주시고, 주님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감추시며, 반석 위에 나를 올려서 나를 높여 주실 것이니, 그 때에 나는 나를 에워싼 저 원수들을 내려다보면서, 머리를 높이 치켜들겠습니다. 주님의 장막에서 환성을 올리며 제물을 바치고, 노래하며 주님을 찬양하겠다.]

• 마음 달래기

마음처럼 이해하기 힘든 것이 없습니다. 사전은 마음을 ‘사람의 智․情․意의 움직임. 또 그 움직임의 근원이 되는 정신적 상태의 총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시비와 선악을 판단하고 행동을 결정하는 정신 활동’이라는 정의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이든 마음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잡히지는 않습니다. 마음이 참 모호한 실체라는 것은 관련된 어휘들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을 끌다. 마음을 놓다, 마음을 먹다, 마음 붙이다, 마음에 걸리다, 마음에 두다, 마음에 새기다, 마음을 잡다, 마음을 졸이다……. 그래서인가요? 舜 임금이 禹 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전수해 준 통치의 비결은 마음을 붙잡는 법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의 마음은 늘 흔들리게 마련이고(人心惟危) 하나님의 마음은 늘 은밀하여 파악하기 어려우니(道心惟微), 늘 세심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하여야(惟精惟一) 진실로 그 가운데를 잡을 수 있다(允執厥中)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거리를 달려가면서 소리쳤습니다. “도둑이야, 도둑이야!”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물었습니다. “도둑이 어디 있소?” “우리 집에요.” “그를 보았소?” “아뇨.” “잃어버린 물건은 있소?” “없어요.” “그럼, 도둑이 당신 집에 들었다는 걸 어떻게 알았소?” “침대에 누워 있는데, 도둑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집에 들어와서 잽싸게 움직인다는 사실이 생각났어요. 그런데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 틀림없이 우리 집에 도둑이 들어와 있는 것 아니오?”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웃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만든 몽상에 갇혀 허둥대는 것은 이 어리석은 사람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자주 受生은 受難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목숨을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어려움을 겪게 마련입니다. 잘 해결해 나갈 때도 있지만 어려움에 치여 헐떡일 때도 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스멀스멀 우리 마음에 기어들 때도 있고, 구체적인 공포가 우리를 사로잡을 때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두려움은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고 이성적 사유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흔들리는 우리 마음을 어떻게 붙들어야 할까요? 음악을 듣거나, 운동을 하거나, 잠을 청하거나, 왁자지껄한 소음 속에 자기를 던지거나, 술의 힘을 빌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그 마음을 하나님 앞으로 데려갑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신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이 내 생명의 피난처이신데,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랴?”(1)

• 봄바람, 회오리바람

시인은 두려움으로 무거워진 마음을 하나님께 들어 올립니다. 그러자 은총의 날개 아래서 살아온 지난날이 또렷하게 떠오릅니다. 주님은 인생의 어둔 밤을 만난 시인의 등불이셨습니다. 그의 생명이 경각에 달했을 때 안전하게 숨을 수 있는 피난처였습니다. 잡아먹을 듯 달려들던 적들은 마치 제 발에 걸린 듯 비틀거리다 넘어졌습니다. 가끔 어려운 문제에 직면해 어쩔 줄 모르는 이들을 봅니다. 그런 이들에게는 어떤 충고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문제를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뜻하지 않은 일이 닥치면 그 문제는 성큼 우리 앞에 다가와 우리 시야를 가립니다. ‘눈앞이 캄캄하다’는 말이 그런 정황을 잘 드러내줍니다. 손가락 하나만 가지고도 우리는 눈을 가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를 좀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면 그게 그렇게 큰 문제도 아니고, 풀 수 없는 난제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면 ‘나는 이 문제보다 크다’고 외쳐보십시오. 그렇다고 하여 문제가 즉각 해결되지는 않지만,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 태도는 달라져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두려움을 크게 만드는 것은 우리 마음입니다. 문제와 맞서보기도 전에 우리는 문제의 크기에 짓눌릴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제 아무리 낮게 넘어져도 하나님의 은총 밖으로 떨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어느 날 텔레비전을 통해 중국 무협 영화를 보고 있었습니다. 허풍이 심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솜씨가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주인공 편에 선 여인이 악인에게 쫓겨 죽음의 자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악인이 여인을 향해 손을 뻗자 여인은 눈을 감습니다. ‘이제는 끝났구나’ 싶었겠지요. 그런데 잠시 후 이상한 느낌에 눈을 뜬 여인은 악인이 피를 토하며 쓰러진 것을 봅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여인의 등 뒤에 절세무공을 가진 주인공이 서서 여인 속에 기를 불어넣었던 것입니다. 황당한가요? 허구이긴 하지만 이것은 우리 삶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숨결을 불어넣어 절망과 무기력을 극복하게 하십니다. 이런 놀라운 일을 경험했기에 시인은 노래합니다.

