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3.1절] '고난'을 도구로 (창 15:12~18)

  • 잡초 잡초
  • 275
  • 0

첨부 1


'고난'을 도구로 (창 15:12~18)


오늘, 사순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또 삼일절 91주년 기념하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요즘 Canada Vancouver에서 진행되는 제21회 동계 올림픽에서, 우리 선수들의 선전을 보면서, 우리와 온 세계가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이 참 자랑스럽습니다. 91년 전, 독립운동을 하며 피 흘리고 목숨 바친, 우리 선열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나라를 이룬 것,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지요. 

특히, 김연아 선수가 피겨 스케이팅 금메달을 수상하고, 당당하게 태극기를 흔들며 기뻐하는 그 모습이,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91년 전 우리 선조들은, 가슴 속에 몰래 감추어 두었던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독립운동 했는데, 참 대조적입니다. 隔世之感을 느낍니다. 정말, 대한민국 만세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이 기쁨과 감격, 승리와 우리의 국력, 우리나라의 국제적인 위상 이면에는, 남이 알지 못하는 눈물과 아픔이 많습니다.  

일찍이 함석헌 선생님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책에서, 우리민족을 가리켜 고생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온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역사가 반만년 역사라지만, 태평성대를 모르고 산 民族입니다. 삼국시대 이후 역사만 보더라도,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던 역사입니다. 벌인 전쟁만도, 백 번이 넘습니다. 內亂은(무슨 난, 무슨 난) 그만두더라도 異民族의 침입만도 5, 60회가 넘습니다. 전국토가 전쟁터가 되어버린 전쟁만도 30회나 됩니다. 지금도 전쟁의 후유증에 있는, 나라들 보면 그 고난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한 전쟁, 거의 다 진 전쟁들입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말에, 城下之盟을 부끄러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都城 밑에서, 降服하면서 맺는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부끄러워 함). 강화조약을 맺으려면 남의 땅에 가서 맺어야 승전인데, 우리 都城 밑에서, 敵將 앞에 무릎 꿇고 맺는 강화조약은 城下之盟입니다. 부끄럽지만, 城下之盟이 아닌 것이 별로 없습니다. 일제식민통치가 그 극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고난’에 뜻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당한 수많은 고난은  분명,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끈 축복이었다는 겁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을 우리가 알지 않습니까?(시 119, 71-2) 

“苦難 當한 것이 내게 有益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律例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그렇게 해서 배운 주의 율례인) 主의 입의 法이 내게는 千千 金銀보다 좋으니이다.” 

본문(창 15, 12-21까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아주 중요한 횃불언약의 말씀입니다(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역사적인 지표가 되는 말씀). 고대근동지방에서는, 중대한 계약을 체결할 때는, 짐승을 잡아서 그 사체를 둘로 찢어 마주 보게 벌려놓은 후, 계약당사자들이, 찢어 벌려놓은 짐승의 사체 사이로 지나가는 儀式으로 계약이 채결됩니다. 계약 당사자들이, 찢어 마주 벌려 놓은 짐승의 사체 사이로 지나가는 것은, 만일 어느 쪽이든 계약을 위반하면, 찢어 벌려 놓은 짐승의 사체처럼, 저주받고 죽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하실 때에도, 꼭 그와 같은 방법으로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숫양, 그리고 山비둘기,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으라 명령하셨습니다(새는 쪼개지 아니함). 

아브라함이 그렇게 하고 해 질 때까지 기다렸지만, 아무런 應答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만 깊은 잠에 빠지고 맙니다.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엄습해 왔습니다. 바로 그 때,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했습니다(창 15, 13-14). 
  
“여호와께서 아브라함(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똑똑히 알아 두어라). 네 자손이(사실 이 때, 아브라함의 형편이 어떻습니까?  자식 하나 없는 70대 중반을 훌쩍 넘긴 노인이었습니다) 異邦에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애굽 왕 바로, 애굽 사람) 四百 年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財物을 이끌고 나오리라.” 

