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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를 회개하는 교회 (계 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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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회개하는 교회 (계 2:12~17)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박해할 때 관리는 체포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름과 국적을 물었다고 한다. 그때 그리스도인들은 공통적으로 “나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비슷한 예가 나치 독일 때 처형된 대지주이며 귀족이었던 헬무트 몰트케(Helmut von Moltke)의 이야기에도 나온다. “너는 독일 사람으로서 히틀러 총통에게 속하지 않았단 말이냐?”는 나치 관리의 질문에 그는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사형장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의 뜻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 역시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가 나타나고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곳이어야 한다. 교회와 그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이 사명이다.

오늘 본문의 버가모 교회는 주님께로부터 칭찬과 책망을 다 받은 교회이다. 이 버가모 교회는 핍박과 순교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킨 교회였다. 그러나 또한 주님께로부터 회개하지 않으면 칼로 심판하리라는 준엄한 책망도 함께 받았다. 그들 중에 더러운 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버가모 교회는 언제 누가 세웠는지 기록이 없고 다만 바울에 의해서 세워졌다고 추측될 뿐이다.

버가모는 에게 해에서 내륙으로 약 24km정도 들어온 높은 언덕 위에 있는 도시이다. 당시 이 버가모라는 도시는 세 가지의 특징이 있었다. 첫째, 권력과 정치의 도시였다. 로마제국이 아시아 전체를 통치하기 위한 총독부가 이곳에 있었다. 그러므로 이 도시에는 항상 공포의 분위기가 있었고 황제숭배를 강요받았다. 

둘째, 문화의 도시였다. 알렉산드리아 다음 가는 도서관이 있었는데 20만권 이상의 양피 두루마리가 있었다고 한다. 양피 두루마리는 파피루스보다 고급으로서 이곳에서 처음 개발되었다. 버가모는 오랫동안 지식과 문화의 영광을 누렸다. 

셋째, 종교중심의 도시였다. ‘버가모’란 ‘결혼’이란 뜻으로서 이곳에는 세상의 모든 종교가 결혼한 것 같은 종교적 혼합이 있었다. 특히 제우스 신전과 치료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신전이 유명했고 그 외에도 황제숭배 신전, 아테네신전, 디오니소스신전 등과 무수한 우상이 있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고 하셨다. 그만큼 그들이 있는 곳은 우상숭배의 유혹과 위협이 많아서 마치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 같았다.

이런 버가모 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좌우에 날이 선 검을 가지신” 분이시다. 즉 선과 악,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권세를 가지신 주님으로 나타나신다. 당시 로마총독들 중에는 간접통치를 하는 문관총독과 직접 칼을 휘두르는 무관총독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칼을 가진 총독보다 그리스도는 더 큰 권력을 가지신 좌우에 날이 시퍼렇게 선 칼을 가지신 분으로 버가모 교회에 나타나셨다. 

버가모 교회에 대한 주님의 칭찬
“13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우상숭배자들이 가득한 곳에서 충성된 증인 즉 믿음의 사람인 안디바가 우상숭배를 거부하다가 순교당할 때에도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죽음은 최대의 위협이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즉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의 위협 앞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버가모교인들은 안디바라는 성도의 순교의 죽음을 보고서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버리지 않고 굳게 잡아서 믿음을 지켰다. 위대한 믿음이다. 

죽음을 초월한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다. 더 이상 위협할 방법이 없고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은 강한 것이다. 믿음의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를 따르기 위해서는 목숨을 잃을 각오도 해야 한다. 믿음을 지키려 하다가 믿음 때문에 죽임을 당하더라도 다시 살아나서 영생과 생명의 면류관을 받으리라는 믿음과 소망을 가져야 한다. 믿음의 길을 가면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버가모 교회처럼 주의 이름을 끝까지 붙들고 나가라.

이들에 대한 주님의 책망
“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순교의 위협과 싸우면서 교회의 믿음을 지키는 동안에 한쪽에서는 유혹이 들어와서 성도들을 넘어지게 한 것이다. 

