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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시당할 때 더욱 주를 바라보라 (행 25: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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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당할 때 더욱 주를 바라보라 (행 25:13~22)


수요일 저녁마다 진행되는 김명현교수의 창조 과학 특강이 대단한 인기가 있습니다., 저는 김명현교수의 강의를 들을 때마다 어릴 때 생각이 납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첫 생물 시간에 선생님이“아직도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말하는 돌대가리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이들이 다 저를 쳐다보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까지 기억나는 것을 보면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 후 초등학교 때 같이 교회 다니던 많은 친구들이 교회를 나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목사 아들이라 교회를 떠날 수가 없었지만, 하나님과 교회가 세상에서는 무시 당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30년이 지나서 그 때 교회를 떠났던 동창들을 만날 기회가 우연히 있었는데 한결같이 삶이 내적으로 무너진 상태에서 살고 있었습니다.‘그 때 교회를 떠나지 않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으면 인생이 달라졌을텐데.’하는 생각에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저는 오늘 성경 본문을 읽다가 중학교 1학년 생물 시간에 느꼈던 무시 당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유대 나라에 새 총독 베스도가 부임하였는데, 새 총독으로 유대인들과 좋은 관계를 갖고 싶었던 베스도에게 유대 지도자들이 한결같이 감옥에 갇힌 바울을 죽이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베스도는 유대인들과 관계를 좋게 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베스도가 바울을 조사를 해 보니 그렇게 하기가 어려운 문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로마법을 적용을 하려면 죽일 죄목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로마 법을 지켜야 하는 총독으로서 분명하게 죽일만한 죄목이 없는 사도 바울을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을 죽일 만한 아무 근거가 없었습니다. 그 나름대로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가 사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서 심문을 받겠느냐고 했더니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이 로마로 가서 가이사에게 재판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베스도는 사도 바울을 황제에게 보내 수 밖에 없었는데, 문제는 사도 바울의 죄목이었습니다. 이 문제 때문에 베스도가 고민을 하다가 유대 본봉왕인 아그립바 왕이 부임해서 예방차 가이사로 오게 되었을 때 그 고민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유대 왕 아그립바 왕을 만났을 때 베스도는 사도 바울의 재판 건에 대하여 의논하면서 협조를 요청합니다. 

그 때 베스도가 매우 중요한 언급을 합니다.
18~19절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한 마디로 베스도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죽여야 된다고 해서 ‘바울이 굉장히 흉악한 자구나.’ 생각하였는데, 막상 조사를 해보았더니 별것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듣고 보니까 아무 것도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사도 바울이 전하는 것 뿐이더라.  

저는 베스도의 이 말이 너무나 마음에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받았던 그 느낌을 받았습니다. 무시 당한다는 느낌을.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이 부활의 복음이 베스도가 생각하기에는 아무 것도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베스도는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부활의 복음을 듣고도 시시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종교 논쟁으로 치부한 것입니다. “ 나는 대단한 일인 줄 알았어요. 다 죽이라고 해서. 그런데 들어보니까 예수라는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말도 안되는 종교 논쟁 밖에 아니더라구요.” 이것이 베스도가 부활의 복음에 대한 반응이었고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부활의 복음에 대해서 보이는 반응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가 일제에서 해방되었을 때, 일본이 망했다. 우리나라가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 그래요?” 라는 사람이 누가 있었습니까? 믿어지지 않은 사람도 “정말이냐? 사실이냐?” 확인하고 또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한 인생이 정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 모든 인류가 부활하게 되는 이 놀라운 구원의 복음을 듣고도 베스도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것 이것이 충격입니다. 
베스도는 이 뿐만 아니고 나중에 사도 바울은 베스도에게서 미쳤다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아그립바 왕 앞에서 바울이 예수님의 부활과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증언하였을 때, 사도행전 26장 24절에 보니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벨릭스 총독 때는 2년 동안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있었고, 베스도 총독에게서는 철저히 무시 당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무시 당한 것이 아니라 부활의 복음 자체가 무시 당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당시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누구나 부활의 주님을 믿으면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세상이 바뀌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반응은 충격은 커녕 관심 조차 없습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부활절입니다. 예배당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현수막을 걸고 길거리마다 부활절 연합예배 광고판이 붙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부활절이 온 모양이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지, 어느 누구도 관심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절입니다.” 얘기하면 “아 그래요? 기독교의 명절이군요. 축하합니다.” 마음에는 전혀 믿지도 않고 관심도 없고 논쟁도 하려 하지 않습니다. “잘 해 보세요. 당신들이나 잘 믿으세요.” 이런 분위기입니다. 한편으로는 마음에 완전히 무시하고 또 조롱합니다. “부활이 있대. 예수님이 부활했대. 말도 안돼.”

