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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덩이에서 입술을 깨물다. (창 37:2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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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덩이에서 입술을 깨물다. (창 37:29~36)

(29절) 루우벤이 돌아와 구덩이에 이르러 본즉 거기 요셉이 없는지라 옷을 찟고
(30절) 아우들에게로 되돌아와서 이르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까
(31절) 그들이 요샙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32절)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
         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
(33절)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
(34절)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35절)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36절) 그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

제자훈련을 받는 형제들이 지난 주 일본으로 졸업선교여행을 갔었는데, 도쿄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으로부터 우에노(上野)공원 일본인 노숙자들을 대상으로 노방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당연히 응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계획된 일정을 취소하고, 다함께 우에노공원으로 갔습니다. 이 공원은 대단히 인기 있는 관광지이자 휴양지여서 그런지 많은 노숙자들이 거처(居處)하고 있었습니다. 질서정연하게 앉아있는 500여명의 노숙자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초청을 했는데 가슴에 손을 얹은 자들이 많아 ‘일어서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단 두 사람만이 일어섰습니다. 일본에서 두 사람은 엄청난 숫자여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더 가슴 뭉클한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배식(配食)을 하는데 새치기하는 사람 없이 순서를 기다리며 음식을 받아갑니다. 바나나를 두 개 가져가라고 해도 하나만 가져갑니다. 그날, 저들에게서 자존심을 보았습니다. 비록 처량한 신세로 전락해있을지라도 저들은 결코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때 내 안 깊은 곳에서 이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에게는 저런 영적 자존심이 있는가?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신부(新婦),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의 자긍심이 너에겐 있는가? 비록 지금 가난, 헐벗음, 실직, 파산, 빚더미, 배신, 건강문제, 가정문제, 그래서 시련과 고난의 구덩이에 던져져 있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켜야 할 마지노선, 영적 자긍심, 그걸 지키고 있는가?’

요셉, 그가 지금 처한 환경을 성경은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구덩이’에 던져졌다고 하였습니다(창 37:24). ‘구덩이’란 단어만큼 그가 처한 상황을 실감 있게 표현한 단어도 없을 것입니다. 이 ‘구덩이’란 단어가 무려 일곱 번이나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형언할 수 없는 캄캄함 속에 던져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당한 고난을 ‘구덩이 고난’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요셉의 ‘구덩이 고난’은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았기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만약 아버지가 그를 보내지 않았거나 그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더라면, 순종을 해도 적당히 순종했더라면 ‘구덩이 고난’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요셉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봅니다.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 스스로 오셨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요 8:42, 20:21).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십니다(빌 2:6). 그러므로 얼마든지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을 자유가 있으셨고, 권세도 있으셨습니다(요 10:18). 그러나 주님은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길 원하셨고,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말씀에 철저하게, 온전히 순종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결과 시기, 미움, 질투를 받아 결국은 십자가에서 죽임까지 당하는 ‘구덩이 고난’에 던져지셨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아무런 잘못 없는 그를 시기하여 구덩이에 던졌습니다. 그를 그냥 구덩이에 던지는 것이 아니라 ‘죽여’ 구덩이에 던지려고 했습니다(창 37:20). 그런데 여기서 르우벤이 나서서 요셉을 도우려했습니다. 그가 요셉을 구원하려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과연 그가 장남이었기 때문에, 아니면 본처 소생이었기 때문에 그랬을까요? 본처 소생이라면, 다른 형제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는 설득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그의 죄의식에서 찾아야 합니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는 더럽고 추악한 죄를 저지른 사람이었습니다(창 35:22). 

이는 죽임 받아 마땅한 죄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잘못도 없는 요셉이 죽게 된다는 사실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입니다. 여기에서 요셉을 놓고 두 부류가 나눠집니다. 하나는 그를 구덩이에 던져 넣고, 즐기는 부류입니다. 이들은 요셉을 구덩이에 던지고는 앉아서 음식을 먹기까지 했습니다(창 37:25). 얼마나 파렴치한 자들입니까! 마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놓고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던 자들의 모습이 연상됩니다(요 19:23-24). 또 하나는 그를 불쌍히 여기며, 도와주려는 부류입니다. 르우벤은 죄 없는 요셉의 고통 앞에서 자신의 추악한 죄악을 떠올리며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요셉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는 자기 옷을 찢고, 어찌할 줄 모릅니다(창 37:29-30).

이제 구덩이에 던져진 요셉을 주목해 봅시다. 그가 순종하다가 구덩이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참으로 애매하게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입술에서 한 마디의 외침도 없습니다. 애원하는 소리조차 없습니다. 그 어떤 부르짖음, 억울함에 대한 호소, 저주, 원망, 절규의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그는 지금 잠잠합니다. 분명 그는 그 캄캄하고 깊은 구덩이에서 입술을 깨물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지난날 요셉은 체질상 하고픈 말을 속에 담아두고는 하루도 못 견디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쳤고(창 37:2), 오죽했으면 그를 사랑했던 아버지조차도 꿈 이야기하는 그를 야단치지 않았습니까?(창 37:10) 그런데 이제는 아닙니다. 그렇게 쉽게 입을 열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깊은 구덩이에서 입술을 깨물고 있습니다. 구덩이 속에서의 그의 모습! 긴 여운을 남깁니다. 우에노공원의 노숙자들이 남긴 여운과 비교가 되지 않는 그 무엇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신부(新婦), 하나님나라 백성이 어떤 태도를 취하여야 할 것인지, 구덩이 속의 요셉에게서 배웁니다. 꿈을 가진 자, 그 꿈이 정녕 이루어지길 원하는 자가 가져야할 자세가 어떤 것인지, 구덩이에서 입술을 깨물고 있는 요셉을 보면서 배웁니다. 세상에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꿈이 있습니까? 정녕 꿈이 이루어지길 원하십니까? 꿈은 구덩이 고난을 요구합니다. 구덩이 고난을 통과하지 않는 한 꿈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꿈은 대가(代價)를 요구합니다. 내가 던져진 환경이 설령 구덩이일지라도 그 현장에서 입술을 굳게 깨무십시오. 지금 이 구덩이가 꿈이 이루어져가는 과정임을 잊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십시오(시 37:7). 시편 37편을 수없이, 반복하여 묵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입술을 굳게 깨물고 있는 자의 가슴에 간직한 꿈을 이루어 가십니다. 땅을 차지하게 하십니다. 땅을 차지한다는 말은 꿈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구덩이에 던져졌습니까? 입술을 깨물기만 하면 ‘칠년풍년’ 그때부터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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