“군대가 나를 치려고 에워싸도, 나는 무섭지 않네. 용사들이 나를 공격하려고 일어날지라도,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려네.”(3)

하나님의 은총에 자기를 온전히 맡긴 사람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부력을 경험해 본 사람의 고백입니다. 길들인 독수리와 함께 패러글라이딩(paragliding)을 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날개를 편 채 유영하는 독수리와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사람이 똑같은 바람을 타고 날았습니다. 그 모습이 경이로웠습니다. 신앙인이란 어쩌면 하나님의 바람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세상일을 도외시하고 산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바람은 때로는 지친 나그네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산들바람일 때도 있지만, 앞에 있는 장애물을 다 날려버리는 회오리바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새로운 희망의 싹을 일깨우는 봄바람일 때도 있지만, 불의한 세상과 권력을 날려버리는 태풍일 때도 있습니다. 제가 가깝게 느끼는 몇 분의 목사님들은 평소에는 너무나 부드럽고 따뜻하고 겸손합니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불의를 질타할 때는 사자로 변합니다. 두 모습 다 하나님의 사람다운 모습입니다. 

• 忠인가, 患인가?

오늘 시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구절은 4절입니다. “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심술꾸러기 도깨비들도 3가지 정도의 소원은 들어준다는 데, 이 시인은 단 하나의 소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의 소원이란 그 소원 이루고 나면 죽어도 좋은 것일 겁니다. 자기 삶 전체를 하나의 초점에 모으는 사람처럼 무서운 사람이 또 있을까요? 지금 인생을 걸고 이루고 싶은 단 하나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백범 김구 선생님은 하나님이 만일 내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시인의 꿈은 소박하지만 아름답습니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4)

그는 하나님이라는 중심에 자신을 비끄러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중심이 하나인 삶, 곧 一中의 삶은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충성스러운 삶이 됩니다(中+心 → 忠). 하지만 마음이 이리저리 분산되어 있는 삶 곧 多中의 삶은 병이 됩니다(串+心 → 患/근심, 병). 신앙생활이란 다른 것 아닙니다. 나를 지우고 또 지워서 하나님의 마음과 통하려는 것입니다. 

1936년에 스페인 내전이 벌어졌을 때 그리스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전쟁의 참상을 눈으로 목격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겠다는 포부를 안고 스페인으로 달려갑니다. 그는 살라망카에서 20세기 스페인 최고의 사상가인 미구엘 데 우나무노를 만납니다. 그는 한 가지 질문을 준비하고 갔습니다. “오늘날 영적인 인간의 의무는 무엇입니까?” 우나무노는 스페인 사람들이 이런 저런 깃발을 들고 싸우고 서로를 죽이고 교회를 불태우는 모습이 절망스럽다면서, 그런 혼란의 원인은 스페인 사람들이 아무것도 믿지 않는 데 있다고 진단합니다. 우나무노는 그들을 ‘데스페라도 Desperado’라고 부릅니다. 그 말은 ‘붙잡고 있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아무것도 믿지 않기에 정신은 와해되고, 거친 분노에 사로잡혔다는 것입니다(니코스 카잔차키스, <<스페인 기행>>, 열린책들, 204쪽 참고)

