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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서는 왜 부담스러운 결단을 요구하실까? (행 24: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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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왜 부담스러운 결단을 요구하실까? (행 24:24~27)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

모든 성도들이 은혜 받기를 사모하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 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 자리에도 계실 것입니다. 또 성령이라는 것을 받을까봐 오히려 걱정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한번은 캐나다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었는데, 교인들 중에 꼭 참석하였으면 하는 이들이 부흥회에 참석하지 않아서 담임 목사님 내외가 안타까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석하시면 다 은혜를 받을텐데 왜 안 나오실까? 전화로 부흥회에 참석하라는 권면을 했더니 그 교인들이 부흥회에 안 나오시는 이유가 은혜를 받을까봐 안 나오신다는 것입니다.“갑자기 너무 열심히 믿으면 탈난다.”고 했답니다. 믿음이 천천히 자라야 한다고, 은혜가 많다니까 더 안 나오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은혜받을까봐 걱정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남편 전도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던 여 집사님, 드디어 남편이 교회에 나오게 되었는데, 열심이 도무지 생기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방을 꼭 와주셔서 남편이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도록 목사님이 권면을 해주시기를 원해서 심방을 갔습니다. 그런데 갔다가 남편분에게서 오히려 아내 걱정하는 말을 잔뜩 들었습니다. 아내가 너무 지나치게 교회에 빠지지 않도록 목사님이 잘 지도를 해주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 걱정이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도 요즘에 교회가 너무 나를 지나치게 들볶는다고 하시는 분이 혹 계실 것입니다. 무슨 새벽기도 용사입니까? 무슨 애들입니까? 또 그것도 500명이라고 지정을 해서 하느냐? 499명이면 무슨 문제가 됩니까? 501명이면 무슨 잔치를 할 것입니까? 유치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전도하라, 무슨 제자 훈련하라, 속회 참석하라, 속장하라. 감당을 못하겠다고 하여튼 왜 그렇게 부담스럽게 하느냐고 좀 내버려 둬달라고 하시는 분들이 이 자리에도 있으실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라고 권면 받으면 “날 좀 내 버려둬요!” “왜 부담스럽게 하십니까? 너무 재촉하니 마음이 더 열리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왜 교회가 나를 못 살게 구는가?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데 왜 더 하라고 하나?’ 이런 마음 때문에 불편하신 분들, 은혜 받을까봐 걱정이 되시는 분들은 오늘 마음을 열고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답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부담스러워할 만큼 우리를 몰아가십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자꾸만 더 나아가라고 하시는 하나님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정말 겁이 날 정도입니다.
여호수아는 죽기 전에 유언하기를 “너희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하였습니다. 이미 다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인데 여호수아가 무엇을 또 오늘 섬길 자를 택하라고 하는지. 그렇게 여호수아가 간절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섬길 자를 택하라고 권합니다. 그 말을 여호수아 눈에 보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생활이 문제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과 장로들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아 시대에 오면 그 마저도 안됩니다.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갈멜산에서 영적으로 싸울 때, 구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였는데 백성들이 어떻게 한 줄 아십니까?“백성이 말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하였습니다. 참 답답하지요.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기에는‘하나님이 너무 재촉한다, 너무 우리를 강압적으로 몰아부친다.’그런 느낌이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도 한 제자가 아버지 장례를 치른 후에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였을 때,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잠이 와서 고꾸라지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하시며 기도를 시키셨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이렇게 부담스런 결단으로 몰아가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정말 너무 힘들다.’ 이런 말이 툭 튀어나올 만큼 하나님은 우리를 아주 부담스럽게 우리를 몰아가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는데, 그 이유를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괴롭히려고 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지나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너무 지나치게 육신적인 사람으로 기울어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에 매어 살아가는 그런 형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몰아가시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3절에 보면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려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끌려 살면 반드시 죽겠기에 우리가 성령으로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재촉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서 우리가 진짜 생명을 얻고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이끌어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육신에 매어 사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마음에 너무 부담되는 말씀이라고 여겨지는 말씀이 있다면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은 맞는데 너무 부담이 돼요. 하나님이 왜 꼭 이렇게 살라고 하시는가?’ 이런 생각이 든다면 이유는 하나님이 지나치신 것이 아니고, 내가 너무 육신에 매어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꼭 명심해야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새벽기도 500 용사를 모집한다고 등록해 달라고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평생 내가 새벽기도 하겠습니다.” 오직 기도, 이렇게 여러분에게 결단하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극단이 아닙니다. 그래야 겨우 기도 좀 합니다. 워낙 우리가 기도 안하고 사는 체질입니다. 안 그렇다고 할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가 워낙 기도 안하고 사는 체질이라 오직 기도, 새벽기도는 반드시 해야 돼. 나 새벽기도 500용사에 가입할 거야. 이렇게 나가는 사람이 지나고 보면 겨우 기도를 좀 합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화요전도 꼭 나와야 돼. 나 반드시 꼭 갈 거야. 새벽 전도, 나 반드시 가. 나 전도 잘 못하니까 전도학교 가서 훈련 받아야지.‘ 이런 분들이 겨우 전도 좀 합니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너 전도했느냐? 저 했습니다. 이렇게 나와요. 그렇지 않은 분들은 결국 전도 안하고 삽니다. 워낙 우리가 안 전도 체질이라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직 전도,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사랑만 하며 살리라! 사랑으로 소문난 교회! 왜 이렇게 하는 것이지요? 그래야 우리가 겨우 좀 사랑하게 됩니다. 워낙 우리가 사랑 안하는 체질이라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복음이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아 추구, 자기 만족에 끌려 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워낙 육신에 매어 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힘들고 부담스럽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분별을 정확하게 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담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무 육신에 매어 살았구나.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벨릭스 총독이 사도 바울의 전도를 받는 장면입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기도하였겠으며 전심으로 증거하였겠습니까?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까?

