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 잡초 잡초
  • 501
  • 0

첨부 1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24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26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동계 올림픽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금번 동계 올림픽 최고의 히로인은 누가 뭐라고 해도 단연코 대한만국의 자랑스러운 딸 김연아 선수라고 할 것입니다. 김연아 선수의 그 멋지고 완벽한 경기와 금메달 소식에 많은 국민들은 벅찬 감격으로 함께 울었습니다. 19세 소녀가 처음 출전한 올림픽에서 그 엄청난 불안감과 중압감을 떨쳐버리고 세계 정상에 우뚝 서는 것을 보며 국민들은 마음껏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이제 김연아 선수는 대한민국을 넘어 명예와 인기 부와 미모까지 갖춘 세계적인 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김연아 선수를 바라보면서 저마다 마음에 느끼는 것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참 부럽다!’는 느낌이 아닐까요? 그러나 우리는 우리나라의 위상을 한껏 높여준 김연아 선수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할지언정 너무 부러워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왜 그렇습니까?

언제 들어도 목이 메는 감동 깊은 일화가 있지요. 아프리카에서 선교를 마치고 귀국하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선교지에 묻고 혈혈단신으로 헌 가방 하나를 들고 귀국하는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탄 비행기에는 휴가 기간 동안 아프리카에서 사냥을 하고 귀국하는 대통령이 동승하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비행장에 도착하자 군악대의 팡파르가 울려 퍼지고 비행기 트랩에 붉은 카펫이 깔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열렬히 환영을 하였습니다. 

일생을 아프리카 선교에 바치고 귀국하는 선교사에게는 환영 나온 사람 하나 없고, 앞으로 그가 어디에서 거처해야 할지도 모르고, 그저 선교부의 지시에 따라야만 할 형편이었습니다. 군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손을 흔드는 대통령의 모습과, 늙고 병든 몸을 가지고 홀로 귀국하는 자신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서 선교사님의 눈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주님께 대한 서운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 때 주님의 음성이 선교사님의 귀에 들려왔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군악대의 팡파르가 부러우냐? 네가 고향에 도착할 때에는 천군천사들의 팡파르로 너를 영접해주마. 

붉은 카펫이 부러우냐? 네가 고향에 돌아올 때에는 정금 카펫을 깔고 너를 환영해주마.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아직 고향에 돌아 온 것이 아니지 않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김연아 선수가 받은 금메달이 부럽습니까? 여러분이 끝까지 신앙생활 인내하기만 하면, 여러분은 금메달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쓰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천국에 입성하는 날은 애국가 대신 천군천사들의 팡파레로 영접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릴 영생복락은 지상의 최고 금메달리스트가 누릴 부귀영화와 감히 비교할 수 없는 만족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이 소망을 가지고 힘차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보내시며 파송 교훈을 주셨는데, 1)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고 2)가면서 전파하라고 하셨으며 3)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셨고 4)의식주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셨으며 5)어느 집에 가서든지 평안을 빌라고 하셨고 6)제자들을 환대하는 가정은 평안이 있을 것이라 하셨으며 7)복음을 거부하면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하셨고 8)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하셨으며 9)사람들을 삼가라고 하셨고 10)무슨 말을 할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으며 11)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2천 년 전 주님의 제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도 주신 교훈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제자 파송 교훈을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1. 제자가 선생 같고 종이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고 하셨습니다.

24-25절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여기에서 제자와 스승, 종과 상전 두 부류의 사람들을 대비하고 계시는데, 선생이며 상전인 예수님께서도 심지어는 ‘바알세붑’ 곧 ‘귀신의 왕’이라는 모욕과 핍박을 받으셨는데, 하물며 주님의 제자요 종인 사도들이 핍박받을 것은 당연하다는 말씀입니다. 

일찍이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선생이라는 것이 매우 어려운 신분이기도 하거니와, 삶의 참 스승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삶의 방향과 삶의 진실한 내용을 가르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의 상전 즉 주인이시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심지어 믿는 자들조차도 이 중요한 사실을 망각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스승이 예수 그리스도이기에 그분을 닮아가야 하며, 자기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기에 그분께 복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스승이시며 상전이신 그리스도께서 몸소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제자인 우리들도 주님을 위해 박해와 고난 받을 각오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고 하신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족하다’라는 말은 불평불만 없이 만족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이 주님으로 인해 고난과 핍박을 당하는 일을 당연시했고, 더 나아가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역설적인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걱정을 하고 근심하셔야지 왜 만족해하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러나 엄밀하게 살펴보면 주님을 위한 고난은 우리에게 만족하고 기쁜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주님의 제자들을 핍박하되, 자신의 동류들은 핍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제자라는 이유로 핍박과 고난과 수모를 당한다는 것은, 세상이 그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핍박당하는 성도를 주님의 확실한 제자로 인정하신다는 의미도 됩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는 때때로 “내가 정말 예수님의 제자요 구원받은 자인가?” 라고 의심을 해볼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행위와 믿음을 보면 과연 자신이 주님께 속한 사람인지 아닌지 확신이 안 설 때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를 구분할 확실한 기준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전도한다는 이유로 고난과 핍박을 당한다면,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내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증표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충성된 주님의 제자로 인정하고 높여주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성도에게 닥치는 거룩한 고난은 하나님의 제 2의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난은, 우리를 인정하시고 높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고 감사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26-31절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의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교훈하신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이 땅에서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 우리들에게도 영원한 위로의 말씀이 됩니다. 왜 우리가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까? 함께 그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모든 일이 드러날 때가 올 것이므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26절에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드러나고 알려진다는 말씀은, 단순히 진상이 밝혀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대가와 보상이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죄악이 관영하고 사단이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선악의 기준이 모호합니다. 아니 오히려 그 기준이 뒤바뀌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의로운 자로 둔갑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또 악인들의 악행은 사람들의 한계로 인해 쉽게 감추어지고 심지어는 미화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사실대로 확연하게 드러날 날이 있습니다. 바로 최후의 심판 날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셔서 만사를 다 알고 계실뿐만 아니라, 사람의 심장과 폐부까지도 다 감찰하십니다. 따라서 그 분 앞에서는 감추인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정녕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날에 모든 것을 사실대로 드러내시고, 그 사실에 따라 각각 보응하실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갚으시고,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갚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의를 행하다가 악인들의 박해로 인해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의를 행하십시다. 그리하면 하나님은 장차 우리로 악인들의 수치를 목도하게 하시고, 우리를 높여 영광스럽게 하시고 영화롭게 해주실 것입니다.

