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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충성의 향기 (계 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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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의 향기 (계 2:8~10)  


지난 한 주간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 은혜의 단비를 허락하셔서 목사인 저 뿐만 아니라 모든 교우들이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특별히 부흥회 첫 새벽에 근래 보기 드문 일이 일어났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왔는지 저희 교회 처음 온 교역자들이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시간, 시간 마다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 저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의 열심으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시간들을 우리가 경험을 했습니다. 

오늘 여기 모인 여러분도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가 되기를 갈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 역시 목회를 하면서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큰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유명한 목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나의 꿈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른 교회를 세우고 섬기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예수님이 피 값 위에 세워진 교회, 사도들이 피와 눈물과 땀으로 세웠던 하나님이 기뻐하는 건강한 교회를 열망합니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는데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방황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끝나고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난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방황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끝이 납니다. 고독과 좌절과 실망에 빠져 좌절하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 붙잡혀 주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나면 그들의 고독과 외로움은 치유가 됩니다. 신앙의 방황도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이 납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좋은 교회를 만나면 그곳에 내 영혼의 닻을 내리고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감격 있는 예배를 드리게 되고, 말씀을 들으며 심령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하게 되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무엇보다 교회의 생명은 세상과 다름에 있습니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은 세상 사람과 얼마나 다르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부흥집회때 함께 본 창세기 12장부터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자기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하나님이 그를 고향에서 불러냈셨을까요?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사람, 다른 사람이 되라고 불러낸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방인 된 우리를 예수 믿도록 불러내셨습니까? 왜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셨습니까?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불러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소개되는 서머나 교회를 보십시오. 이 교회는 살았다는 이름은 있지만 죽은 송장과 같은 사데교회와 같은 교회가 아닙니다. 또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스스로 배가 불러 자만하며 나는 이만하면 됐다는 열심히 다 식어버려서 주님이 보실 때는 다 토해내고 싶은 역겨운 교회도 아닙니다. 그리고 버가모나 두아디라교회처럼 세속화를 받아들여 문란하고 물질의 노예가 되고 자기 쾌락을 즐기는데 정신이 팔린 성도들만 득실 득실거리는 교회가 아닙니다. 이 서머나 교회는 주님이 칭찬하는 교회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한 본문을 보면, 왜 하나님이 서머나 교회를 칭찬하셨는지, 그리고 왜 이 교회를 좋은 교회라고 하셨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주님께서는 서머나 교회를 영적으로 부요한 교회라 칭찬하셨습니다. 서머나는 오늘날 터키의 이즈미르지역입니다. 이스탄불, 앙카라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에베소가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라면 서머나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해 아래 모든 도시 중 가장 아름다운 도시’ ‘아시아의 보석’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런데 서머나에는 환난과 궁핍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9절 상반절 말씀을 보면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환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받는 박해와 어려움을 말합니다. ‘궁핍’은 종교적 박해 속에서 교회가 겪는 물질적인 어려움을 말합니다.당시 서머나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대단한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서머나의 모든 시민은 매년 로마 황제 가이사를 섬기는 제단에 가서 충성의 맹세를 해야 했습니다. “가이사는 나의 주님 이십니다”라는 충성 맹세를 하고 증명서를 발급 받았습니다. 그 증명서가 없으면 시민으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한 그리스도인들은 충성의 맹세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사회에서는 예수를 믿게 되면 돈 벌 수 있는 길이 다 막힙니다.재정적으로 무척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지금도 회교권에서는 그렇습니다.또 회교권과 비교해서 조금은 신앙의 자유가 있는 이집트에서조차 예수를 믿으면 절대로 진급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그러니까 예수 믿으면 장사도 포기해야 합니다.예수 믿으면 집도 팔아야 하고 장사도 그만두어야 한다고 할 때 여러분은 그러한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신앙을 지킬 수 있습니까? 

결국 그들은 엄청난 핍박과 환란을 받았습니다. 그로인한 경제적인 궁핍함이 있는 교회입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분명히 가난한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서머나 교회를 향해 “네가 가난한 자다”라고 하지 않고, 반대로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대로 소아시아의 7곱 교회 가운데 라오디게아 교회가 나옵니다. 그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계3:17)”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3:17) 라고 책망하십니다.사랑하는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주님께서는 환난을 당하고 궁핍 가운데 있는 서머나 교회를 향해 부자라고 말씀하시고, 실제로 부자라고 여기고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곤고하고 가련한 가난한 교회라고 책망하셨을까요? 하나님 육신적인 부자보다는 영적인 부요함을 더 소중히 여기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육신적으로는 가난했지만 영적으로는 부요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고 인정하십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삶은 신앙의 연조가 풍성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식이나 은혜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피폐한 경우가 많습니다. 영적으로 궁핍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감사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것입니다. 지식이나 물질의 축복, 건강이나 가정의 평안을 주신 것에 대한 사명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왜입니까? 영적으로 빈곤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의 일을 위해 미래를 열어 가고, 이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영광 드러내는 일에 아주 인색합니다. 시간이나 물질을 사용하거나 영적인 것에 투자하는 데에도 인색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기쁨을 가지고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위로하고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는 열망과 열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가난하지만, 가난한 줄 모르고 살아갑니다. 주님 보시기에 안타까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여자의 일생", 어머니 등 주옥같은 글을 쓴 프랑스 작가 모파상(1850-1893)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실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그는 본래 신학교에 들어갔다가 퇴학당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신앙과 결별하기로 하고 자신이 주인이 된 인생을 살겠다고 결심합니다. 그후 문학에 뜻을 두고 정진하여 10년만에 유명작가가 되고 돈을 많이 모으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중해에 요트를 가지고 있었고(1800년대 말) 노르망디에 대 저택을, 파리에는 호화 아파트를 갖고 쉴새없이 애인을 바꾸며 살았습니다. 비평가들은 그에게 찬사를 보냈고 군중들은 그를 흠모했고 그의 은행에는 쓸 수 있는 여유로운 돈이 항상 넉넉했지만 그는 안질병과 불면증에 시달리기 시작합니다. 

