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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평강을 얻는 비결 (빌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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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평강을 얻는 비결 (빌 4:4~7)


오늘날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것은 평화, 평안, 평강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평강을 물질이나 권세, 또는 명예나 지식, 건강한 육체, 미모를 통해서 얻으려고 한다.
세상이 주는 평강은 일시적이고 표면적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은 영원하며 본질적이고 완전한 것이다. 

본문의 평강은 “우리가 처한 어떠한 상황가운데서도 마음이 요동하지 않고, 고요한 평정과 기쁨을 누리는 평안함”을 말한다. 따라서 이 평강은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선물이다. 

진정한 평강은 돈으로 사는 것도 아니며, 힘으로 빼앗는 것도 아니고, 지식으로 얻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얻는 비결은 무엇인가? 

1.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삶

빌립보서에는 “기뻐하라”는 말씀이 18번이나 기록되어 있다. “항상”이란 한 순간도 예외 없는 모든 시간 전부를 의미한다. 상황이 좋을 때나 좋지 않을 때도 기뻐하라는 것이다.  

사실 아무런 생각도 없는 바보가 아닌 이상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는가? 바울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주 안에서”라는 단서를 붙인다. 인간의 힘으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주 안에서”는 가능하다.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이다.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의 하나가 “희락” 즉 “기쁨”이다.  그러나 진정한 평안과 자유와 기쁨은 “주 안에서만 얻어지는 것”이다.

빌립보 옥중에 있는 사도바울로서는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기쁨이 충만했던 것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쁨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참된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주안에서 기뻐하는 것은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요, 구원, 천국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다. “주안에서”라는 말은 “주님 때문에”라는 말이다.


2.관용하는 삶.

여기 “관용”이란 말의 원어의 뜻은 “양보하다.” “관대하다.” “참을성 있다.”라는 뜻을 가진 말로,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인자한 태도”를 말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나의 권리를 기꺼이 양보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관용과 친절을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을 좁게 쓰면, 기쁨을 빼앗긴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하늘의 권리를 포기하셨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의 권리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항상 시시비비를 따지고, 자기의 권리를 전혀 양보하지 않을 때,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 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자기 자신의 생각과 주관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 삶이 아니라 마음을 넓히는데 있는 것이다. 고후6:13=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바울은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말함으로 관용의 폭을 넓게 말하고 있다. 여기 “모든 사람”이라는 말 속에는 “나를 반대하고, 핍박하고, 괴롭히는 사람”까지도 다 포함한다.

관용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① 너그럽게 믿어주는 것 ② 너그럽게 감싸주는 것 ③ 너그럽게 용서하는 것

예수님은 마5:5에서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 관용은 넓은 마음이요 온유한 마음이다.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할 이유는 주님께서 가까우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행한 대로 심판을 받아 그에 상응하는 상급을 받게 된다. 관용을 많이 베푼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역시 많은 관용을 받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을 돌로 치려고 유대인들이 몰려왔을 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다. “관용을 베풀라”는 것이다.


3. 염려대신 기도와 간구로 감사하는 삶.

“염려”란 자신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문젯거리로 인식하고, 근심하는 것이다. 염려는 평강의 적으로서 스스로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물질계를 향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염려를 정의하기를 “어떤 주어진 상황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느낄 때의 감정”이라고 말한다.

Oswald Chambers=염려는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신뢰의 결핍이며, 하나님께 대한 일종의 무의식적인 모욕.

어느 때 염려가 되는가? 내가 해야 할 일은 많고, 나의 능력이 모자라거나 준비가 미흡할 때 염려하게 된다. 그 때 그의 마음이 세상을 향하면 염려가 되고, 하나님을 향하면 기도가 된다. 

하지만 염려는 패배를 가져오고, 기도는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온다. 내 힘으로 모든 것을 처리해야 된다면 나는 염려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가 아니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이다.

염려는 상황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염려 대신에 우리는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기도란 무능력한 인간이 절대능력자이신 하나님께 믿고 맡기는 것이다. 기도는 곧 하나님의 능력이다.

평강을 원하는 성도들은 염려할 일이 있어도 그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기도해야 된다.
염려의 치료가 기도이다. 벧전5:7=너희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여기 성경에 “기도”와 “간구”라고 하였다. “기도”는 일반적인 것이다. 그러나 “간구”는 간절한 기도이다. 

그런데 기도와 간구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였다. 그것은 

①하나님께서 그 기도와 간구를 응답하여 주실 것을 믿는 믿음과 신뢰. 
②그 응답에 대해 어떤 결과가 오든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감사하게 받는다. 

그렇게 할 때 어떠한 결과가 오는가?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고 했다.  
때문에 염려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기도요 간구이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도록 하는 것이 바로 기도와 간구이다. 하나님이 처리하셔야 할 일을 주제넘게 내가 처리하려고 하니 필연적으로 염려가 따라오는 것이다.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고 약속하셨다. 그 말은 “인간의 모든 상상을 초월한”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주시는 평화는 인간적인 계산이나 상상, 또는 계획을 완전히 초월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의 마음과 생각, 즉 우리의 내면세계까지라도 지켜 주신다. 여기 “지키신다.”다는 말은 군대용어이다. 출입문을 보초가 지키는 의미의 말이다.

그런데 이 평강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오는 평강.”이라고 했다. 그리스도 예수 밖에서는 기쁨도 없고, 평강도 없다. 
염려만 하고 기도와 간구를 모르는 사람은 세상을 헛사는 것이다. 자연법칙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염려를 해결할 수 있는 기도와 간구라는 열쇠를 주셨다. 믿는 우리에게만 주셨다. 이것을 쓸 줄 아는 사람은 평강의 삶을 살 수 있다.


결론.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평강의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①주 안에서 기뻐하고
②모든 사람에게 관용하며
③염려 대신 기도와 간구로 참된 평강을 누리고 사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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