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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우주적 구원 (눅 4: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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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우주적 구원 (눅 4:16~21)
  

시작하는 말

성도 여러분, 지난 한 주간도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2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또한 정월 대보름이기도 합니다. 아침에 땅콩이나 호두 좀 드셨습니까? 부름깨는 소리에 잡귀가 물러간다고 하여 시작된 신앙적 행동인데, 우리 믿음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박수소리에 모든 잡귀가 물러날 줄 믿습니다. 함께 하나님께 박수로 영광돌리겠습니다. 할렐루야. 

오늘도 모여 예배하는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크고 놀라운 은혜와 복을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교회력으로는 사순절 두 번째 주일이요. 국가적으로는 3.1운동 91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특별히 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시고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시간이기를 축원합니다. 

3.1 운동 기념 주일을 맞아, 제 땅, 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쫓겨나서 집도 병원도 아닌 산간에서 감옥에서 비참하게 죽어간 수많은 선열들을 생각해 봅니다. 그 중에서도 아주 나이 어린 소녀 유관순의 이야기를 하면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열 아홉 살된 유관순, 엘리스 샤파라는 여자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서 시골학교에서 이화학당으로 전학을 합니다. 2학년에 재학중이었습니다. 

3.1 운동이 일어날 때에 유관순은 당시 어린 소녀로서 파고다 공원에서 있었던 3.1 만세 운동에 동참합니다. 그런데 3.1 운동 열흘 뒤인 3월 10일에 모든 학교가 폐쇄됩니다. 이화학당도 폐쇄됩니다. 유관순은 자기 고향 천안으로 내려갑니다. 그녀는 천안, 연기, 청주, 진천 일대를 돌아다니며 만세 운동 거사를 준비합니다. 4월 1일 천안의 아우네 장터에서 독립만세 집회를 열기로 작정하고 가슴을 조이며 다녔습니다. 그 날 천안에 삼천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삼천명이 모인 가운데 천안의 아우네 장터 옆에 있는 지평리 교회의 장로 조인원장로가 독립 선언서를 낭독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조병옥박사의 부친입니다. 유관순이라는 열 아홉 살 소녀가 삼천명 앞에서 연설을 합니다. 그날 이후 일본 경찰에 쫓기다 모두 체포됩니다. 유관순도 체포되어서 1심에서 7년, 2심에서 3년, 마지막 서울에서 있었던 3심에서 7년을 선고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갇힙니다. 얼마나 완강하게 저항했는지 일본 경찰들이 먹는 밥에 모래도 섞고, 쇳가루도 섞어서 먹여봐도 끄덕 없더라고 합니다. 

유관순 말이 ‘하나님이 시켜서 한 일을 왜 당신들이 재판합니까?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해 10월 10일 난도질 당한 끝에 유관순은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참살 소식을 접한 이화학당의 교장 프라이 여사가 일제 당국에 시신 인도를 요구했으나 거부 당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모여서 국제 여론에 호소할테니 시신을 인도해 달라고 압박을 가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시신을 인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화학당 기록에 보면 유관순 학생의 시신은 쓰레기 담는 궤짝에 담겨진채 인도를 받았는데 궤짝을 열어보니 몇 토막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토막난 시체로 인도 받았다고 되어있습니다. 선생님들이 모이고 선교사들이 모이고 동료 학생들이 모였습니다. 관을 앞에 놓고 얼마나 울었던지 시신이 눈물로 젖었습니다. 그 시신이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세상마다, 나라마다 공동체마다 이런 아름다운 순교의 이야기, 민족 독립과 자유 평화를 추구하다 순교한 이들의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우리는 오늘 3.1 운동을 경축하면서 3.1 운동은 그 자체로서는 성공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3.1 운동이 물리적으로 정치적으로 성공을 하지 못했으나 그러나 3.1 운동이 우리 독립의 얼이 되고 출발이 되어 엄청난 결과를 얻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여기에 하나님의 우주적 구원의 의지와 섭리가 함께 하셨음을 깨닫고, 새삼 감사하여 그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는 백성이 되기를 축원하는 것입니다. 

