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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의 평안을 누리는 성도 (요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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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평안을 누리는 성도 (요 14:27)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동경하며, 이를 위해 힘씁니다. 그러면 어떠한 삶을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하여 사람들은 다양한 답을 할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경제위주의 시대에는 행복의 조건으로 물질적인 번영을 꼭 포함시키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경제적인 것 못지않게 건강을 꼽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웰빙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웰빙이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조화롭게 잘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웰빙이라는 단어를 육체적인 건강에 주로 관련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근거로 웰빙 식품이 유행하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웰빙 식품은 몸에 해로운 인스탄트 식품과는 달리 건강을 증진시키는 질 좋은 식품을 말합니다. 그러나 정신적인 건강 없이는 진정한 웰빙을 누릴 수 없습니다. 정신이 건강하려면 우리 마음에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근래에 대통령을 지낸 사람, 기업 회장, 저명한 대학 교수, 대학병원의 의사, 인기 연예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들을 보아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조건을 갖춘 그들로 하여금 그 같은 선택을 하게 만든 것이 무엇일까요? 그 원인을 한 두 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그들의 마음속에 평안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는 경쟁시대입니다. 유년시절부터 노인이 되기까지 쉴 새 없이 경쟁에 내몰린 채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니 몸과 마음이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수고롭게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수고가 없는 삶, 진정한 안식을 누리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마귀의 꾐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이마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을 수 있는 수고로운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진노 중에서도 인생들을 배려하셔서 엿새 동안 일하고 나서는 하루를 쉬라고 명하셨습니다. 안식일이 바로 그 날입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안식일에 대하여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8)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9)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 대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몸과 마음을 편히 쉬었습니다. 수고로운 우리 인생들에게 평안을 얻도록 안식일을 명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 어느 나라에 이레 중 하루를 안식하라고 명한 자비로운 법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단지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안식일 계명을 무시합니다. 그것은 경제를 가장 고귀한 가치로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과연, 이 같은 태도가 온당한 것일까요? 그것은 평안이나 안식보다 돈을 더 귀하게 여기는 그릇된 가치관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평안과 안식보다 경제와 돈을 더 중시하는 세속적인 가치관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중시하는 성경적인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석상에서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붙잡혀서 심문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될 것이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다 근심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위로의 말씀이 요한복음 14장이며, 오늘 상고할 본문은 14장의 결론 부분에 해당합니다. 곧 주님께서는 근심하며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이 평안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샬롬”인데, 우리 성경에서는 평강, 평화, 평안 등으로 번역했습니다. 

이 시간, 저는 주의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 성도들이 알아 두어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 말씀해 드림으로 피차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참 평안과 기만적인 평안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은 참 평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에서 얻는 평안과 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나의 평안”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이므로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평안입니다. 물론, 세상이 주는 평안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평안은 언뜻 평안처럼 보이지만 거짓된 평안, 기만적인 평안입니다. 어떤 조건들이 갖추어진 상태에서만 누릴 수 있는 평안입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할 때에는 평안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을 만나면 평안도 사라집니다. 몸이 건강할 때에는 평안한데, 병들면 평안도 사라집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면 평안하지만 얻을 수 없으면 평안도 사라집니다. 이처럼 세상이 주는 평안은 조건부적인 평안입니다. 반면에,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영원불변합니다. 이 평안은 우리의 형편과 조건에 상관없이 누릴 수 있습니다. 

시편 131편을 쓴 성도는 말하기를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젖 먹는 아이는 항상 엄마 젖에 마음이 가 있기 때문에 욕구불만 상태에 있어서 평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젖을 뗀 아이는 젖을 달라고 보채지 않고 엄마 품에 안겨서 한없는 평안을 누립니다. 아이의 평안은 젖을 떼고 나서야 실현됩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도 세상적인 욕망을 버릴 때 주님의 품안에서 참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사람들에게 외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돈이 있어야 평안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말이 진실이라면, 갑부들은 다 평안한 삶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도 부모 세대보다 몇 배 더 평안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바라보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5천년 역사 가운데서 가장 부유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1959년 세계 40개국의 국민소득을 비교한 자료에 의하면, 미국이 2,250달러로 세계 1위이고, 캐나다가 1,521달러로 2위이고, 스웨덴이 1,387달러로 3위이고, 일본은 299달러로 25위이고, 한국은 78달러로 끝에서 다섯 번째였습니다. 