1892년 1월 1일 새해가 밝았지만 인생의 의미를 잃은 그는 종이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합니다. 간신히 목숨을 구했지만 정신이 파탄난 그는 정신 병동에서 몇 달을 알 수 없는 소리로 허공을 향해 절규하다가 4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무덤 묘비명에는 그가 말년에 자주 외친 삶의 독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고. 그는 부자의 꿈을 이룬 것 같았으나 실상은 가장 처절하게 가난한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둘째 서머나 교회는 주님께 충성했던 교회입니다. 10절 말씀을 보세요.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여기 ‘죽도록 충성하라’는 단어를 보세요.- ‘죽도록 충성하라’ 우리들 대부분은 죽도록 충성하라는 이 말은 "죽을 정도로" 충성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죽도록"이라는 말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혹은 "죽는 그 순간에도"라는 뜻입니다.

지금 주님을 향해서 갖는 태도를 일관성 있게 견지함으로써 마지막 죽음에 이를 때에도 주님에 대한 성실과 충성을 갖고 최후의 승리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여러분, 이 충성은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내 성품상 혹은 관심에 따라 최선을 다하는 것이 충성은 아닙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 것이 충성이 아닙니다. 하기 싫고 관심이 없고 견디기 힘든 일일지라도 주님이 기뻐하는 일이라면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은 자기 의가 많습니다. 그래서 분노가 생깁니다. 교회가 왜 이 모양이냐, 목사가 이 모양이냐 하고 불평합니다만, 교회 속에는 자신도 포함됨을 알아야 합니다. 

충성의 원리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너무 감사하기 때문에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위신이나 자존심을 위해서는 공동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성도들이 있다면 온전한 의미에서 충성이 아닙니다. 나는 죽어도 나는 없어져도 나는 무시를 당해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일이라면 죽기까지 순종할 줄 아는 것이 충성입니다. 그리고 이 충성의 열정은 자기 자신을 남김없이 드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 최고의 향기가 바로 순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주님을 위해 자신의 단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아낌없이 드린다는 것, 이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잠기지 않으면, 자신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최고의 충성은 바로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기 주님은 이 서머나 교회 성도들에게 10절에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처럼 주후156년 2월 2일 사도요한의 제자로서 이 서머나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가 된 폴리캅이 순교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의 신상을 참배하기를 거절했던 폴리캅과 인근지역 성도들 11명이 유대인들의 밀고로 체포됩니다. 그러나 폴리캅의 인격과 덕망을 흠모하던 총독은 "예수를 욕하고 황제의 신상에 절하면. 당장에 풀어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86년 동안 내가 섬겨온 주님, 그분은 언제나 나를 인자로 대하셨오. 내가 어찌 그분을 모독할 수 있단 말이오" 총독이 다시 "네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너를 야수의 밥이 되게 하겠다"고 말하자 폴리캅은 조용히 "어서 맹수를 부르시오"합니다. 총독은 다시 "네가 맹수를 두려워 않으니 너를 불태우겠다"고 위협합니다. "총독이여, 잠시 있다가 꺼질 이 불보다 장차 심판을 위해 예비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불을 두려워하시오" 그의 육신이 불로 얼른 태워지지 않자 그는 칼에 찔리워 순교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자신의 삶을 드린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지난 주 부흥회때에도 보았지만,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독자 이삭을 어떻게 얻은 아들입니까?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최고의 것이고 삶의 유일한 것이며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말씀 앞에 하나님께 받은 약속과 축복도, 현재에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도 나아가 이삭을 통해서 이뤄질 미래의 모든 것도 남김없이 드렸습니다. 

더 남겨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성전에서 헌금하는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셨습니다. 그리고 과부가 엽전 한 닢을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내가 헌금하는 사람 중에 가장 많이 한 사람을 보았다.” 제자들과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앞서 제사장과 바리새인들 중에 헌금을 많이 한 사람들이 있음에도 주님은 달리 보셨습니다. “저는 구차한 중에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주님이 보시는 기준은 얼마를 넣었나에 있지 않고 무엇이 얼마나 남는가에 있었습니다. 

