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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은 자여 일깨어라 (계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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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여 일깨어라 (계 3:1~6)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들 중에 오늘은 네번째 사데 교회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듣기로 합니다.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사데는 서머나 동쪽 80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입니다.    험준한 산을 배경으로 난공불락의 천연적인 요새지에 BC 1200년 경에 세워진 도시였다고 합니다.   부유한 상업도시로 직물과 귀금속의 생산지로 유명하며 사금이 생산되었고 인류 최초로 금화를 만들어낸 곳으로 알려질만큼 재정적으로 부유한 지역이었습니다.   천연적인 요새지에 세운 도시였지만 역사상 두 차례 외적의 침입으로 함락 당하는 아픈 역사가 있습니다.    BC 6세기와 BC 3세기에 각각 싸이러스 2세 (Cyrus II)와 안티오쿠스 3세(Antiocus III)에 의해 침공을 받았을 때 파숫군이 졸다가 적이 성벽을 타고 넘어오는 것을 알리지 못하여 크게 약탈을 당한 뼈아픈 경험을 가진 도시였습니다. 

역사가의 말에 의하면, 오늘날 사데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인상적인 로마 시대 유적들은 AD 17년에 발생한 비극적인 지진이 있은 후에 재건축된 것이라고 합니다.   티베리우스(Tiberius) 황제가 이 도시의 재건에 큰 협력을 하였는데 사도 요한의 시대에 시민들이 사용하던 공공 건축물들 중에 극장, 경기장, 대리석으로 된 도로와 다양한 신전들이 그때 세워진 것들이라고 합니다.   아시아 지역의 다산과 풍요의 여신 ‘아데미 신전’이 바로 거기에 있었으며 이 도시에서 부도덕한 제사의식이 거행되었고 연일 음악과 축제가 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환경 가운데 세워진 사데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일곱이 완전 수를 상징하는 것처럼 일곱 영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아시고 만물 가운데 충만하신 하나님의 영으로 소개됩니다.   그리고 일곱 별은 1장 20절에서 이미 말씀하신 것처럼 일곱 교회의 사자들이라 하셨으니 모든 교회들의 사자들을 손에 잡고 일하시는 교회의 주인으로 묘사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아시는 그리스도께서 사데 교회를 향해 입을 여시는 첫 말씀이 ‘내가 너의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는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 였습니다.   

다른 교회에 말씀하실 때는 내가 너의 좋은 점을 안다 하시고 먼저 좋은 점을 언급하신 다음에 책망도 겸하셨는데 사데 교회는 시작부터 ‘내가 너의 행위를 다 안다.  네가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착각하지 말라는 책망부터 하십니다.     상업이 발달하여 경제적으로 여유있고 각종 문화시설이 들어선 사데에 있는 교회 역시 같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화려한 교회 건물이 등장하였고 성도들의 숫자가 늘어났으며 교회 재정도 넉넉하였으니 많은 사업들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교회를 향한 주님의 평가는 냉정합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지만 죽은 자로다.’   

주님은 사데 교회의 죽은 현실을 다 보고 알고 계시는데 자신들은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에는 나의 믿음이 살았다고 자신하였는데 주님이 보실 때 너의 믿음은 죽은 것이다 하신다면 그 믿음은 모양만 가진 형식적인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는 주님과 함께 고난의 길에도 동행하고 죽음의 길도 피하지 않으리라는 마음으로 삽니다.    죽으나 사나 오직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기를 원한다는 고백으로 삽니다.    

그러나 형식적 신앙은 환경과 형편과 나의 편리를 따라 타협하며 주님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갑니다.    필요할 때는 바짝 다가서지만 손해가 있을 것 같으면 금방 뒤로 빠져 멀찍이 따라가며 분위기를 살피는 현실적인 타입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을 합니다만 듣기 좋으라고 하는 고백이며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고백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예민한 감각이 아직 살아있어 재미있고 나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라면 재빨리 다가서고 참여하지만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는 무감각하여 아직 죽은 자처럼 무반응 상태에 있는 형식상 그리스도인입니다.   