2)박해자들은 영혼까지 죽일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28절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박해의 절정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죽는 것은 우리 몸이지 영혼은 아닙니다. 성도의 영혼은 이 땅의 어떤 권세자도 박해자도 죽일 수 없습니다. 예수로 인해 박해당하고 죽으면 순교자의 영광을 얻게 되고, 둘째 사망으로 불리는 영원한 죽음의 심판에서 확실히 면제됩니다. 그러므로 박해로 인한 죽음은 확실한 영생으로 가는 특등석 티켓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3)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기 때문에 두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29절에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진행됩니다. 성도들에 대한 악인들의 박해까지도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새 한 마리의 죽는 것까지도 주관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머리카락이 몇 개 인지 몇 개가 빠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될 정도로 세밀하게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은 나를 더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3.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28절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진정 우리가 두려워할 자가 누구인지 잘 보여 줍니다. 유대의 요하난이란 랍비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랍비가 병들어 그의 제자가 병문안을 갔을 때 그가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제자가 “이스라엘의 빛 이스라엘의 오른손이요 기둥이 되시는 랍비여 왜 우십니까?” 라고 묻자, 그가 대답하기를 “만일 내가 인간의 왕 앞에 끌려가 그 왕이 내게 노해도 그 노는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요. 그 왕이 나를 옥에 가두어도 그 투옥이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 왕이 나를 사형시켜도 그 죽음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만군의 여호와 앞에 끌려갔을 때, 그 하나님이 노하면 그 진노는 영원한 것이다. 그가 나에게 죽음을 내리면 그 죽음은 영원한 것이니 내가 어찌 울지 않으랴.”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할 존재는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 불에 던져 멸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두려워하는 대상을 섬기며 그에게 복종하기 때문에, 사람을 두려워하면 사람을 섬기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므로, 사람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한 번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도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믿음을 배반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짧은 이 세상의 삶과 영생을 바꾸는 어리석은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정녕 우리는 인간의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하나님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유명한 부흥사였던 ‘디 엘 무디’는 말하기를 “만일 지옥이 없다면 성경책은 다 불태워 버려야 하고,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예배당을 건축할 필요도 없고, 있던 예배당도 오락 장소로 개조해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예수 믿을 필요도 없고, 전도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몸과 영혼을 능히 멸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고, 지옥이 있다면, 우리는 끝까지 믿음을 굳게 지키고 우리의 몸만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유명한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가 존 낙스의 묘비명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어떤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이 여기 누워있다.” 라는 글귀가 적혀있다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러한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하나님은 우리의 시인과 부인에 따라 갚으신다고 하셨습니다.

32-33절에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오늘 우리들에게 세상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시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세상에서 자신을 부인하며 비겁하게 살기 때문에, 주님은 이에 대하여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시인하지 아니하고 부인하면, 마지막 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 주님께서도 우리를 부인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은 큰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믿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에서만 믿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도 사람들 앞에서도 믿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누구도 다 하나님을 믿고 시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당 안에서만 시인하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믿고 시인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믿음은 교회에서도 필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입니다. 

성도라는 칭호를 들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그 삶을 통하여 고백하지 못한다면 그는 참된 성도가 아닐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인을 통하여 저주의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실로 두렵고 몸서리처지는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우리가 부인 된다면 그것은 영원한 죽음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제자 파송 교훈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는 특별히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총탄에 죽은 사람보다 전쟁이 몰고 오는 스트레스와 공포, 두려움으로 죽은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이는 공포와 두려움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치는가를 단적으로 증명해줍니다. 더글러스 맥아더의 말을 소개합니다. 여러분은 용기를 가진 젊은이인가, 아니면 소심한 노인인가를 자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믿음으로 살면 젊은이요, 회의로 살면 노인입니다. 당신이 신뢰로 살면 젊은이요, 두려움으로 살면 노인입니다. 당신이 희망으로 살면 젊은이요, 절망으로 살면 노인입니다.” 

딤후 1:7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함께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믿은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든지 무슨 일이든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두려움은 변장하고 돌아다니는 불신앙이다.”고 했습니다.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 바다/저 등대의 불빛도 희미한데/이 풍랑에 배 저어 향해하는/주 예수님 이 배의 사공이라/나 두렴 없네. 두렴 없도다./주 예수님 늘 깨어 계시도다./이 흉흉한 바다를 다 지나면/저 소망의 나라에 이르리라.♪ 이 찬송가 작시자의 신앙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될 수 있기를, 평강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