벨렉스 총독은 노예 출신으로 총독까지 된 사람으로 돈과 권력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역사가에 의하면 그는 유대인들이 존경하는 랍비들과 제사장들을 무자비하게 죽였습니다. 그는 잔인한 정치를 했던 사람입니다. 아내 드루실라는 헤롯 왕의 딸로서 팔레스타인 북방 하마드의 왕 아지투스의 아내였는데, 아주 미인이라 벨릭스가 그녀를 보는 순간 탐을 내어 빼았었습니다. 이 때 벨릭스의 나이는 60세였고, 드루실라는 18세였습니다. 그런 사람이니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을 죽이려고 유대법과 로마법에 정통한 변사 더둘로를 대동하면서까지 벨릭스 총독에게 재판을 요청하였을 때, 유대인들 편에 서서 바울을 죽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자기가 어느 쪽으로 판결을 해야 정치적으로 유익하다는 계산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벨릭스는 바울의 편을 들어줍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을 죽이지 않게 하고 오히려 사도 바울의 전도를 듣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벨릭스의 본 마음이 아니라 그 말입니다. 더욱이 바울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를 줄 것과 친구 중 아무나 수종을 들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바울을 로마까지 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벨릭스는 그 후 그의 아내 드루실라와 함께 사도 바울의 전도를 받았습니다. 성경은 벨릭스가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26절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이 말은 벨릭스가 은혜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잔인하고 돈과 권력 밖에 모르던 벨릭스가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두려웠습니다. 찔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벨릭스는 갑자기 자신의 죄악이 깨달아졌고 하나님의 심판이 느껴졌던 것입니다. 평생 잔인하고, 탐욕스럽고, 절제하지 못하는 인생을 살아온 벨릭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을 기회,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 갈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벨릭스같은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여기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벨릭스는 어떻게 했습니까?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이제 그만해라 나중에 다시 듣겠다.' 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쉬운 순간입니까? 너무 안타까운 순간입니다. 벨릭스가 왜 그랬을까요? 너무 부담이 되고 사도 바울이 전해주는 복음이두려워서 그랬습니다. 복음인데 왜 두렵습니까? 육신에 사로 잡혀 살기에 복음이 두려운 것입니다. 육신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에게는 복음이 오히려 두렵습니다 뭔가 마음에 강하게 도전해 오기는 하지만 기쁨이 아니고 두려움으로 반응이 오는 것입니다. 