“발람의 교훈”이 무엇인가? ‘발람’은 민수기 22장-25장에 등장하는 선지자이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광야 길을 걸어갈 때 모압 왕 발락이 발람에게 돈을 주면서 이스라엘을 저주해달라고 했다. 발람은 하나님이 가지 말라고 하시는데도 고집을 부리고 갔지만 하나님께서 막으셔서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고 오히려 복을 빌게 되었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공격하는데 실패한 그는 얼마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압 족속의 신전제사에 초청해서 우상숭배와 모압 여인과의 음행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수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 이것이 발람의 길이다. 이것이 발람의 교훈이다. 돈에 팔려서 믿음과 하나님을 저버리는 행위이다. 우상숭배를 받아들이고 정욕에 빠져 더러운 죄를 짓는 것을 말한다. 

또 ‘니골라당’은 영지주의 이단이다. 영지주의란 성도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육신에 속해 있는 동안 무슨 죄를 지어도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는 이단이다. 그래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나 음행 같은 육체에 속한 행위를 따르는 생활을 죄로 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세속주의를 말한다. 

이것이 버가모 교회의 영적 현실이었다. 즉 그들은 교회 밖에서 오는 핍박과 위협은 잘 견디고 믿음을 잘 지켰지만 내적 유혹에는 쉽게 넘어가서 죄를 짓고 실족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가? 사탄은 외적 공격과 핍박으로 교회와 성도를 이기지 못하면 작전을 바꾸어서 내적 유혹으로 넘어뜨린다. 

그들은 신앙에 대한 핍박은 믿음으로 맞서 싸워서 잘 견디고 이겼는데, 정작 작은 유혹에 어처구니없게 넘어가서 죄를 짓고 넘어졌다.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서는 믿음의 능력으로 이겼지만, 정욕의 유혹에는 우습게 넘어가서 충신의 아내를 범하고 그 죄를 숨기기 위해 그의 남편까지 죽이는 죄를 지은 것과 같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떤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삶은 어떤가? 진정으로 하나님만 섬기며 사는가? 욕심과 정욕의 유혹을 물리치고 이기며 사는가?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른 신에게 절하는 겉으로 나타나는 우상숭배의 죄를 짓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보다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하고 더 귀중하게 여기고 하나님 대신 따라가는 보이지 않는 우상을 섬기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빠지기 쉬운 가장 큰 우상은 바로 물질의 욕심이다. 사람들이 입으로는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하면서 마음속으로는 돈 없이는 못 산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귀중하게 여기고 더 의지하며 산다. 그래서 살기 위해서 신앙을 버릴 수는 있어도 돈을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질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떠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을 위해서 물질을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이 바로 우상에게 절하고 섬기는 죄인 것이다.

또 하나는 도덕적 타락 즉 성적 타락이다. 발람의 교훈이 우상숭배와 음행이듯이 오늘날 이 세상에서의 가장 큰 유혹은 성적인 유혹과 성적인 타락이다. 교회만은 이런 문제에서 자유롭고 그리스도인들만은 이런 문제에서 깨끗해야 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요즘 사람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선을 넘는 것이나 이미 결혼한 사람들끼리 선을 넘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세상의 더러운 흐름이 교회 안에까지 들어와서 교회와 성도를 더럽히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런 더러운 죄를 짓고도 양심의 가책도 없이 아무렇지 않게 교회생활을 한다면 오늘날 과연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이 말씀은 버가모 교회 전체가 이런 우상숭배와 행음에 빠졌다는 뜻이 아니다. 한쪽에서는 순교의 위협이 있을 때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키기를 힘쓰고 있는데, 한쪽에서는 우상숭배와 음행의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짓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탄이 교회와 성도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양면작전을 쓴 것이다. 

그리고 이런 죄들이 교회를 교회되지 못하게 하고, 성도를 성도되게 하지 못하고 세상과 맞서 싸우고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영적 능력을 잃어버리게 한 것이다. 온 교회가 힘을 합해서 사탄의 공격과 순교의 위협과 핍박에 맞서 싸워야 할 때에 한쪽에서 더러운 유혹에 넘어간 사람들이 교회를 약하게 만든 것이다. 이런 더러운 죄들에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서 교회를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회개하라
주님은 이렇게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들을 향해서 “회개하라”고 하신다. “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내 입의 검”이란 주님의 말씀의 검이며 성령의 검이다. 주의 말씀으로 그들을 판단하시고 그들의 죄를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의 칼로 그들을 벌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가 없이는 구원이 없다. 회개하고 돌이키는 사람에게만 구원이 주어진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심판만 남아 있다. 그리고 회개에는 때가 있다. 오래 참음으로 기다리시고 경고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지금 즉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 만약에 하나님의 자비를 무작정 믿고 회개하지 않고 마음 놓고 계속 죄 가운데 있으면 결국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고 심판하신다. 