하나님을 믿지 않고 부활의 복음을 무시하는 세상의 반응 앞에서 어떻게 우리의 신앙을 지킬 수 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무시해도 조롱해도 상관 없습니다. 왜?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분명히 만났는데, 조금도 위축될 것도 없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그저 듣기만 한 사람은 절대로 세상에서 담대하게 믿음을 고백하고 선포하고 나가지 못합니다.
 
여러분, 부활의 복음의 능력은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하는 사실을 아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데 있습니다. 
부활의 복음은 듣기만 해서는 아무런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에야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됩니다.  

베스도는 부활의 복음을 듣고 무시하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데 모든 것을 다 걸었습니다. 지금은 감옥에 갇혀 생명까지도 위태로운 지경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사도 바울은 어떻게 되었길래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로마서 1장 16절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외쳤습니다.

무슨 차이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만나지 못한 차이입니다. 
베드로에게 물어 봅시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던 당신이, 어떻게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도마에게 물어 봅시다. “당신은 그렇게 의심이 많았는데, 어떻게 충성스런 종이 되었으며, 순교자가 될 수 있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스데반 집사에게 물어 봅시다. “당신은 어떻게 돌에 맞으면서, 얼굴이 천사 같을 수 있었습니까?”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이 서서 내려다 보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한결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살인자 고재붕도, 무장 공비 김신조도, 중국대사였던 김하중 장로님도, 수많은 인기 연예인들도 그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인생이 완전히 바뀝니다. 세상이 어떻게 말해도, 무시하고 조롱해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 그리고 지금도 함께 계시는 예수님이 너무 분명하니까 흔들릴 이유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교회에 임하여 역사하십니다. 2천년 교회 역사가 그 증거입니다. 
초대 교회를 핍박했던 당시 통치자들은 기독교도 다른 종교들처럼 전도자를 잡아 가두고 죽이면 얼마 안가서 없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도들을 잡아 가두고 고문하고 죽여도 교회는 더 부흥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부흥과 전도의 역사가 사도들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친히 교회를 부흥시키시고 전도하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당시 권세자들은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때때로 몇몇 교회 지도자들을 보면 교회는 당장 무너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교회 안에 새 생명 구원의 역사는 계속되고, 기도도 계속되고, 새 부흥이 임합니다. 교회는 사람 지도자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사망 권세 이기신 능력의 예수님께서 교회를 지키시고 움직여 가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 반드시 교회를 통하여 영혼들을 구원하고 생명의 구원 방주로 삼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새 힘을 얻고 믿음을 지키고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무시하고 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부활을 사소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부활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살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싸움 하나 해결하지 못합니다. 부부싸움 뿐 아니라 교단 정치 싸움까지, 이게 뭡니까?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여 사실상 부활의 복음을 스스로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벨릭스 총독 때문에 억울하게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지냈고, 베스도 총독에게서는 무시를 당했습니다. 이와 같을 때, 사도 바울은 어떻게 이겼습니까? 항상 함께 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사십니까?” 나는 정말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인가? 여러분, 한 가지만 점검해 보면 됩니다. 나는 세상과 사람의 칭찬과 비난에 대해서 정말 자유해졌는가? 그것만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사람들의 칭찬을 많이 듣고 살았습니다. 그것은 제가 칭찬들을 만한 훌륭한 사람이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칭찬들을 일을 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십니까? 
저는 어려서부터 사람들의 평가에 목을 매고 살았습니다. 목사의 아들이기에 교인들 뿐 아니라 학교 선생님이나 이웃 사람들에게까지 칭찬 들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칭찬하는가 눈치만 밝아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칭찬할 일만 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범생이다, 착하다, 말 잘듣는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제가 담임목사가 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칭찬이 저를 힘들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듣는 것이 삶의 이유요 유일한 기쁨이었는데, 나는 칭찬받기 보다 칭찬해야 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담임목사가 되면 이제 누가 나를 칭찬해줍니까? 그 동안에는 항상 저보다도 위 어른이 계셨습니다. 전도사 때는 목사님이 계셨고, 부목사때는 담임목사님이 계셨고 젊은 목사 때는 연세 많으신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누가 나를 칭찬해 줍니까? 
담임목사가 되고도 얼마 동안 여전히 교인들에게, 주위 사람들에게 심지어 부목사 전도사들에게 까지 칭찬 듣기를 갈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칭찬이란 위의 권위자가 아래 권위자에게 해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반대가 되면 아부가 되기 쉽고 진위를 파악하기도 어렵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이 더 이상 저를 만족시키지 못하였습니다.
담임목사가 되고 이 변화를 적응하지 못할 때, 너무나 혼란스러웠습니다. 칭찬 받아야 사는데, 그래야 만족이 되는데 이제는 제가 칭찬해줘야 되는 위치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해결책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칭찬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듣게 되면서 더 이상 사람의 칭찬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의 칭찬만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칭찬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 전에도 알았지만 막연했습니다. 살아계신 주님 부활하신 주님, 지금도 함께 계시는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하나님의 칭찬, 예수님의 칭찬은 막연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실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칭찬에 목을 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고 나니까 사람의 칭찬이 아무 것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칭찬과 비교할 수 없는 진짜를 발견하고 나니까 더 이상 사람들의 칭찬에 목마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비난에 대하여도 자유해졌습니다. 