벨릭스는 바울의 전도를 듣는 중에 무엇인가 결단해야 할 부담을 느꼈습니다. 그냥 듣고만 있을 수가 없는 말씀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야, 이러다가 내가 그동안에 쌓아놓았던 모든 지위, 모든 재산이 한 순간에 다 사라질 것 같은 위기감도 느꼈습니다. 자기의 삶 전체가 뒤바뀌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두려웠습니다. 바울의 말대로 하다가는 자신이 이룬 삶,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다 잃을 것 같았습니다. 그는 지금까지의 삶을 포기하기 싫었습니다.그래서 벨릭스가 “그만 해, 내가 다음에 들을께.”하며 사도 바울을 가게 했습니다. 

그때 벨릭스에게서 구원이 떠난 것입니다. 거의 구원받을 뻔했다가 구원이 떠난 것입니다. 벨릭스는 사도 바울의 말이 너무 부담스러웠습니다. ‘내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사실 여러분, 그것이 부담스러운 것입니까? 하나님이 벨릭스를 구원하려고 한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벨릭스가 왜 그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지지요? 너무 자기가 육신에 사로잡혀 살았기 때문입니다. 
벨릭스가 육신에 사로 잡혀 있었던 증거가 구원과 멸망의 그 절박한 순간, 지옥에 가느냐 천국에 가느냐 하는 그 절대절명의 순간에 벨릭스는 돈 받을 생각을 하였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것 밖에는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풀어주든 사람을 죽이든 돈 받고 재판하던 사람입니다. 지금도 그런 사람 많습니다. 그 다음에 여러 번 불러서 사도 바울의 말을 듣습니다.  

26절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그러나 이미 돈 욕심에 사로잡히니 아무리 복음을 많이 들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돈 받을 생각부터 하고 있으니까 더 이상 복음이 복음으로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계산도 하였습니다.

27절 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이미 사도 바울이 죽일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도 사도 바울을 그냥 풀어주면 유대인들의 반발이 너무 심할 것 같으니까. 정치적인 계산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영생을 얻느냐 지옥에 가느냐 하는 이 순간에도 정치적인 계산을 따라 행동을 합니다. 
하나님이 지나치신 것입니까? 벨릭스가 지나친 것입니까? 

벨릭스가 지나치게 육신에 매어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살리는 구원의 말씀조차도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기가막힌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지금 사는 말씀이 오히려 나를 부담스럽게 하는 것처럼 느껴지니. 그런데 이것이 현실인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구원 초청을 부담스러워 하고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살았던 벨릭스는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로마 황제에 의하여 본국으로 소환되고 나중에 극형을 선고 받았으나 겨우 목숨만 살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영혼도 육신도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벨릭스가 구원받을 기회를 주셨지 않아요? 그런데 그것을 거절하고 돈, 세상 지위를 붙잡으려고 했던 결국이 이것 밖에 안되지 않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자의 실상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전도를 듣고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도 참 안타깝지요. 그러나 거의 구원받을 뻔 했었으나 마지막 결단하지 못하여 버림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이었습니다. 이 부자 청년이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고 영생에 대한 사모함도 있어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을 너무 사랑스러워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가진 재산을 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지나친 말씀입니까, 사랑하셔서 하신 말씀입니까? 여러분 중에도 ‘지나치지.’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은 다시 잘 들으셔야 됩니다. 
마 19: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님께서 이 청년에게 전 재산을 다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그 청년을 부담스럽게 하신 것입니까? 사랑하셔서 하신 말씀입니까? 사랑하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영생 천국을 다 아시는 예수님께는 세상 재물이 무엇이 큰 문제이겠습니까? 그것 다 나누어 주고 영생 얻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예수님을 영생을 다 보고 계십니다. 그 영생을 이 청년이 갈급하니까 그 영생을 주시려고.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사실 세상 재산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중요했다면 예수님이 재산을 어떻게해서든지 모으셨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상 재산 가난한 사람에게 다 나누어주고 그러면 하늘에서 상급이 더 커지니까. 그리고 너는 나를 따르라. 사랑하신 것이지 않아요? 부자 청년이 너무 사랑스러우니까 진짜를 주시려고 그가 정말 얻기를 원하는 그것을 얻게 해주시려고 사랑으로 권면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 청년에게는 그 말씀이 도무지 순종할 수 없는 부담스러운 말씀으로 느껴졌습니다. ‘아니 세상에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어? 이 많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다 나누어주고 예수님을 따르다니! 누가 도대체 그렇게 할 수가 있겠어?’ 그러고는 떠나갔습니다. 자, 이 부자 청년이 왜 영생을 얻지 못했을까요? 하나님이 너무 지나친 요구를 하셨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이 부자 청년이 돈 욕심에 완전히 매어있었기 때문일까요? 돈 욕심에 완전히 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지나친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지금 우리보다도 먼저 예수 잘 믿다가 천국에 간 증인들이 지금도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아시지요? 히브리서 12장 1절 말씀에 허다히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 분들이 우리에게 뭐라고 그러실까요? 그분들도 똑같이 말할 것입니다. “너 가진 것 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너 주의 제자의 길을 가라.”

