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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이 좋다는 참 의미 (딤전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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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좋다는 참 의미 (딤전 1:3~7)


제가 어렸을 때는 지금보다 더 저돌적이고 전투적이었습니다. 제 안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주먹을 쥐고 싸운 것은 아니지만 말의 싸움이고 이론의 싸움이었습니다. 제 마음속에는 분명한 전선이 그려져 있었고 누가 하나님의 적인지 누가 복음의 적인지 저는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하나님의 전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직도 어느 정도의 싸움은 남아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과거에 소위 진리의 이름으로 사람들과 다투던 것을 저는 후회합니다. 당시 저는 하나님을 위해서 그 모든 일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돌아보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고 저를 위한 것이었고 저의 자존심을 위한 것이었고 저의 생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 사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젊었을 때에도 그에게는 많은 다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일 때 바울은 그 일에 일조했습니다. 자기가 직접 돌을 던지지는 않았지만 돌 던지는 사람들의 옷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왜 옷을 지켰는지는 저도 궁금합니다. 누가 훔쳐 갈까봐 지켰는지, 귀중품을 보호하려고 지켰는지. 아마 돌 던지는 것까지는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그 마음속에는 이 돌 던지는 사람과 같은 분노와 미움과 그리고 자기가 생각하기에 어떤 의로움이 그에게 있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바울이 교회를 핍박하러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하시는 첫마디 말씀이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예수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이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라는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에게는 큰 충격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순간에 바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구세주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 뿐만이 아니고 자기가 지금까지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예수님을 대적하고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큰 충격이 되었습니다. 그의 일평생 두고두고 충격으로 남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인간이 신앙적으로도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의 신앙적인 행위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고 그래서 복음의 진리를 정립할 수 있는 적합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으려고 한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허무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되고 믿음으로, 은혜로, 선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이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래전에 한경직 목사님이 토론토에 오셔서 부흥회를 인도하실 때를 기억합니다. 아마 1975년, 76년쯤이었던 것 같은데 한 목사님은 마지막 날에 사랑에 대해서 설교하셨습니다. 빌리 그레함 목사님도 여의도에서 집회를 하실 때 마지막 날 설교를 사랑에 대해서 하셨던 것을 기억하는데 한경직 목사님이 한국의 장로교가 분열된 것에 대해서 애석해 하시는 말씀을 하시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결과는 교단을 분열시키고 교회를 분열시킨 것뿐이다, 그것을 당신이 후회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인이 하나가 되는 것은 어렵습니다. 원래 인간은 고집스러운 존재입니다. 신앙이 있든지 없든지 원래 인간은 고집스럽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있는 인간은 더 고집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자기편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은 타협이라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타협이라는 말이 별로 흡족하지 않다면 적어도 대화는 할 수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상대방의 말을 들을 수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그리고 자기가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해야 될 것이 아닙니까. 

저는 지금껏 살면서 제일 존경스러운 사람은 자기가 틀렸다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만약 아버지가 자식에게 ‘얘야, 애비가 틀렸다 애비가 잘못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이 만 가지 잔소리보다도 더 효력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선생님이 학생에게 ‘얘들아, 선생님이 틀렸다.’ 이렇게 인정할 수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 교육적인 가치가 있겠습니까. 

목사도 마찬가지에요. 목사도 때로는 틀립니다. 다만 그것을 숨기는 것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지도자도 때로는 ‘내가 틀렸습니다. 나는 그게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았는데 나는 그게 하나님의 음성인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 짚었습니다.’ 이렇게 인정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사람을 존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종교인들은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모든 종교는 자기가 결코 틀렸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남이 틀린 것입니다. 남이 잘못하는 것입니다. 남이 나쁜 놈입니다. 내가 옳습니다. 나만이 옳습니다. 세상에 신앙이라는 것이 사람을 이렇게 고집불통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거기에서 무슨 사랑이니 겸손이니 온유함이니 자기 부인이니 십자가니 이런 말할 여지가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을 보면 무엇을 위해서 싸우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어요. 투쟁을 위한 투쟁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치라는 것이 원래 타협으로 하는 게 아닙니까. give and take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정치를 하는 것인데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은 그게 없고 투쟁 일변도이고 정치인들은 웃는 것도 잊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웃지 않습니다. 선거할 때만 웃고. 그리고 어색하게 웃는데 그게 봐도 어색합니다. 웃고 싶지 않은데 웃는 것, 그게 눈에 보입니다. 같은 나라의 정치인들이 만났을 때도 안 웃는다면 장차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남의 나라 대표를 만날 때는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같은 당 사람들과도 웃지 않는다면, 같은 한국 사람과도 웃지 않는다면 외국, 남의 나라의 이익을 대표하는 사람을 만나서 어떻게 악수를 하고 어떻게 웃고 어떻게 사진을 찍으려고 합니까. 

