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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이 있어야 기쁘시게 합니다 (합 2:1~4, 히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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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있어야 기쁘시게 합니다 (합 2:1~4, 히 11:6)


알렉산더 대왕이 지독한 병에 걸렸습니다. 의사들은 모두 고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못 고치면 화를 당할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의사가 자청하여 왕을 치료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 의사의 적들로부터 왕에게 모함하는 편지가 배달되었습니다. 그 의사가 적에게 매수당하여 왕을 죽이려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의사가 왕에게 약을 바치자 왕은 편지를 내 밀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의심 없이 그 약을 다 마셨습니다. 모함하는 편지를 본 의사는 떨고 있었는데 왕은 “나는 자네를 믿소”라고 하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왕은 그 의사의 치료로 얼마 후 쾌유하게 되었습니다. 왕의 의사에 대한 믿음이 없었으면 왕은 낫지 못했을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안전한 것입니다. 내가 낫는 것이며, 기쁨을 누리는 것이며, 평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 오해가 있습니다. 구약시대는 율법시대이고 율법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신약시대는 은혜시대이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자세히 보시면 구약도 믿음으로 구원받는 시대입니다. 율법으로는 어떤 사람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율법의 대명사인 모세도 율법적으로는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온전하심같이 온전하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처럼 온전한 자가 어디 있습니까? 창세기 6:8-9에는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야 의인이 되고 완전한 자가 됩니다. 또 창세기 15:6에는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합니다. 믿으니 의로 여기셨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예수님께 산에 올라가셔서 변화하신 다음에 산에서 내려오실 때 간질병 걸린 아들의 아버지가 아홉 제자가 고치지 못한 아들을 고쳐달라고 애원합니다. “할 수 있거든 내 아들을 고쳐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 때 아버지는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음을 용서하소서”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믿음을 보시고 아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믿나이다’ 이 한 말에 예수님의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아들을 낫게 하는 기적은 믿음에서 일어납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한 발 늦게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오라버니를 애도하는 마르다에게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1:25-26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하십니다. 믿음은 영생의 조건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기쁨의 조건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어야 기쁘시게 합니다. 

히브리서 11:6 상반절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것이 기쁘시게 하는 조건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모든 존재는 존재가치를 인정받으면 기쁜 법입니다. 세상의 가장 작은 미물이라도 존재가치가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것이 기쁜 일인데 하물며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큰 기쁨이겠습니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것을 유신논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은 우리에게는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떤 이는 자신이 본 것, 경험한 것만 믿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미국에 안 갔다 왔으면 미국이 있는 것도 못 믿을 것 아닙니까? 보이는 것만 믿는다면 고조부가 존재한 것을 어떻게 믿습니까? 내 존재의 원인은 보지 못해도 믿습니다. 고조부는 내 존재의 원인이니까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 존재의 원인인 하나님이 계시는데 하나님을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등 하나님이 계심을 증명하는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신명기 4:39에는 “너는 오늘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라고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다른 신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존재하십니다.  
  
니체는 ‘하나님은 죽었다’고 했습니다. 칼 마르크스는 ‘하나님은 없다’고 했습니다. 실존철학자 샤르트르는 ‘하나님은 부재중’이라고 했습니다. 옛 소련의 우주인 라렌드는 ‘망원경으로 우주 공간을 샅샅이 살폈으나 하나님은 없다’고 했습니다. 유리 가가린을 기억하십니까?

1961년 4월 12일 보스토크 1호를 타고 1시간 29분 만에 지구 상공을 일주하여 인류최초의 우주비행에 성공한 우주비행사입니다. “이곳에 어떤 신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최근 ‘월드 메거진’에서는 역사적 기록을 바로잡기 위해 놀라운 기사가 실렸습니다. ‘유리 가가린은 무신론자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공군 아카데미 교수인 페트로프는 가가린이 러시아 정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교회의 강한 영향력으로 믿음의 뿌리를 가진 신앙인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가가린의 무신론적 말은 구소련의 서기장이었던 니키타 후르시초프에 의해 조작됐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래 전 아버지 조시 부시 대통령이 부통령 시절 크게 감동을 받았던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소련의 서기장이었던 브레즈네프가 세상을 떠나 미국의 특사로 장례식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런데 브레즈네프의 아내가 남편의 시체에 십자가 성호를 그었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못합니다. 유물론이니 무신론이니 외치지만 인류의 본능 속에 있는 유신론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폴란드에 있는 옛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는 어느 유대인 청년이 쓴 글귀가 벽에 씌어져 있다고 합니다. “지금 밝은 빛을 볼 수 없지만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는다. 지금 느끼지 못하지만 나는 사랑이 있음을 믿는다. 지금 보이지는 않지만 나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다”.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가장 든든한 힘입니다. 모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 같이 믿었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느 무신론자가 종교인에게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대보시오. 그러면 나도 기꺼이 신을 믿겠소”라고 했습니다. 이 종교인은 “성경은 읽어보셨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아니요.” “그럼 불경은요?” “아니요.” “그럼 철학자나 현인의 글은요?” “아니오”. 그 때 종교인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무신론자가 아니요. 무식한 사람일뿐이오”. 무신론은 무식입니다. 
  
하박국의 시대의 사회적 불신과 부정은 끝이 없었습니다. 믿는 자가 어려워지고, 착한 자가 손해를 보았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 질문이 많았습니다. “왜 악인이 잘됩니까?” “왜 악한 사람을 통해 선한 사람이 박해를 받습니까?” 그 때 2:4에는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여 그 곳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하는 대답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믿음으로 살게 하십니다. 믿음으로 살면 그것이 승리의 삶입니다. 믿음으로 살면 그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지난 주간 서울 시내버스에 반기독교 광고가 등장했다 나흘 만에 사라졌습니다.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이라는 단체가 “나는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한다는 신을 상상할 수 없다”라는 아인슈타인의 글을 붙였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무식한 것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일은 더욱 불쌍한 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계심 믿으면 내가 행복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기쁘시게 합니다.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상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상주시는 이심을 믿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귀한 것도 아깝지 않게 줍니다. 미운 사람은 아무리 작은 것도 주기가 아깝습니다. 
  