여러분이 죽어서 천국에 갔다면 후배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진짜를 알고 난 다음에 아무 것도 아니게 될 세상 것을 위해서 정신없이 사는 사람을 보고 안타까워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부담이 아니고 사랑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에게는 죽었다 다시 깨어나도 못할 것 같이 부담스러웠습니다. 그것이 이 청년이 재물에 매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벨릭스만 아니라 이 청년도 육신에 매여 있었기에 영생의 길이 부담스럽게 여겨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벨릭스에게 말한 복음은 벨릭스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말입니다.그런데 벨릭스는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가 너무너무 부담스럽게 느껴지니 하나님이 지나치신 것이 아니고 벨릭스가 완전히 육신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을 때만 아니고,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사는 삶 속에서도 똑같습니다. 왜 예수를 믿고도 예수님의 역사를 놀랍게 경험하고 살지 못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는 했습니다. 교회는 다닙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다 마음에 부담스럽기만 합니다. 기도하라 전도하라 봉사하라는 것을 귀찮게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수 믿어도 편안하게 못해 주나?’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 정상이 아닙니다. 내가 육신적인 것에 매어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살리는 말씀 구원할 말씀 복받을 말씀이 다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3장 12-14절에 보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고 맹세한 40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에 비하면 벨릭스는 사도 바울을 도와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같습니다. 다 같이 지옥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왜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과의 동행하는 놀라운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부담된다. 힘들다 하며 머뭇 머뭇거리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도들도 하나님은 자신의 좋은 것을 빼앗아 가는 하나님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겠느냐고 물으면 두려움부터 앞섭니다. 하나님은 엄하시고,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가져 가시려고 하시고, 감당하기 너무나 힘든 사명을 주시려는 분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벨릭스 총독과 같은 마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시키실 일이 뻔해. 가진 것 다 내놔라. 그리고 북한에 가서 죽어라. 중동에 가서 죽어라. 아니면 고생 고생하든지. 뻔해.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대로 했다가는 뻔해.’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실제로 많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것 까지만 하고.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믿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JOY선교회 겨울 수양회 때, 많은 대학생들이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온전히 헌신하겠다는 결단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된 초청을 듣고도 깊이 고뇌할 뿐 결단하지 못하는 청년들도 있었습니다. 한 자매가 울면서 상담을 해왔습니다, “목사님, 하나님께서 제게 외무고시를 보지 말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요?”그래서“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더냐?”고 물었더니,“그러지는 않았지만, 만약에 그러신다면 어떻게 하느냐고요?”했습니다. 