도대체 국가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국민들에게 무슨 본을 보이고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우리나라의 수준이 그것밖에 되지 않는다면, 적어도 누군가는 내가 틀렸다, 당신이 옳다, 당신이 나보다 의롭다, 그렇게까지는 말할 수 없더라도 적어도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는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종교인들은 한술 더 뜹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개신교 역사가 한 백이십년 정도 됩니다. 기독교가 이천년이라는 것에 비교하면 한국의 개신교는 역사가 짧습니다. 그런데 그 짧은 기간 동안에 교단이 몇 번이나 갈라졌는지 아십니까. 생각해보면 놀랄 노자입니다. 해방 후에 장로교와 고신이 갈라졌지요. 그리고 예장과 기장이 갈라졌습니다. 그리고 통합과 합동이 갈라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예수와 그리스도가 갈라진 유일한 나라라고. 왜냐하면 같은 장로교인데 예수교장로회가 있고 기독교장로회가 있습니다. 예수와 그리스도가 갈라진 것입니다. 

장로교만 그런 게 아니에요. 침례교에도 기침이 있고 예침이 있습니다. 성결교에도 기성이 있고 예성이 있고 순복음에도 기하성이 있고 예하성이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렇게 갈라지는지 알 수가 없는데 과연 그것이 교회를 갈라가면서까지 고집해야만 하는 일인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일치를 위한 일치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에요. 

에큐메니칼 운동이 비판을 받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소위 교회일치를 이뤄내기 위해서 에큐메니칼 운동은 아주 중요한 것들을 타협했습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기독교를 사회주의로 전락시켰다고 비판하기도 하고 기독교를 정치운동으로 전락시켰다고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그건 우리가 원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사람들 간에 협력과 한마음을 도모해야 되는 데 그게 아니고 불필요한 다툼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이 시대에만 일어나는 게 아니고 초대교회에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이 디모데서를 쓴 것입니다. 그가 디모데에게 한 말이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그 말은 논쟁을 불러일으킨다는 얘기입니다. 싸움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는 신화와 끝없는 족보는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지만 오늘날도 신화 같은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말씀보다 사람들이 재미있게 듣는 그런 얘기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결코 꿈꾼 얘기 같은 것을 하지 않습니다. 했는데 후회했습니다. 왜냐하면 교인들이 성경이야기는 재미없게 듣다가 꿈 꾼 얘기를 하면 눈이 둥그레져서 듣습니다. 왜 그럴까. 왜 그런 것이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더 불러일으킬까. 

제가 신학생때 섬기던 교회는 LA 코리아타운에 있는 교회였는데 그 교회에 시한부 종말론이 침투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예수님이 1988년도에 재림할 거라고 예언했습니다. 당연히 틀린 예언이지요. 예수님은 그때 재림하지 않으셨으니까. 그 청소년들이 평소에는 별로 열심을 내지 않다가 예수님이 언제 재림한다고 하니까 그렇게 호기심을 가지고 그렇게 거기에 동요되는 것을 보고 제가 정말 실망했습니다. 아, 인간이 이처럼 극단적인 센세이션 한 것에 움직이고 하나님의 일반적인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구나! 바로 사도바울이 이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제 목사 친구 하나는 자기 형과 만나면 대화가 반드시 신앙 쪽으로 흘러간대요. 그리고 신앙 얘기를 하면 반드시 방언 얘기가 나온대요. 그러면 그 형은 예수 믿는 사람은 반드시 방언을 해야 된다고 우기고 자기는 안 그래도 된다고 우겨서 결국은 늘 말다툼을 한다고 합니다. 방언도 중요하지만 그게 형제간에도 이렇게 갈등을 빚는다면 남남끼리는 오죽하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얼마나 그리스도인끼리 사실은 작은 것을 가지고 큰 것을 잃는지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 잘 믿는 것이냐 하는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잘 믿는 것이냐. ‘여러분은 잘 믿고 계십니까?’ 이런 질문을 하면 사람들 대부분 자신이 없습니다. ‘나는 잘 못 믿어요.’ 이유를 물어보면 주로 난 기도를 많이 안한다느니 교회를 자주 빠진다느니 그건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잘 못 믿는다고 대답하는 게 낫지 ‘나는 잘 믿어요.’ 얄밉지 않습니까. ‘나는 잘 믿어요.’라고 대답하는 것보다 ‘나는 많이 부족합니다.’ 그게 겸손한 것이지요. 그래야 뭔가 배울 수 있는 게 아닙니까. 목사라고 잘 믿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다 잘 못 믿어요.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잘 못 믿기 때문에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잘 못 믿기 때문에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아직 잘 못 믿기 때문에 발전할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가나안 땅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갈 길이 멉니다. 그러나 가는 중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아직 도착하지 못했지만 가는 중입니다. 언젠가는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아직 이루지 못했어요. 아직 끝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도 끝나지 않았고 내가 할 일도 끝나지 않았어요. 앞으로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부족하지만 내일은 오늘보다 내년은 올해보다 더 성숙하고 자라나고 더 잘 될 줄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게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소망. 