몸 말

오늘 우리에게 주신 누가복음 4장 16절 이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행하신 첫 번째 설교의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첫 설교가 이사야 61장 1-3절의 본문을 차용하고 있음에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사야는 바벨론 포로 시절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방의 말씀을 전합니다. 포고된 자에게 자유와 갇힌자에게 놓임을 선포합니다. 선포의 주인은 ‘기름 부음 받은자’ 곧 오실 메시아입니다. 이사야가 선지자로서 바벨론 속박으로 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선언했다면, 예수님의 해방 선언은 메시아로 오신 당사자로서의 선언인 것입니다. 

특별히 성경이 말하는 메시아의 해방 선포는 선민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에만 국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민의 구세주로 오신 메시아이시기에 모든 사람과 족속을, 특히 민족과 인종의 경계를 넘어 ‘가난하고, 포로로 잡히고, 눈멀고 억눌린 모든 인간의 해방과 구원자로 오셔서 그들의 해방과 구원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과 동시에 만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의 역사를 선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을 믿고, 그의 품 안에서 잘 살고 있는 백성들 뿐만 아니라 저 재난을 당하는 아이티 백성들에게도, 불안과 갈등 속에 있는 아프칸에도, 굶주림과 허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북한의 우리 형제와 자매들에게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구원의 역사는 오늘도 진행되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요!

또 하나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우주적 구원을 이루시는 수단입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4백년간 종살이를 할 때 엄청난 고통을 겪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서 가나안으로 가게 허락한 사람은 이집트의 통치자 바로왕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새로운 일을 하시는 방법은 반드시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가 배제하는 방법, 기독교적이 아니라고 여기는 방법, 우리가 기대하지 않는 방법으로 새역사를 이루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통치하에 70년이 넘는 세월을 지날 때에도 상상할 수 없었던 방법으로 그들을 해방하시고 구원하신 일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대로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통치하여 그 백성들이 포로가 되고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런데 천하의 바벨론이 쇄퇴하고 신흥제국 페르시아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 페르시아는 바벨론을 점령하고서도 그 나라의 종교를 바꾸지 않고, 이전에 있던 종교를 인정하고서 그 땅을 통치한 것입니다. 대개 식민지 통치를 하다 보면 지배국은 피지배국에 자신들의 종교와 사상과 언어를 강요하기 일쑤입니다. 신사참배도 그 일종입니다. 

그런데 페르시아 왕국은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바벨론이 가지고 있던 마르둑 종교를 인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때 유명한 왕이 한 명 등장했습니다. ‘고레스’라는 왕입니다. 이 페르시아 왕은 명령을 내렸습니다. 페르시아에 끌려와 사는 모든 식민지 민족들은 각자 자기 나라로 복귀할 수 있으며, 자기들의 신을 믿을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페르시아 제국연방에 소속한다는 전제하에서 귀국과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 것입니다. 