저는 그 자매 안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불신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매를 위하여 기도할 때,“하나님, 이 자매에게 하나님께서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이신지, 얼마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신지 알게 해주세요.”하고 기도했습니다. 그 자매는 펑펑 울었습니다. 그 다음 시간에 그 자매는 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의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달라지니까 아무 문제가 안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정말 믿어지면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됩니까? 그것이 왜 두렵습니까?

성경을 펼쳐 보십시오. 성경은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으로 반응한 사람들의 기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75세라는 고령의 나이로, 목적지도 없이 이삿짐을 싸는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비라고는 본 적도 없었지만 산 위에 배를 짓는 노아를 생각해 보십시오. 돌맹이 몇 개만 들고서, 3m에 육박하는 거인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을 생각해 보십시오. 죽임 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왕 앞에 나서는 에스더 왕후, 보잘 것없는 300명 병력으로 미디안 대군과 전쟁을 치르러 나가는 기드온의 기분은 어땠을까요? 

우리는 이런 ‘믿음의 영웅 이야기’를 듣고 은혜를 받습니다. 왜? 내 문제는 아니니까. 나보고 300명 데리고 미디안과 싸우라고 하면 못 가지요. 그런데 기드온은 갔어요. 그러니까 은혜가 돼요. 나보고 일흔다섯에 짐꾸러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나라고 하면 못 가지요. 어느 아파트 몇동 몇호 가르쳐 주어야 가지. 그런데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듣고는 은혜를 받습니다. 방주 지은 노아, 은혜가 되지요. 왜? 내 문제는 아니니까.  ‘남의’ 이야기이고 결말을 이미 다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만약 이것이 ‘내’ 이야기이고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떨까? 그런데도 여전히 그 이야기를 좋아할 수 있을까? 우리는 “힘들어요. 부담되요. 너무 몰아치지 마세요.” 할 것입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 내 안에 계시고 역사하시는 것을 놀랍게 경험하지 못합니까? 주님이의 말씀을 들을 때 “부담 돼요. 힘들어요. 못해요.” 이렇게만 하지, 그것이 왜 그렇게 느껴지는지를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만 너무 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현실을 모르셔. 어떻게 말씀대로만 살아?’ 이러고만 사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 하나님의 말씀이 부담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매주 목요일 새벽에 ‘믿음으로 사는 남자들의 기도모임’이 있습니다. 이 모임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지 그 유래를 잠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2001년 제가 섬기던 교회 남선교회에서 해마다 하는 헌신 예배를 드리겠다고 회장 장로님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름만 헌신 예배가 아닌 남선교회 회원들이 이제부터는 직장에서나 사업을 할 때나 하나님 말씀대로만 살겠습니다 라는 서약서를 쓰고 올해는 한번 제대로 된 헌신 예배를 드립시다. 했더니 의논해 보고 오겠다고 가셨는데, 며칠 후 헌신 예배를 안 하기로 결정했다는 통보가 왔습니다. 너무너무 겁이 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직장 생활도 하고 사업을 할 자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한다고 쓰고 서약까지 한다는 것은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벌을 주신다는 뜻인데, 도무지 그렇게 못하겠다고. 남선교회 회원들이 헌신 예배 드리는 것을 다 겁을 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헌신 예배를 못 했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이 믿음의 삶이 얼마나 우리에게 힘든 일처럼 느껴지는가. 사실 그것은 우리를 살리는 길이고 복받는 길인데도, 왜 우리에게는 그렇게 망하는 길, 죽으라는 것처럼 들릴까? 우리가 정말 믿음의 훈련이 없었구나 그래서 그때부터 헌신 예배는 하지 못하더라도 우리 매주 한번 남자 성도들끼리 모여서 믿음으로 사는 훈련을 합시다. 그렇게 시작이 된 것이 믿음으로 사는 남자들 모임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하나님을 믿고 섬겼지만 아내도 변화시키지 못하고 소금 기둥으로 만들고 딸도 변화시키지 못하고 사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부끄러운 구원, 나 혼자만 간신히 구원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성경에 보면 소극적인 태도에 대하여 심각한 경고가 나옵니다. 신앙 생활을 미지근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성경은 말해줍니다.
 계 3:14~16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여러분, 신앙 생활을 미지근하게 하는 것이 점점점 우리의 신앙 생활을 가라앉히는 것입니다. 도무지 감격스러운 사건이 없습니다. ‘왜 내 신앙 생활에는 아무 감동이 없고 간증이 없는가?’ 미지근하게 신앙 생활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머뭇거리는 것은 성령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습니다. 핍박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영원한 심판이 꼭 핍박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순종하는 자에게도 있습니다. 탕자는 깡패나 방탕자만 아닙니다. 존경받는 자 중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부담스러울 때, 그 만큼 나 자신이 육신에 매여 있다는 증거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 교역자 퇴수회를 갑니다. 퇴수회 하면서 같이 읽기로 작정한 책이 한권 있었습니다. 아르헨티나 예수전도단 YWAM DTS 강사 알레한드로로드리게스 목사님이 쓰신 [한계 너머에서 만난 하나님]입니다. 여기에 우리나라와 월드컵에서 맞붙게 될 아르헨티나 축구 대표팀의 감독인 마라도나에 대한 일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마라도나라는 사람은 세계적인 축구 선수로 아르헨티나에서는 국보급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은퇴 후 그는 마약에 손대기 시작했고, 결국 심각한 중독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수술이 실패해서 회복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었습니다.