하나님은 상주시기를 기뻐하시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큰 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로마서 8:32에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고 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은 우리에게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일입니다. 아들을 주시는데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아들을 주셨다면 다른 어떤 것도 주실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6:38에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시되 후히 주시고, 누르고 흔들어 주시고, 넘치도록 주시고, 안겨 주십니다. 말라기 3:10에는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주시되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십니다. 마태복음 7:7에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주실 준비가 단단히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에는 주신다는 말씀이 수없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강조한 로랜스 형제는 “성경이 끊임없이 가르치고 있는 사실은 하나님의 팔은 결코 짧아지지 않는 다는 점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긴 팔로 우리에게 안겨 주시고, 부어 주시고, 넘치게 주십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상급은 바로 하나님 자신뿐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고귀한 선물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시고, 자신을 주셔서 믿으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빌립보서 3:14에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힘차게 달려 갈 수 있는 것은 부름의 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상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달려갑니다. 프랑수아 바리용은 “하나님의 정의에 비치는 보상 없이 회복이란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보상하시며 풍성을 상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얼마 전 성서신학원 졸업식이 있었습니다. 졸업생이 몇 명 안 되는 졸업식입니다. 그런데 저도 이사장이 되어 참석하여 설교도 했는데 졸업생 전원에게 상을 주었습니다. 상의  이름도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의 상도 있었습니다. 우리교회 금년도 제직 간친회 때도 보니 경품에 뽑혀 상을 받게 되니 다 큰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별 것 아니지만 상을 받으면 어른이나 아이나 다 좋아합니다. 저도 올해는 제 번호를 부르지 않아 아무 것도 받지 못했는데 안 뽑히면 저도 섭섭해요. 
  
졸업시즌을 맞았습니다. 요즘은 이색 졸업식이 많습니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졸업식 광경도 있지만 사각모를 쓴 중학교 졸업식도 있고, 세족식을 한 초등학교 졸업식도 있습니다. 어느 학교는 학생이 선생님에게 상을 준 졸업식도 있었습니다. 학생들에게 준 상도 아주 별난 상이 있습니다. 골룸 흉내를 잘 내 급우들을 기쁘게 한 ‘골룸상’이 있습니다. 처음보다 대인관계가 많이 좋아져서 받은 눈치코치상이 있습니다. 어른들의 세계를 일찍 경험하여 고생을 하였다고 주는 산전수전상도 있습니다. 늘 히죽이죽 잘 웃는다고 ‘히죽이상’이 있습니다. 늘 투덜대기를 좋아한다고 하여 ‘투덜이상’이 있습니다. 몸이 아파서 조퇴하고 집으로 간 날이 많은데 내년에는 건강을 기대하며 ‘집으로상’도 있습니다. 모든 상을 다 좋은 것이며 기념이 될 만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시면 일곱 교회에 주시는 상이 있습니다. 상은 이기는 자에 대한 보상입니다.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생명의 관을 주리라고 하십니다.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흰 돌에 새 이름을 새겨주시겠다고 합니다.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겠다고 합니다. 흰옷을 입게 하겠고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지 않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10:42에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작은 선행도 잊지 않고 상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마 이런 사람에게 주는 상의 이름은 ‘냉수 한 그릇 상’일지 모릅니다. 사실은 작은 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큰상입니다. 
  
야구의 철인이라 불리는 칼 립켄 주니어라는 선수가 있습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볼티모어 오리올즈의 선수인데 2,632게임을 쉬지 않고 연속으로 출장했습니다. 연속 출장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우선 실력이 있어야 계속 출장할 수 있고, 둘째는 다치지 않고 건강해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이런 선수는 타율이 높은 선수나 홈런을 많이 친 선수보다 더 존경을 받습니다. 칼의 성장 원인으로 한 우물을 판 단순성에 있다고 합니다. 동네의 다른 아이들이 모든 스포츠에 만능이 되려 할 때에 칼은 야구에만 매달렸습니다. 상을 받기 위해서는 한 하나님만을 믿어야 합니다. 한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됩니다. 
  
제이 리노라는 야간 토크쇼의 진행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한 애기에 보면 아내 셋을 거느린 남자를 다룬 드라마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에 대한 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건 바로 고약한 장모를 셋이나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상 같은 벌이 있습니다. 벌 같은 상도 있습니다. 

  
결론 

미국 나이아가라폭포에서 1859년 줄타기 횡단을 한 찰스 브론딘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이 곡예사가 많은 구경꾼들 앞에서 한 사람을 등에 업고 건넜습니다. 모든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그가 건널 수 있었던 열쇠는 신뢰 즉 믿음입니다. 등에 엎여 있던 사람이 브론딘을 믿지 못했다면 절대로 줄타기 곡예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믿는 까닭은 신뢰 호르몬인 ‘옥시토신’ 때문이라고 합니다. 실험하는 중에 어떤 사람의 코에 신뢰 호르몬을 뿌렸더니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두 배로 증가하더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기 얼굴을 닮은 사람에게 신뢰감이 크고, 자신과 전혀 안 닮은 이성에게 매력을 느낀다고 합니다. 
  
신뢰 호르몬도 어느 정도 효과는 있겠지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옥시토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기쁨을 누리려고 나를 창조하셨습니다. 이사야 43:7에는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나로 말미암아 기쁨을 누립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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