그런데 작년 통계를 보면, 미국이 45,845달러로 11위이고, 일본이 34,312달러로 22위이고, 한국이 19,751달러로 34위입니다. 전 세계 179개국 가운데서 34위니까 얼마나 놀랍습니까? 더구나 50년 전과 비교하면 무려 253배나 소득이 늘었습니다. 과거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큰 부자가 된 것입니다. 만약에 평안이 경제적인 형편에 정비례한다면 지금 한국인들은 평안한 삶을 누리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재산이 늘어난 만큼 마음에 평안도 늘었습니까? 

예레미야서 6장 14절에 이르기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돈을 많이 갖게 되면 평강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네가 지금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돈을 충분하게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야”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런 말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일화를 읽어보았습니다. 

어느 미국인 사업가가 남미 에콰도르에 있는 어느 아름다운 호수 근처에 갈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호수에는 작은 배가 한 척 떠 있는데, 어부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습니다. 사업가는 걱정이 되어 어부를 보고 “고기를 좀 더 많이 잡지 그러세요. 왜 더 안 잡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어부는 “더 잡으면 뭐 좋은 일이라도 생긴답니까?” 하고 대답했습니다. 

“더 많이 잡으면 돈을 더 많이 벌지 않습니까?”
“더 벌어서 좋은 일이 있습니까?”
“그렇게 번 돈으로 더 큰 그물도 살 수 있고, 배도 더 큰 걸로 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고기도 훨씬 많이 잡아서 돈도 더 많이 벌 수 있지요”
“그렇게 돈이 많으면 뭐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러면 더 이상 돈 걱정 없이 느긋하게 배를 띄워서 낚시나 하며 놀면서 살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어부가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그거야말로 내가 지금 그렇게 하고 있지 않소. 당신이 방해하기 전까지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사업가와 같이 ‘지금은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할 때야, 돈이 많아야 평안을 누리면서 살 수 있으니까’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자, 얼마를 벌면 이제 돈 걱정하지 않고 느긋한 마음으로 여유롭게 살 수 있을까요? 그 때가 언제쯤일까요? 우리는 세상이 평안의 비결이라고 속삭이는 말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참 평안은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평안은 오직 우리 주님께서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세상이 주려는 기만적인 평안을 올바로 분별해서 세상의 속삭임에 속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주의 평안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두 번 째로, 우리에게서 평안을 빼앗아 가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이 주님을 믿고 나아갈 때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평안을 부어주십니다. 그리하여 기쁨으로 이처럼 찬송합니다. 

♪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맘이 편하다 
주 예수 주신 평안함 늘 충만하도다 
나의 맘속이 늘 평안해 
나의 맘속이 늘 평안해 
악한 죄 파도가 많으나 맘이 늘 평안해“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이 찬송을 부르지 못하고,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시 42:5) 하고 탄식할 때가 있습니다. 마치 해가 먹구름에 가려서 사방이 어두컴컴해 진 것 같이, 우리 영혼의 태양이신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우리에게서 돌리신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이 불안해서 안절부절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 같은 일이 생기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탐욕이 평안을 빼앗깁니다.

디모데전서 6장에 이르기를 “9)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부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갖는 것 자체가 악이나 죄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것을 인생의 최우선 목표로 삼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돈을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는데,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 곧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을 사랑하게 되면 그로 인해 참 평안이 사라지고 맙니다. 자기의 형편이 불만스럽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낙심합니다.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평안을 누리게 되는데, 불평불만이 마음에 가득하니 평안이 깃들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돈을 사랑하게 되면 믿음에서 떠나는 비극적인 일이 생겨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님의 말씀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마 6:24). 돈을 사랑하는 것은 돈이 우상이 되고 주인이 된 것과 같기 때문에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없습니다. 돈을 주인으로 섬기면 돈이 시키는 대로 무엇이나 다 하는 사람이 됩니다. “개 같이 벌어서 정승 같이 쓴다”는 말이 있습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서 정승처럼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을지는 몰라도, 개 같이 번 돈을 가지고 선한 일을 위해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남의 것을 도둑질한 것, 도박해서 번 돈, 사기 쳐서 번 돈, 불건전한 사업을 해서 번 돈은 하나님 나라에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즉 탐욕을 버리고, 어떠한 형편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저에게 족합니다.”라고 지족하는 마음을 가짐으로 주의 평안 가운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분노와 미움이 평안을 빼앗아갑니다.