그리고 제차 “네 자손은 사대 만에(400년) 이 땅으로 돌아오리라”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끝나자 갑자기 연기 나는 火爐가 보였습니다. 어느 새, 그 화로에서 타던 횃불이 아브라함이 죽여 쪼개어 놓은 짐승의 사체 사이로 지나가는 겁니다. 타는 횃불은, 하나님이셨던 거지요(그래서 횃불언약).  
횃불언약을 가만 보십시오. 좀 이상합니다. 계약이란 본래, 계약하는 ‘갑과 을’ 쌍방이 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횃불언약은, 누가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하신 언약입니까? 쪼갠 짐승의 사체 사이로 지나가신 분이 누구십니까? 야웨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은 쪼갠 짐승의 사체 사이로 지나가지도 않았습니다. 무슨 이야깁니까? 아브라함과 맺은 횃불언약은, 전적으로 하나님 주도적인 언약이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100% 책임지시겠다는, 하나님 주도적인 계약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은 모든 언약이, 이렇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와 같이 언약하신 하나님은, 언제나 그 언약하신 말씀에 대하여 신실하셨습니다(헤세드). 우리 인간의 책임은, 하나님 주도적으로 체결하신 그 言約에 대하여, 믿음으로 應答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이, 우리와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믿음으로 응답하지 못할 때가 너무 많았습니다. 횃불언약은, 우리에게 두 가지 메시지를 줍니다. 

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횃불언약(구원약속)의 범주문제입니다. 이 점을, 특히 주목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횃불언약(곧 구원약속)을 보면, 그 구원은, 우리가 보통 말하는 個人救援이 아닙니다. 그 구원언약은, 아브라함 개인을 넘어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적인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사회적인 구원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자면, 온 人類를 향하신, 전 세계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약속입니다. 

우리의 구원신앙이, 나 혼자 예수 믿고 구원 받는, 個人救援의 차원에 머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나 한 사람의 구원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 이 시대, 우리나라, 이웃나라, 전 세계, 온 인류의 救援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개인구원은 보수적인 신앙인들이 말하는 것이고, 사회구원은 진보적인 신앙인들이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큰 오해입니다). 

횃불언약의 대상자를 보십시오. 아브라함 개인만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와 그의 후손들입니다. 바로 이점을 주목하셔야만 합니다. 

우리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와 역사, 인류를 外面하고, 나아가 우리 다음 世代들과, 人類未來歷史를 外面하고서는, 애당초 하나님 온전하게 믿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式의 믿음으로 절대로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 가만 보면, 나 혼자 救援 받고 예수 잘 믿으면 되지, 나 혼자 福 받고 잘 살면 되지, 하는 신앙일 때가 많습니다. 歷史意識이 부족합니다. 이 時代를 보는 눈이 없습니다. 미래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 믿음 내 믿음 하고 삽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에는 애당초부터 이런 식의 믿음은 秋毫도 없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구원은, 애당초부터 나와 국가와 열방의 구원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유전자변형 신앙’입니다. 아브라함과 맺으신 하나님 언약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자식 하나 없는 아브라함에게 “네 후손을 밤하늘의 초롱초롱한 별과 같이 많게 하겠다”하신 후에 주신  그 다음 언약이, 횃불언약(구원언약)인데,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브라함 ‘너 하나’ 구원하겠다 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을 포함하여, 밤하늘의 초롱초롱한 별과 같이 많아질 너의 후손, 이스라엘 나라가 애굽으로부터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신앙이, 나 중심적인 개인구원에 갇히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구원신앙으로, 우리사회의 구원신앙으로, 우리시대의 구원신앙으로, 온 인류의 구원신앙으로, 우리의 구원신앙의 지경이 넓어져야 합니다(꿈, 환상, 미래). 

일제시대, 우리 선조들에게, 이런 救援信仰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가 누리는 나라의 救援, 번영된 대한민국, 世界列邦에 福音 전하는 宣敎韓國의 福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구원신앙의 지경을 넓혀야 합니다. 나라구원도 품읍시다. 사회구원도 구하십시다. 북한 구원도 구하십시다. 우리를 압제했던 일본 구원을 위해서도 기도해야합니다. 

2.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횃불언약을 보면, 참 거북한 스캔들이 있습니다(충격적이고도 거북스러운 이야기, 스칸달론, skandalon). 그 스캔들이 무엇입니까? 횃불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 이왕이면, 아무런 고난도 없이,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주시면 안 되는 일인가요? 