신앙이 성장하면 받는 신앙에서 주는 신앙이 됩니다.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없을까, 기도가 필요한 곳이 없을까, 봉사가 필요한 것이 없을까. 이와 같이 신앙이 성장하면 전에는 자기만 알아달라는 신앙에서 이젠, 남을 도울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누가 나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해도, 그리고 자신을 서운하게 만들고, 힘들게 해도, 그를 끌어 앉을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그리고 봉사의 일도 나 하나의 섬김이 모두를 기쁘게 할 수만 있다면, 이런 마음으로 누구에게 자기를 알아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감사함으로 합니다. 이것이 드림의 신앙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 교회에 충성스러운 종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주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자존심이나 이해관계가 얽혀도 끝까지 주님만을 위해 충성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자문해보십시다. 

셋째 서머나 교회는 하나님 약속을 붙드는 교회였습니다. 
자 무슨 약속이 있었습니까? 10절에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고 말씀합니다. 또 11절에 이기는 자에게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요한 계시록은 우리가 정말 두려워 할 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죽음(첫째 사망)이 아니라 죽음 다음에 오는 죽음(둘째 사망)곧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신실하게 산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없고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의 상급을 누릴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서머나 교회 성도들이 따라가고 믿었던 것은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람의 약속은 오래 못 갑니다. 증서를 쓰고 도장을 찍어도 소용없습니다. 사람의 약속을 너무 의지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은 절대 아닙니다. 자신을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세상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경험이나 물질, 지식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뜻하시면 한 순간에도 흩어지고 없어질 것에 불과합니다. 서머나 교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물질 때문에 고생하는 것도 한 순간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사람을 두고 위대한 존재라 하지 않고, 질그릇과 같이 연약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잘 깨집니다. 그러나 질그릇 속에 보배 되신 그리스도를 품고 있기에 존귀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좋은 그릇 귀한 그릇이 사용 받는 것이 아닙니다.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이 쓰임 받습니다. 좋은 그릇이지만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면 쓰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약속을 붙들고 나 자신을 날마다 믿음으로 비우지 아니하면 나도 모르는 세상 더러움이 내 마음을 차지하게 되어 더럽혀집니다. 

로마에서는 면류관을 쓰는 사람이 두 사람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황제요 다른 한 사람은 경기에서 승리한 사람이었습니다. 황제처럼 화려한 인생은 아닐찌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경주에서 승리하여 주님 앞에 영혼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받고자 하는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눈물과 탄식과 근심이 있는 이 땅에서 조금 더 잘 살면 무엇 하겠습니까? 오늘 고난과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을 향해서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이겨 나가야 합니다. 사업의 어려움에도 믿음을 잃지 않고 믿는 사람의 선한 자존심을 지켜 나가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버리지 않습니다. 

여러분, 진짜 향나무와 가짜 향나무의 차이가 언제 드러납니까? 도끼에 찍히는 순간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향나무는 찍힐수록 향기를 더욱 진동하지만, 가짜는 찍을수록 도끼의 날만 상하게 할 뿐입니다. 겉모습은 똑같아 보일 수 있지만 찍히우므로 비로소 진위가 판가름나는 것입니다. 생화와 조화의 차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진짜 꽃의 잎은 떨어지지만 인조 꽃잎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진짜 꽃은 벌이나 나비에게 기꺼이 자신의 꿀을 빼앗겨 주고 나누어주지만, 모조 꽃은 떨어지거나 빼앗길 것을 아예 소유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요즈음 조화를 얼마나 잘 만듭니까? 구별이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떨어짐과 빼앗김의 유무에 따라 생화와 조화 여부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자인가 아닌가는 평소에는 판가름나지 않습니다. 오직 결정적인 때에 드러나는 법입니다. 내 건강이, 내 재물이, 내 생각이, 내 뜻이 찍히고 떨어지고 빼앗기고 부서지고 깨어져 나갈 때, 바로 그 순간에서 마저 우리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한다면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믿고 충성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그 결정적일 때를 위해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일 때,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믿음이 필요할 때에 비 신앙적인 길을 걷는다면 우리는 아직까지 참된 충성된 신앙인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또한 세상으로 보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여러분이 가는 곳곳마다 여러분은 위대한 영향력을 나누며 살아가게 될 위대한 백성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세상을 바꿀 위대한 백성 거룩한 백성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표가 어디 있어요? 복음을 전하여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고, 고통받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끌어안고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그래서 이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위대한 일에 부름 받은 자 답게 살아가야 하지 않으십니까? 이 서머나 교회 성도처럼, 우리 교회도 충성의 향기가 온 땅에 아름답게 퍼져야 할 것입니다. 

이제 3월은 교회가 많은 사역을 감당하는 첫달의 시작입니다. 그 어떤 때보다, 여러분의 변함없는 충성이 필요한 때입니다. 정말 어설프게 한발은 세상에 딛고, 또 한발은 교회에 딛는 어정쩡한 모습이 아니라 죽으면, 죽으리다라는 일사 각오의 신앙으로 열정을 다해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 여러분의 처한 자리에서 일어나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의 구원이신 예수님을 붙잡고 힘차게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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