그런데 우리는 목적보다는 목적을 이루는 수단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아요. 목적보다는 목적을 이루는 방법에 더 관심을 갖고 더 거기에 매달리고 그것을 자랑하려는 속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축구경기에서의 목적은 골을 넣는 것입니다. 골을 넣어야 이깁니다. 그런데 중거리 슛을 차든 헤딩을 하든 오버헤드킥을 하던 골은 한 점입니다. 멀리서 찼다고 두 점 주지 않습니다. 멋있게 찼다고 세 점 주지 않습니다. 멋있게 쏘든 그냥 밀어 넣든 한 점은 한 점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숙련된 선수들을 보면 별로 힘주지 않고 살짝 차서 넣습니다. 그런 선수들이 정말로 잘하는 선수들입니다. 저는 축구 안한지 오래됐지만 뻥뻥 지르니까 이상한 데로 날아가더라구요. 아주 힘차게 차면 이상한 데로 날아가는데 정말로 잘하는 선수들은 살짝 밀어 넣으니까 골이 됩니다. 골을 넣는 게 목적입니다. 어떻게 넣느냐,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공을 띄울 수도 있고 땅볼로 찰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넣는 것입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그 목적을 이루는 수단에 연연하다보니까 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우리교회처럼 믿어야 된다, 우리처럼 믿는 것이 잘 믿는 것이다, 나처럼 신앙생활 해야 된다, 이 교회를 한번 구경해 봐라,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떠들고 시끄럽고 자랑하는 많은 것들은 결국은 골을 넣는 것보다는 골을 넣기 위한 방법, 테크닉 여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돼요. 결국 땅볼이든 공중에 띄운 볼이든 들어가는 것은 마찬가지라면 그렇다면 방법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떻게 보면 시끄럽고 요란스러운 방법이 점잖고 조용한 방법보다 더 효과적이지 않다면 그건 그냥 시끄러운 쇼일 뿐이지요. 요즘에 신학생들은 공을 넣는 것보다는 누구는 어떻게 넣었다, 누구는 어떤 기교를 쓴다, 이걸 흉내 내려고 하는데 우리는 ‘목적이 이끄는 삶’ 그런 책 제목이 있는 것처럼 목적이 분명하고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그렇기 때문에 ‘경계의 목적은’ 경계라는 것은 가르침이라는 얘기입니다. 목회라는 뜻입니다. 목회의 가르침의 목적이 무어냐 그 목적을 세 가지로 제시했는데 5절에‘ 첫째는 청결한 마음 둘째는 선한 양심 셋째는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진다’고 했습니다. 그건 그때나 오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 잘 믿는 것은 이 세 가지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이 세 가지를 벗어나면 아무리 꽹과리를 치고 아무리 시끄러워도 벗어난 것입니다. 

선한, 청결한 마음.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청결한 마음. 예수 믿는 사람은 그 마음이 청결해야 됩니다. 마음이 꼬인 것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꼬인 것이 있으면 풀으셔야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풀어야 됩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용서하셨는데 우리가 서로를 용서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용서 못하는 것은 죄입니다. 용서 못하는 것은 나에게 손해입니다. 내가 마음에 꼬인 것을 풀지 않기 때문에 병이 낫지 않고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마음에 평강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꼬인 것을 풀지 않는 데에 내 인생의 문제의 근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결한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선한 양심입니다. 선한 행위를 말하지 않았어요. 선한 양심. 사람이 행위적으로 선할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한 양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입니다. 믿음이 정말로 있다면 그것이 사랑을 낳습니다. 나는 사랑이 없다고 염려하지 마세요. 여러분에게 믿음이 없는 것을 염려하세요. 믿음이 생기면 그것은 사랑을 낳습니다. 이것이 기준입니다. 잘 믿는 기준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잘 믿는 것이 무엇이냐를 생각하는지 아세요? 신앙인에 대해서 실망할 때입니다. 신앙인에 대해서 실망할 때 우리는 잘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냐를 생각하는데 그 해답이 여기 있는 것입니다. 청결한 마음, 선한 양심, 거짓이 없는 믿음, 여기에 참된 기준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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