붙잡고 있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이 시인은 주님의 현존을 늘 경험하고, 주님과 의논하며 살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어려운 일을 만날 때 누구와 의논하십니까?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주님께 ‘어떻게 할까요?’라고 한번만이라도 여쭙는다면 우리 삶은 달라질 것입니다. 이현주 목사님은 이런 문답을 생활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배에게도 질문을 던집니다. 

먹기 전에 배한테 물어봅니다.
초콜렛을 먹고 싶은데 먹을까요?
—먹지 말아라.
그럼, 사과는 먹을까요?
—먹어라.
두 개 먹을까요?
—아니다.
한 개만 먹을까요?
—그래라.
그래서 초콜렛은 먹지 않고
사과를 그것도 한 개만 먹습니다.
뭐든지 이렇게만 먹는다면
속탈이 날 수가 없지요.
그런데도 만일 탈이 났다면
보셔요, 하늘이 뒤집어졌을 겝니다.
-이현주, <먹기 전에>

묻지 않기에 과식을 하고, 묻지 않기에 헛된 일을 도모합니다. 상식적으로 보아도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일을 하나님의 뜻이라며 해치우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묻기는 했는지 몰라도 들을 생각은 없었던 것 아닐까요? 아까 말한 대로 사람의 마음은 변덕스럽기 때문에 늘 위태롭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마음을 자꾸자꾸 하나님의 뜻에 따라 조율해야 합니다. 

• 겁 많은 자의 용기
하나님의 마음과 통한 사람은 더 이상 두려움의 노예가 아닙니다. 고난의 현실이 닥쳐온다 해도 그는 그 문제에 사로잡혀 전전긍긍하지 않습니다. 문제의 크기보다 정신의 키를 더 높으면 어떤 문제도 넘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난의 날이 오면, 주님의 초막 속에 나를 숨겨 주시고, 주님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감추시며, 반석 위에 나를 올려서 높여 주실 것이니, 그 때에 나는 나를 에워싼 저 원수들을 내려다보면서, 머리를 높이 치켜들겠다.”(5-6a)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는 인간 존재의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삶의 부름에 ‘네’ 하고 대답하는 것을 가리켜 존재의 용기(courage to be)라 했습니다. 남과 비교하면서 스스로 불행을 내면화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조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을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멋진 삶입니다. 그럴 수 있는 힘은 바로 하나님께서부터 나옵니다. 굽어 살피시고, 품어주시고, 북돋워주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우리도 좌절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런 확신을 시인은 도처에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는 나를 버려도, 주님은 나를 돌보아 주십니다.”(10)
“이 세상에 머무는 내 한 생애에 내가 주님의 은덕을 입을 것을 나는 확실히 믿는다.”(13)

봄비가 내리더니 교회 마당가의 매화나무에 물이 올랐습니다. 꽃망울이 터질듯합니다. 뿌리로부터 수관을 타고 오른 물이 꽃으로 피어나려 합니다. 우리 삶이 저 깊은 곳에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는 기어코 인생의 꽃을 피우고야 말 것입니다. 인생이 늘 지화자 판일 수는 없습니다. 모진 겨울 추위가 있기에 매화향기가 더욱 진하듯, 어려움이 있기에 기쁨 또한 더욱 지극한 것입니다. 이런저런 잡다한 일들로 인해 마음이 무거우십니까? 그렇다면 그 마음을 하나님께 가져가십시오.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살겠다는 결의, 하나님과 의논하며 살겠다는 겸허한 마음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다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롬8:31b) 이러한 확신으로 허리를 곧추 세우고, 역사의 새 봄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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