욥기 5장 2절에 이르기를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고 하였고, 잠언 10장 12절에 보니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에 분노와 미움을 방치하면 나중에는 커져서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되어 우리의 삶을 파괴해 버립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평안이 없을 때 우리는 마음속에 분노와 미움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사울 왕을 보세요. 그가 파멸한 원인은 다윗을 미워해서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했습니다. 그러나 그 미움의 불길은 다윗을 삼키기 전에 먼저 사울 자신을 파멸시키고 말았습니다. 악령이 사울의 마음을 사로잡아 번뇌케 만들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분노와 미움을 없애려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 마음을 채워야 합니다. 빛이 임하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사랑이 임할 때 분노와 미움이 사라집니다. 요한일서 4장에 이르기를 “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심판 받아 마땅한 우리를 용서하시고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할 때, 우리는 나에게 잘못을 범한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랑으로 분노와 미움을 몰아낼 때 우리 마음에 주의 평안이 새롭게 임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죄가 평안을 빼앗아갑니다.

시편 32편에서, 다윗은 이같이 진술합니다. “3)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4)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그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의 일로 범죄하고는 회개하지 않고 시치미를 떼고 버텼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의연하게 보였지만, 그렇게 꾸미면 꾸밀수록 그의 심령은 지옥과 같이 변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밤낮으로 다윗을 누르는 것 같아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아들여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 자복했습니다. 이 때의 일을 다윗은 이같이 진술합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 32:5) 다윗이 죄를 솔직히 회개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사하시고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는 장벽과 같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가 가로 막혀 있으면 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불화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에 있으니 마음이 평안할 리가 만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은 죄라도 감추어두지 말고 속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복하고 회개함으로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회복하고 평안을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영적인 태만이 평안을 빼앗아갑니다.

나태함과 게으름은 신앙생활의 적입니다. 로마서 12장 11절에 이르기를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길 때 우리 마음속에 은혜가 충만해져서 심령 천국을 이루게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섬기는 데 나태하고 게으르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뜸해져서 서먹한 관계가 됩니다. 그 대신, 세상일을 위해 바쁘게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니 세상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니 세상 욕심이 마음에 가득하게 됩니다. 성도들의 모임을 외면하고 세상 친구들과 친하게 지냅니다. 그리하여 점점 더 은혜로부터 멀어져 갑니다. 마음속에 은혜가 고갈되면 평안은 저절로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은혜와 평안은 언제나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여러분의 신앙상태가 어떠한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에 부지런하고 열심이 있는지, 아니면 나태하고 게으르지는 않은지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주님을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예레미야 29장 13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께서는 평강의 하나님, 평안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열심 낼 때 평안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세 번 째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셔서 모든 근심과 두려움을 이기게 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힘입어 근심되고 두려운 상황을 이겨낸 사례를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헤롯왕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헤롯이 베드로를 처형하려던 전날 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감옥 안에서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로 매여서 누워 잠을 잤습니다. 

아무리 강심장이라 해도 이 밤이 지나면 처형당할 것을 알면서 어떻게 잠이 오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깊이 단잠을 잤습니다. 천사가 베드로를 구출하러 와서는 그의 옆구리를 쳐서 깨워야 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주신 평안이 베드로의 마음을 주장했다는 증거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공회에 끌려가서 그를 향하여 살기가 가득해서 이를 가는 유대인들 앞에서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이신 것을 증거했습니다. 누구라도 그 같은 분위기에 직면하면 위축되고 두려움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그러나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행 6:15). 천사의 얼굴과 같이, 환하고 평안하고 권위가 나타났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스데반 집사의 마음속에 한없는 평안을 부어주셨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평강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나아갈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주님의 평강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주셔서 모든 난관을 이기고도 남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우리는 과학 기술 문명이 최고조에 달한 시대를 살아갑니다. 요즘 경제가 어렵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가장 경제적으로 부요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지금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불안하고 위태로운 시대를 살아갑니다. 전 세계인들이 테러로 인해 불안에 떨고 있으며, 실직에 대한 두려움으로 불안해 합니다. 그뿐 아니라, 온갖 이단들과 악한 사상들이 사람들의 정신을 혼란하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이 시대는 불안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을 해결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정치가들도, 경제인들도, 학자들도, 예술가들도, 종교인들도 무력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 3장 17절 말씀과 같이, 사람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 있는 성도들은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도 진정한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의 이 말씀은 오늘도 살아서 믿는 자들의 삶속에 역사하십니다. 이 설교를 경청하신 성도님 모두 주님의 평안을 힘입어 날마다 세상을 이기고 승리를 구가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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