굳이,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바로의 노예로 살아야만 합니까? 애굽에서의 고난 없이도,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와 같은 위대한 救援歷史를 만드실 수는 없으실까요? 
  
오늘의 우리나라의 구원과 번영, 국력, 경제력, 한국교회의 축복은, 일본식민통치라는 고난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일일까요? 6․25전쟁과 남북분단이라는 아픔이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것이었을까요?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만일, 내 인생에 고난이 없었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예수를 잘 믿으셨겠지요? 그렇지 않아도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자신하시는지요? 答이 무엇이십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에는,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스칸달론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400년 동안이나 애굽에서 고난을 당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 사실을, 아브라함 너는 똑똑히 알고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이스라엘의 400년 간 당하게 될 고난의 문제는, 언약체결 당시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 이해하기 힘든 스칸달론입니다. 

우리나라 개화기 초기 신앙인이었던 尹致昊 선생님이, 구한 末, 기우는 국운을 보며 쓴 日記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조선도 다른 나라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文明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천만 우리 겨레들도 어느 날엔 가는, 자유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자유를 누릴 날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세대가 당하던 예속의 아픔을 웃음으로 悔改할 날이 올 것입니다.] 

또 1900년 末, 일제 침략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이제 다가올 세기, 서기 20000년의 조선은 발전과 개선을 거듭하여 오늘의 조선과 비교해 완전히 새로운 나라가 될 것입니다. … 아, 이 조선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 100년 후의 그날 내 다시 조선에 되돌아오고 싶구나(그 날이, 오늘 우리 시대 아닙니까?)] 

황망한 역사의 광야에서, 100년 앞의 희망을 노래한 선견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절망의 때에, 절망 너머에서 피어오르는 역사의 희망을 본 겁니다. 윤치호 선생님이 불렀던 희망의 노래의 주인공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세계 속에서 당당하게 어깨를 겨루어 이기는 G세대들입니다. 
김연아 선수가, 올림픽 역사상 무결점 최고의 연기를 마치고, 자기도 모르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펑펑 쏟아냈습니다. 그가 한 말이 참 인상적입니다. 금메달을 딴 선수들이, 우는 것을 보면서 왜 울까? 궁금했는데, 막상 그 자리에 서 보니까, 자신도 모르는 눈물이 쏟아졌다는 겁니다(해냈다는 감격, 짐을 내려놓게 되었다는 눈물). 그 다음 말이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선수생활을 돌아보면, 기쁨은 잠깐이었고, 힘들었던 일이 더 많이 기억난다는 겁니다. 역설적인 이야기지요. 그 힘듦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자신(올림픽 역사상 최고의 무결점 연기, 그 실력)은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지요. 

눈에 눈물이 어리면, 그 눈물 어린 렌즈를 통해서 드디어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는 법입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고난을 통해서만, 까닭의 실꾸리(실패)를 감게 되고, 그 실꾸리를 감아 가다 보면, 하나님 나라 곧 약속의 땅을 일구는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권면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亨通한 날에는 기뻐하고, 困苦한 날에는 생각하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 13-4). 

고난은, 우리에게 구원의 복을 주시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스캔들). 만일, 나에게 지금까지의 고난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번영과 영광, 기쁨과 구원이 우리 것이 되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도, 예수님의 十字架 고난과 죽음을  거친 부활을 통해서 주신 축복 아닙니까? 

우리에게 주신 오늘의 번영과 축복, 국력, 우리나라와 민족의 구원은, 일제식민통치와 6․25전쟁, 남북분단, 경제적인 가난이라는 극한 고난을 통해서 주신 하나님 은총입니다. 고난을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귀히 여기는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다.  

고난 중에 계신 성도님 있으십니까? 횃불언약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고난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던, 祝福의 通路입니다. 사도 바울은, 담대하게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善을 이루느니라.” 아멘. 

사순절 두 번째 주일로, 삼일절 91주년기념주일로 예배하게 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고난을 우리민족과 구원의 도구로 쓰신 하나님의 攝理에 감사드립니다. 믿음으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어려운 시련 중에도 인내할 수 있는 믿음 주옵소서. 고난을 구원의 영광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의뢰하는 믿음의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