회개란 무엇인가? 돌이키는 것이다. 방향전환이다. 죄를 버리고 옛 생활을 버리고 새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버지를 거역하고 집을 나간 탕자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아오자 아버지는 무조건 용서하고 받아주었다. 우리에게 아무리 큰 죄가 있더라도 우리가 뉘우치고 돌이키기만 하면 하나님의 넓으신 사랑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신다. 이는 성도의 특권이요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이다. 그러나 이 사랑을 믿고 방종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회개에는 단계가 있다. 첫째, 나의 죄를 깨닫는 것이다. 내가 죄를 지었고 내게 회개할 죄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회개하지 않는다. 믿음이 살아 있다는 증거는 내가 죄인인 것과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가를 깨닫는 것이다.

둘째, 내가 지은 죄를 죄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죄를 지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 죄를 깨닫고도 교만해서 그리고 고집을 부리면서 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손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겸손히 내 죄를 인정해야 한다.
셋째, 그 죄를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고백해야 한다. 마음으로만 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입술로 내 죄를 고백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죄인인 것과 내가 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죄를 고백할 때에 용서를 받을 수 있다.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넷째, 하나님께 죄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 내가 지은 죄를 입술로 고백한 후에는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내가 구할 때에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죄를 용서해주시지 않으면 나는 심판을 받아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진심으로 용서를 간구해야 한다.
다섯째,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즉 죄의 열매를 던져버리고 옛 생활에서 과감히 돌아서야 한다. 에스겔 9장에 보면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많은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이방여인과 결혼해서 사는 것을 보고 기가 막혀서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울며 기도했다. 이를 본 백성들이 다 나와서 
죄를 회개하고 즉시 이방 여인들과 헤어지고 그들 사이에서 난 자식들을 돌려보냈다. 

회개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또한 다시는 같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온 사람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지라”고 하셨다. 양심의 가책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물러가자 예수님은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다. 죽을 수밖에 없는 더러운 죄를 용서받았다면 이제는 다시는 같은 죄를 짓지 않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경이 여러 번 기록되어 있다. 이사야 1:18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이 약속을 믿고 죄를 회개하라.
지금 나에게는 어떤 죄가 있는가? 나도 모르게 죄를 짓거나 아니 알면서도 죄를 짓고 아직 회개하지 않은 것이 남아 있는가? 세상의 유혹에 빠져서 진리를 배반하고 말씀을 떠나고 성도답게 살지 못한 것이 있지 않은가? 지금 회개하라.

주님의 약속
“17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감추었던 만나”란 이스라엘이 광야 40년 동안 만나를 먹고 산 것을 기념하기 위해 금 항아리에 넣어서 법궤에 보관했던 것으로 장차 메시아에 의해서 메시아 왕국에서 공개되는 것이다. 이 만나는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생명의 양식을 말한다. 이는 진리이신 예수님,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가리키고 또 그 말씀을 의미한다. 믿음을 지키고 죄악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성도는 하늘의 양식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이시고 기르셔서 영혼이 잘되고 속사람이 강건하게 하신다. 

“새 이름을 기록한 흰 돌”이란 상급을 말한다. 이것은 당시 고대 그리스의 경기장에서 우승자의 이름을 흰 돌에 새겨서 주었던 것을 비유해서 하신 말씀이다. 이 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에베소서 2:20에 예수님을 “모퉁이돌”이라고 했고 베드로전서 2:3에는 예수님을 “산 돌”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세상의 유혹을 이기고 믿음을 지킨 자는 주님께서 그 이름을 기억해 주신다는 뜻이다. 