어려서부터 저를 가장 두렵게 한 것은 사람들의 비난이었습니다. 그것은 저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버님 목회에 심각한 피해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목사 아들이 잘못해서 아버님 목사님이 교회에서 좇겨났다는 이야기를 그리도 많이 해주는지.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욕먹는 일, 비난받을 일은 절대 안하는 원칙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니 욕먹을 일도 없고 야단 맞을 일도 없었지만 마음에는 항상 그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정의로운 결단을 해야 할 때도 침묵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말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그것이 바른 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가만히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습니다. 

제가 이따금 부교역자들에게 지나쳐 보일 만큼 화를 내고 조급해 하는 이유가 역시 비난 받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었습니다. 부목사님들이나 전도사님이 하는 일이 다 내 일인데, 다 잘하다가도 한두 가지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와 상관없는 교역자들에게는 관대하면서 우리 교회 부교역자들에게는 칭찬하기 보다 책망하는 일이 많은 것은 교인들로부터 책망받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이 문제도 주님을 바라보게 되면서 해결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은 모든 형편을 다 잘 아시기에 굳이 조급해 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옳다고 하시면 사람이 뭐라고 한들 상관이 없지요. 그때부터 제 마음에 용기가 생겼습니다. 주님은 잘했다고 하시는데 그러면 됐지. 또 부교역자들이 부족함을 받아주는 것도 마음이 많이 넓어졌습니다.
지금도 부족한 것이 많다고들 하겠지만 옛날하고는 비교할 수 없이 넓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경험한 하나님은 실수라든가 부족한 것에 대해서 까다로운 분이 아니셨습니다. 얼마든지 받아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제가 주님으로부터 용납받는 기쁨을 얻고 난 다음부터 부족한 사람들도 품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우리에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 분의 칭찬이 진정한 칭찬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사람의 칭찬과 비난은 얼마든지 극복이 됩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3장 7-9절 처럼 모든 유익하던 것을 배설물처럼 버릴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 안에서 발견되고자 하는 한 가지 소원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진짜를 발견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평가, 주님의 칭찬 그것 하나면 황홀했습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전에는 학위가 있어야 되고 돈이 있어야 되고 지위가 있어야 되고 신분이 높아야 됐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이 아무 상관이 없어졌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면 황홀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대상 금상 은상 동상이 있을 때, 대상을 받을 사람이 금상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금상 받으면 속상합니다. 금상 같은 것은 배설물처럼 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칭찬을 모르는 사람은 사람의 칭찬을 배설물처럼 버릴 수 없습니다. 항상 사람의 눈만 의식하고 삽니다. 그래서 결국은 주님이 이끄시는대로 못 가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의 평가가 더 중요하니까.