물론 세례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세례 받을 때 했던 서약과 고백은 철저한 자기 부정과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보다는 체면과 분위기에 이끌린 약속이었기에 삶의 현장에서는 그 능력이 턱없이 연약합니다.   세상이 손짓하고 부르면 언제라도 세상을 향해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 세례교인입니다.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교회를 아주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명목상 교회의 구성원으로 남아 이중생활을 합니다.   이제까지 시간을 들이고 헌금을 하고 나름대로 힘써 봉사를 하며 다져온 삶의 패턴을 하루 아침에 내팽기치고 떠나기는 아쉽고 그동안 공들인 것이 아깝기도 하여 그냥 교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그나마 애매모호한 신앙을 버리고 떠나려니 왠지 찜찜하고 누군가 뒷머리를 잡아당기는 것 같은 불안감이 있어 어정쩡한 상태로 교회에 남아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생활을 합니다.   주일이 되면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에 참석하며 기도회와 각종 봉사활동에도 참석합니다.  그러므로 나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내세웁니다.    이것이 살았으나 죽은 모습입니다.    옛사람의 성향을 벗어 던지지 못하고 그대로 끌어안고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확신이 없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도 문제이지만,  구원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았다는 착각 속에 사는 사람이 더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받았지만 스스로 확신이 없이 연약한 상태로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구원의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언제인가 어느 기회를 통해 그 구원을 이루시지만 가짜 확신으로 사는 사람은 진짜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끝이 나고 말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 그 사람의 구원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이마에 ‘구원’ 이라는 도장을 찍어주시는 것도 아니고 멋있게 만들어진 구원 확인증을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께서 아시는 일이니 사람으로서는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기준을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구원 받은 성도는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내가 죄 사함을 받았음을 믿고 감사함으로 살아갑니다.   구원 받은 성도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구원 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여전히 옛 사람의 성품이 습관처럼 튀어나올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직 완성되지 못했지만 날마다 자신을 쳐서 육신의 욕심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며 점점 앞으로 나아가는 신앙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에게서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여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착각하는 구원의 확신은 자신이 모든 면에 완성된 사람인양 말하고 행동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발을 빼고야 맙니다.   그의 입으로는 멋진 신앙고백과 간증이 나오는데 그의 삶을 보면 과연 그가 말하는 신앙고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속뜻을 알 수 없을만큼 전혀 성도다운 거룩함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의 세례나 봉사나 종교활동은 아무리 오랜 세월 동안 쌓여왔고 또 그 업적이 많을지라도 사실은 죽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가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고백은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 것이요, 그렇게 하는 것이 인생의 참된 가치임을 인정한다’ 하는 고백도 함께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받기를 원하고 언약 공동체인 교회에 속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성도들 앞에서 이 사실을 진실하게 고백하고 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마음에 새기며 하나님께 택함 받고 구원받은 자녀다운 삶을 살기 위하여 힘쓰게 됩니다.   세상이 주는 속된 즐거움과 미혹에 맞서 깨어있는 믿음으로 신앙을 힘써 지키며 성도다운 기품을 잃지 않는 사람이 살아있는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교회에는 이런 사람들이 날마다 더 많아져야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든든히 서있어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 세워가며 연약한 사람들을 잡아주고 끌어주는 책임을 감당합니다.   ‘네가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사실은 죽었다’는 책망을 들은 사데 교회는 불행하게도 이렇게 깨어있는 성도가 적었습니다.   반대로 형식적인 신앙고백과 눈에 보이는 종교활동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름 값을 잘해야 합니다.   성도 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영광스런 이름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름에 걸맞는 삶이 있습니까?   깊은 잠에 빠져 있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죽은 자처럼 살고있지 않습니까?   자던 자리에서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 믿는 대통령, 예수 믿는 장관과 국회의원... 그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진다 해도 예수 믿는 사람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면 살았지만 죽은 이름들입니다.     그 이름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비웃음과 치욕을 당하는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사데 교회를 향해 일깨어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고 하십니다.    ‘일깨어 그 남은 바를 굳게하라’ 는 명령은 옛날 사데의 파숫군들이 졸며 자다가 무방비 상태에 외적의 침략을 받고 비참하게 무너진 역사적 배경을 상기시키시는 말씀입니다.   영적 깊은 잠에 빠져있는 사데 교회 교인들이 그 잠으로부터 깨어나라고 하시는 경고말씀입니다.   어서 속히 일깨어 그나마 남아 있는 것, 죽어가는 그것을 굳게 하라.   하나님 앞에서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다.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처음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을 때 감격했고 가슴뛰었던 순수한 신앙과 그 고백을 기억하고 그 약속을 굳게 지켜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 적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거의 죽게된 것을 굳게 지키어 더 이상 빼앗기지 말라.   죄악의 포로가 되어 더 이상 수치를 당하지 말라고 흔들어 깨우고 계십니다.    다른 교회들을 향하여 회개를 촉구하시는 주님은 사데 교회에게도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지금이라도 깨어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라.   너희가 죽은 자처럼 누워있을 때 내가 도적같이 너에게 임하여 심판하리라’ 하십니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몇 명이 있으니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십니다.  모두 죽은 자리에 그래도 그 이름이 살아있는 몇 사람은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흰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다닐 것입니다.   그들은 부르심에 합당한 성도들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험하고 세상살이가 고될지라도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고 성도로서의 품위를 든든히 지키는 사람들이 그 옷을 더럽히지 않는 남은 자입니다.   

