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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마 27: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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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마 27:11~26)


"개가 낯선 사람을 보고 짖듯이 탁월한 인물을 보고 짖는 것이 대중의 습관이다"라고 세네카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지만 세상이 그를 알지 못했습니다. 천지와 우주 만물을 지으신 이가 이 땅에 오셨는데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에 왕이 되기 위해서 오신 분은 아니십니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향해 『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마 26:24) 』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구약에서 예언한 대로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기로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 때문에 인간의 책임과 의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파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가룟 유다를 찬양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파는 유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나지 아니했으면 좋을 뻔했다고 하신 것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빌라도 총독 앞에 끌려가서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을 심문하려고 할 때, 성경에 그의 아내의 말이 기록된 것은 그녀의 말이 참이 아니라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27장 19절에 『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 』고 했습니다. 
재판석에는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예수님과 같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명절이 되면 총독이 군중들의 원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前例)가 있었습니다. 총독이 무리들에게 "너희는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냐?"라고 물었습니다. 무리들은 일제히 바라바를 놓아 주라고 했습니다. 

빌라도 총독이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고 했을 때 저희가 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빌라도가 무리들을 향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라고 하자 더욱 소리 지르며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 십자가 사건은 창세기부터 예언되었고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은 주전 700년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습니다(사 53:1-22). 
예수님이 심문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릴 때 예수님을 지지하고 따랐던 사람들은 십자가 주위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무디(D. L. Moody)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군인들은 잔인한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범법자로 보았다./ 여자들은 슬퍼하며 그리스도를 주(主)로 보았다./ 예수의 어머니는 가슴 아파하며 그리스도를 아들로 보았다./ 제자들은 난처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꺾인 소망으로 보았다./ 병 고침 받은 자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은인으로 보았다./ 백부장은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권세자로 보았다./ 제사장들은 조소하면서 그리스도를 협잡하는 사람으로 보았다./ 천사들은 놀라며 그리스도를 사랑으로 보았다./ 마귀는 당황하면서 그리스도를 여자의 씨로 보았다./ 하나님은 사랑을 품으시고 그리스도를 순종하는 아들로 보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무관심하게 그리스도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았다." 
무리들이 예수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야 된다고 하는 것은 

Ⅰ. 예수의 출생과 생애의 비천함 때문입 니다. 

1) 그는 나사렛에서 출생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45-46절에 『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고 했습니다. 
빌립의 말에 율법을 연구하는 나다나엘은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나다나엘은 메시야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미 5:2). 당시 나사렛은 갈릴리의 한 마을이므로 율법주의자의 입장에서 볼 때 멸시당해도 마땅한 지역이었습니다(요 7:52).
 
따라서 본문은 당시 율법주의자들이 갈릴리 지방을 조롱할 때 쓰던 관용어였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와 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나다나엘에게 율법의 논리로 보지 말고 예언적 논리로 성육신 하신 메시야의 실체를 보라는 말입니다.

2) 그는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55-56절에 『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6장 3절에 『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생각에 목수는 메시야가 될 수 없었습니다. 

3) 그는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태어났습니다. 
누가복음 2장 7절에 『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고 했습니다. 
그들의 메시야는 구름을 타고 영화롭게 임해야 하는데 마굿간에서 출생해서 가축과 함께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4) 그는 이 땅에서 왕국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0-21절 『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왕좌를 세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만일 예수가 메시야라면 그렇게 비참하게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교회를 출세처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교회에서 받은 복을 가지고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교회를 봉사하고 섬기라고 각양 좋은 것을 주었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각양 좋은 것을 가지고 가버립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에 『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고 했습니다. 

Ⅱ. 그의 교훈이 단순하고 직설적이기 때문 입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에 『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고 했습니다.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했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 28절에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했다고 했습니다. 
요한1서 3장 15절에 『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4절에 『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8장 21-22절에 『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48-50절에 『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청중들이 기대하는 말을 하지 아니했습니다. 
현대인들은 직설적인 권고나 회개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을 구하는 능력인 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16절에 『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마 22:18). 그들이 어떻게 하여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한지 불가한지를 물었을 때 예수님은 그들이 감히 예측할 수 없는 대답을 했습니다. 
그들이 국가에 세를 바치는 질문에 대하여 마태복음 22장 20-22절에 『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고 했습니다. 

부활이 없다하는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해 마태복음 22장 29-30절에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고 했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을 꾸짖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3-24절에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33절에 『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라고 했습니다. 저들의 영적무지를 공격했습니다.
마태복음 15장 14절에 『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라고 했습니다. 

Ⅲ. 그의 요구가 고상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9장 20-21절에 『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라고 했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이렇게 어렵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4절에 『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얻기 위해 버릴 것을 요구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9절에 『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고 했습니다.
의식주를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마 6:25-32).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최우선 추구하라고 했습니다(마 6:3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고 했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했습니다(마 7:13-14). 

저들이 고대하던 메시야는 모든 공포와 불안을 물리쳐 주는 화평의 왕으로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역설적인 교훈을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집과 식구를 원수라고 하므로 가정의 화목을 파괴하는 혁명적 발언을 서슴지 아니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4-39절에 『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했습니다(마 9:13).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했습니다(마 11:19). 어린 아이들이 천대받고 사람 대접받지 못하는 시대에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 3-4절에 『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형제가 내게 죄를 범했을 때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 22절에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은 용공성이라고 하면 색깔론으로 지탄을 받으니 자유주의라고 해야 한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직설적인 것에 일단 거부감을 느낍니다. 현대인들은 주님의 말씀에 몹시 갈등하면서 이른바 세속적 편의주의와 하나님의 말씀, 두 가지를 다 만족시키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이렇게 되니 결국 껍데기는 그대로 놓고 속은 달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형식만 있고 내용은 달리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입니다. 
세종시대 중기에 윤회(尹淮), 신장(申檣), 남수문(南秀文)등은 집현전의 최고의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술을 좋아해서 세종은 이들을 3주호(三酒豪)라고 불렀습니다. 

세종은 이들을 아끼는 마음에 이들에게 세 잔 이상은 마시지 말라고 권고했습니다. 이들은 세종의 하교를 받들어 어떤 경우든지 세 잔 이상을 마시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나서 잔을 양푼으로 바꾸어 형식은 그대로인데 내용은 세 양푼을 마셨습니다. 결국 이들은 술 때문에 죽고 말았습니다. 이때 세종은 술의 해악에 대한 경계의 윤음을 내리게 됩니다. 인본주의 교인은 형식은 그대로인데 내용은 계획적으로 달리합니다. 

예수님의 출신과 생애의 비참함이 배척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이 단순하고 직설적이라고 해서 신성모독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요구가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야 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겉으로 나타나는 것 가지고 모든 것을 싸잡아 생각하는 영적 암매는 철저히 배격해야 합니다. 영국 속담에 "선입관은 그 사람의 일부분도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형식(formality)은 필요하지만 형식주의(formalism)는 철저히 배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에 비중을 두어야 합니다. 교회의 본질(essence), 그것에 비중을 두어야 합니다. 

누가 전하는 말씀이냐, 어디서 전하는 말씀이냐에 비중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족보에는 이방 여자도 있습니다. 말구유에 나시고 나사렛 동네에서 목수의 아들로 성장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는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악인을 심판하시는 의의 재판장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시작이요 마침입니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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