또한 이 돌은 구약에서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입는 에봇에 달린 보석에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이름을 새겨 넣은 것을 상징한다. 즉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승리한 성도들을 그 가슴흉패의 보석에 이름을 새겨 넣으시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데리고 들어가신다는 뜻이다. 

이처럼 핍박 중에도 순교의 각오를 가지고 믿음을 지키고 죄의 유혹을 이긴 사람들은 하늘의 양식으로 먹여주셔서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게 새 힘을 주신다. 또한 주님께서 그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시고 하늘의 상급으로 갚아주신다. 이 주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을 잘 지키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는 성도가 되자. 

교회는 거룩한 곳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이 교회의 모인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과 달라야 하고 깨끗하고 거룩해야 한다. 교회가 거룩하지 못하면 교회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죄의 유혹을 이기고 거룩하고 깨끗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또한 죄가 많은 곳이다. 죄인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이다.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모인 곳이지만 아직 믿음이 완전하지 못하고 죄의 습관을 다 벗어버리지 못하고 세상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죄인인 우리가 어떻게 거룩한 교회가 되게 할 수 있을까? 그 방법은 회개 밖에 없다. 구원받은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기를 힘쓰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지만 연약하고 부족해서 사탄과 세상의 유혹과 공격에 자주 넘어지고 죄를 짓곤 한다. 그럴 때마다 그 죄에 매여 있지 말고 즉시 하나님께 나아와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죄가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려 하자 베드로가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실 수는 없습니다”라고 했다. 예수님은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셨고 베드로는 “그렇다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씻어 달라”고 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목욕한 사람은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셨다. 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있다. 목욕한 사람도 발은 더러워질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즉시 발을 다시 씻어야 한다. 이처럼 이미 구원받은 우리도 세상을 살면서 죄에 빠질 때가 있다. 그때마다 즉시 죄를 회개해서 용서받아서 거룩함과 깨끗함을 지켜야 한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구원과 심판을 동시에 말씀하신다. “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주님은 우리들에게 십자가를 통해서 사랑을 보여주시고 구원과 은혜의 길을 열어주셨다. 그리고 죄인들에게 회개를 요구하시고 참고 기다리고 계신다. 그러나 주님께서 언제까지나 영원히 참으시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회개하라고 해도 회개하지 않으면 결국은 심판하신다. 그리고 한 번 심판하신 후에는 다시는 기회가 없다. 그러므로 지금 회개할 기회를 주실 때에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 위해서 죄를 이기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자. 혹 연약하여 실수하고 죄를 지었을 때라도 낙심하고 실망하거나 죄를 감추려 하지 말고 즉시 주님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여 용서를 받으라. 그래서 내 안에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에 죄가 남아 있지 않게 해야 한다. 더러운 죄가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게 하고 교회를 더럽히지 못하게 해야 한다. 

지난 7월 8일 주일저녁에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2007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가 열렸다. 이날 10만 명이 넘는 기독교인들이 모여서 100년 전에 한국교회에 부흥을 주신 것을 감사하고 다시 한 번 영적 부흥을 주시기를 기도했다. 이날 사랑의 교회 원로목사인 옥한흠 목사님이 “주여, 살려 주옵소서”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한국교회가 회개할 죄가 무엇인지를 낱낱이 지적했고 회개하라고 외쳤다. 그리고 설교 후에는 “하나님, 이놈이 죄인입니다”라고 눈물로 기도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을 세상에 보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기억할 것은 누가 뭐래도 교회가 이 민족의 희망이라는 사실이다. 지금의 교회의 모습이 온전하지 못해도 이 시대의 마지막 소망은 교회이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유일한 소망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달라져야 하고 바로 서야 한다. 그래서 교회의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고 이 민족과 이 시대를 살려야 한다. 교회가 돌이켜서 교회답게 되지 못하면 이 민족과 시대에 더 이상 소망이 없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가 80세 때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하나님 밖에는 두려워할 것이 없고 죄 밖에는 미워할 것이 없는 사람 100명만 주시오. 그들과 함께 이 썩어진 영국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사람들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죄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교회를 거룩하게 지키자. 그 거룩하고 능력 있는 믿음으로 이 민족과 세상을 구원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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