계시록 7장에 흰 옷을 입은 무리들이 등장합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계7:9, 10)  여기 나오는 무리들은 온갖 환란과 핍박 속에서도 그 믿음을 끝까지 지키고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입니다.   이 흰 옷을 입은 자들이 누구며 어디서 왔느냐 물을 때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7:14하)는 주님의 대답입니다.    사데 교회에 남은 자들도 여기에 나오는 흰 옷을 입은 무리 속에 포함이 됩니다.  

남은 자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구원의 역사 속에서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가는 희망이며 그루터기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적은 무리’와 같은 맥락입니다.   ‘너희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약속하십니다(눅12:31, 32).   주께서 말씀하신 적은 무리는 세상의 가치를 따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기준과 명령을 우선으로 따르는 사람들, 그것이 힘들고 고통이 따르며 손해와 비웃음이 있을지라도 끝까지 따르는 성도들입니다.   

죽어가는 사데 교회 안에 이런 무리들이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거룩한 성도의 행실과 믿음을 세상의 죄와 썩어질 가치관에 더럽히지 않고 깨끗하게 보존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따르고 주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무리들이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남은 자들입니다.    이 남은 자들에게 약속하십니다.    ‘이기는 자는 흰 옷을 입을 것이요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흐리지 아니하고 내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마태복음 10장에,  ‘나를 인하여 임금들이나 총독들 앞에 끌려가기도 하고,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지만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이때 하신 약속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마10:32, 33) 입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흰 옷 입은 성도들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옷을 더럽힌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심판장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주여, 내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였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습니까’ 항변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내가 너를 도무지 모르겠다 불법을 행한 사람들아 내게서 떠나라’ (마7:21-23) 하시리니 얼마나 당황스런 일입니까?    이런 사람들이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지만 사실은 죽은 자들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였지만 주의 이름을 빙자하여 불법을 행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안다.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다’ 하십니다.  

이 말씀을 오늘날의 모습으로 바꾸어 말해볼까요?   강단에서 설교도 잘하고, 기도도 잘하며,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 남보다 열심히 봉사합니다.    전도와 선교와 구제사업, 사회봉사에 남다른 열심이 있어 둘째 가라면 섭섭합니다.    성공한 삶을 간증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유명한 초청 강사가 되어 국내는 물론 해외로 바쁘게 다니기도 합니다.   신유의 은사, 방언의 은사, 귀신을 쫓아내는 은사 등 남들에게 없는 화려한 은사로 능력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심판장이신 주께서 그를 외면하십니다.   ‘나는 네가 누구인지 도무지 모른다.   네가 내 이름을 이용하여 너의 이름 알리고 다녔지 내 이름 높였느냐?    네가 내 이름 팔아 너의 몸값 올리며 가는 곳마다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고 사치하며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살았지 언제 나를 높인 적이 있느냐?   네가 한 모든 일들이 불법이었느니라’  책망하십니다.   

모든 교회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시는 마지막 말씀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하십니다.    어린 양 그리스도의 피로 그 옷을 깨끗하게 씻음 받은 성도들이 교회의 희망입니다.    우리 교회는 어떤 상태입니까?    교우 여러분은 어떤 상태입니까?    이 시대의 남은 자들로 타락한 세상은 물론 타락한 교회를 날마다 새롭게 하는 일군이 되어 생명력 있게 섬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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