여러분, 아까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23절 이하 말씀을 보면 아그립바 왕과 바울이 등장합니다.
아그립바 왕은 왕 위에 합당한 격식을 차리고 등장합니다. 머리에 금으로 된 왕관을 쓰고 네 가지 색깔로 조화를 이룬 로얄 칼라의 의상을 입고 바울을 심문하러 나왔고 왕후격인 버니게는 5미터 이상 땅에 끌리는 긴 옷을 입고 베스도 총독은 로마 권위의 상징인 자색 망토를 입고 천부장들과 높은 사람을 모두 정열 시키고 그 중앙에 위엄을 갖추고 나왔습니다. 

이에 반해 사도 바울은 죄인의 신분으로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얼마나 대조가 되겠습니까?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느 쪽에 서고 싶습니까? 사람의 평가에 목을 매는 사람은 아그립바 왕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사도 바울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그립바 왕이 누구입니까? 로마 사람들이 유대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리기 위하여 세운 꼭두각시 왕이었습니다. 로마의 정책에 의해서 유대인들의 마음을 무마시키려고 그냥 형식적인 왕을 세워놓은 것입니다. 폼만 그럴듯하지 실제 권한은 총독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니 새로 부임한 총독에게 인사를 하려고 온 것입니다.
그 아내 버니게는 사연이 복잡한 여인입니다. 실제로는 아그립바 왕의 누나입니다. 상당히 부도덕한 여인이었습니다. 두 번이나 결혼에 실패한 여인이었는데 남매가 같이 산다고 주위에서 비난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왕권으로 누르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눈만 의식하는 자는 이렇습니다. 실상은 지옥에 갈 자인데, 왕관이 무슨 소용이며 왕복을 입은들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그립바 왕과 사도 바울 중 누가 존귀한 자입니까? 
여러분, 사람의 평가에 목을 맨 사람은 결코 하나님이 복주시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아그립바 왕과 베니게 총독 앞에서 죄인 신분이었던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행 26:29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당당했습니다. 부활하여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만 있을 수 있는 당당함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조롱하고 무시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부활하신 주님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세상에서 여러분이 어떻게 부활하신 주님을 신앙 고백하며 살아갑니까? 예수님을 만나면 됩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눈을 뜨시면 됩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어떤 사람의 평가에 매여 살게 됩니다. 
우리나라 최고 통치권자인 대통령에게도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국민 여론입니다. 아마 우리 대통령께서도 국민의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는가 매일 매일 노심초사하실 것입니다. 국민의 여론을 살피는 대통령, 좋은 대통령이지요. 이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은 국민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국민의 여론도 무시하는 악한 대통령도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국민들 여론만 살피는 대통령은 실패하게 됩니다. 국민들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은 아닌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국민의 여론이라는 것 하루에 열두 번도 바뀌는 것입니다. 
빌라도도 유대인들의 여론 때문에 예수님이 무죄한 것을 알면서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아브라함링컨이 흑인 노예를 해방시키려고 했을 때 다수 국민들이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노예를 해방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기에 끝까지 노예 해방을 이루어냈습니다. 비록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 당했지만 아브라함링컨 대통령은 미국을 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고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여론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했습니다. 자신이 대통령이 된 것이 그 일을 위함이라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칭찬과 비난만 의식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복음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지도 느끼지도 못할 때 가장 활발하게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요셉이 억울한 옥살이를 하지 않습니까? 감옥 속에서 2년 동안 이유 없이 기다렸습니다. 기다리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마침내 때가 되니까 애굽 총리로 삼아 주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어떻게 로마로 인도하셨습니까? 사도 바울은 2년 동안 옥살이 했습니다. 그리고 베스도에게 무시 당하고 그랬지만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그렇게 기도하던 로마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들어가는 하나님의 방법이 되었습니다. 죄인이 되어 재판받는 길을 통해서 인도하셨습니다. 죄인이 되어 재판 받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런 일입니까? 모욕과 멸시, 천대는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일입니까? 그러나 재판을 통해서 바울의 계획과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세상에서 우리의 믿음이 무시 당한다고 비난 받는다고 조급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길을 잃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됩니다.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을 만나주십니다. 어떻게 부활하신 주님을 내가 만날 수 있을까? 성경이 정확한 답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십
예수님을 바라보려면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을 붙잡아야 합니다. 십자가 복음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복음입니다. 나는 죽고가 분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이미 우리는 죽었다는 사실을 정말 믿으면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나와 함께 계신 것을 분명히 보여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고후 4:10~11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믿으면 반드시 부활의 주님을 역사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사람의 칭찬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고 더욱 살아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복 받는 길, 믿음의 길, 승리하는 길을 가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유가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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