이 고레스 칙령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늘에서 떨어진 복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고레스 왕을 가리켜 ‘고난 받는 종’이라고 했습니다. 고난 받는 종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오시는 메시아를 지칭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고레스를 고난 받는 종이라고 칭송했을 정도로 그의 칙령은 환영을 받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소식이었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돌아왔고, 성전을 재건합니다. 성전을 재건한다는 것은 민족의 신앙을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나는 너희의 유일한 하나님이고, 너희는 선택받은 나의 백성’이라는 약속이 성취되신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말구유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를 처음 안 사람도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 동방 박사 세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 사실을 가장 널리 많이 전한 사람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라 생각지도 못했던 예수를 비난하고 반대했던 바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이렇게 우리의 상식적 범주를 언제나 초월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자기 선포도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상식을 초월하는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재건하고 하나님의 새로운 일을 이룰 메시아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 메시아가 마구간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제 첫 번째 설교를 합니다. 이사야서에 빗댄 그 첫 번 설교 내용이 오늘 읽은 복음서 본문에 있습니다. 성령이 하시는 말씀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배고픈 자는 먹어야 하고, 목마른 자는 마셔야 하고, 포로된 자는 해방을 받아야 하고 눈먼자는 눈을 떠야하고, 억눌린자는 풀려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은총의 해를 선포하는 일, 이일을 하러 내가 왔습니다.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은총의 해’란 구약에서 말하는 희년을 말합니다. 희년이란 50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것으로 그날이 되면 빚으로 빼앗긴 땅을 되돌려 받고, 빚을 탕감 받으며, 노예가 해방되는 이스라엘의 오래된 소망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날이 곧 메시아의 날이라고 생각하였고, 그 메시아를 기다려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주의 은혜의 해’ 곧 희년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도 오늘 이루어져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민중의 소망을 미래가 아닌 오늘에 연결하고 계신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은총의 해는 2010년 사순절 두 번째 주일과 3.1절을 기념해서 예배드리는 우리에게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유대 사람들만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설교이기도 합니다. 포로 된 자가 해방되는 은총, 눈먼자가 눈을 뜨게 되는 은총, 억눌린자가 풀려나는 은총, 배고픈 자가 먹게 되는 은총, 그것은 아주 단순하지만 인생의 근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은총이 오늘 우리한테서 이루어지고 일년내내 계속될 것을 믿습니다. 

여기에서 은총의 해를 서술한 몇 가지의 표현들을 설명할 필요가 있겠으나 시간상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 중에 하나를 예로 설명한다면, 눈먼 사람이 보게 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눈이 멀었을 때 보고 싶은 욕망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것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을 뜨고 있습니다만 장님일 수 있습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가슴으로 볼 수 있는 것, 양심으로 볼 수 있는 것, 그것을 보지 못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눈뜬 소경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인간의 사리사욕이라는 눈이 아니라, 그것을 한 단계 뛰어 넘어서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진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눈, 영의 눈을, 혼의 눈을 뜨게 되는 은총의 해가 주어질 것이란 해석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영적 의미를 함께 이해하며 말씀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나라와 민족을 공평하게 다스리시며(시 67:4) 억압 받는 백성의 호소와 신음을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고, 거주할 땅에 주어 살게 하셨습니다. 생명은 그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천부적 은혜와 권리입니다. 이 권리를 무력으로 탈취하거나 팔아넘기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도전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형태이든지 백성을 억압하는 무력적 통치를 배격하고 자유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땅에 사는 모든 백성의 생존권을 수호하시며 공의로 다스리시어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구원이 성취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믿습니다. 

마무리하는 말

하나님이 이토록 원하시는 이 세상의 구원과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그 절정을 이룹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때에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들과 함께 하마’ 하나님이 예수에게 약속합니다. ‘염려하지 말라. 십자가에도 함께 있겠고, 부활에도 함께 있겠고, 승천에도 함께 있겠고, 승천한 이후에도 함께 있겠다. 내 아들아,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은 이 약속에 따라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실 때 함께 하신 하나님이 너무 고마워서 그 하나님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습니까? 아닙니다. 영원하신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은 십자가에 함께 달려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죽어가는 자기 아들의 죽음을 끌어 안고 그 아들을 살려내셨습니다. 

그렇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이 약속을 받은 우리들도 똑같이 이 소망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 같은 고통에 있다하여도 우리를 살려내실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사순절 두 번째 주일을 맞아 하나님의 우주적 구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고난을 자처하는 예수님의 자기 선포를 읽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3.1절 91주년 기념 주일을 맞아 잠시이지만 이 나라와 백성들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죽어가신 많은 선열들의 피를 생각해 봅니다. 그들의 고통과 눈물 속에 함께 하시며 우주적 구원을 이루어내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아픔과 좌절 속에도 함께 하시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고 계심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개그콘서트에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이란 코너에서 박성광이 등장하면서‘국가가 나에게 해준게 뭐있어!’란 말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지말고, 국가를 위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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