마라도나의 회복을 바라는 수많은 아르헨티나인이 그가 입원한 병원 앞에 장사진을 쳤습니다. 얼마나 많은 인파가 몰렸든지 경찰까지 출동, CNN까지 나와서 현장 상황을 중계했습니다. 그 때 근처에 있던 YWAM 베이스에서 DTS 훈련이 진행 중이었는데, DTS 중보기도 팀에게 주님이 모든 DTS 학생들과 스텝들이 마라도나가 입원한 병원을 찾아가 기도하라는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정말 ‘뚱단지’ 같은 소리였습니다. ‘수많은 인파와 경찰관, 방송국 취재진으로 득시글대는 저곳으로 가서 기도하라고? 

성령님은 계속해서 병원을 찾아가라고 우리를 재촉하셨지만, 우리는 정해진 일정과 프로그램을 변경하는 것에 난감해 했습니다. 안 그래도 빡빡한 일정을 진행해야 하는 판국에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을 시키시다니 불평이 생겼습니다. ‘수많은 인파와 경찰관, 방송국 취재진으로 득시글대는 저곳으로 가서 기도하라고?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바라볼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으시는군.’ 이렇게 투덜대는데, 주님은 한걸음 더 나아가 마라도나를 찾아갈 때 입어야 할 복장을 자세히 알려 주셨습니다. “DTS 학생 모두 축구 선수 복장을 하되, 전 세계 유명 축구팀의 유니폼을 하나씩 입어라." 

결국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 세계 유명 축구팀의 유니폼을 입은 DTS 학생과 간사들은, 5m가 넘는 십자가에 “마라도나씨, 힘내세요! 우리는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라는 말을 적고는, 마라도나가 입원한 병원으로 행진했습니다. 경찰들이 친 바리케이드 앞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두 손을 들어 마라도나를 축복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전 세계로 생중계되는 여러 대의 카메라가 일제히 그들을 향했습니다. “당신들은 뭐하는 사람들입니까? 왜 여기에 왔습니까? 기도하는 걸 보니 크리스천인 것 같은데 어느 교회에서 왔습니까?" 

DTS 학생들은 취재진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마라도나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할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시장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알레한드로목사님, 마라도나가 입원한 병원 원장이 지금 목사님을 꼭 뵙고 싶어 합니다." 병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병원 원장과 주치의, 심리치료사를 만났는데, 심리치료사는 나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이렇게 물었습니다. “제발 설명 좀 해주세요. 저번에 병원 앞에서 마라도나를 위해 기도했던 그 ‘이상한’ 사람들과 당신은 무슨 관계입니까?" 그 치료사는 감격에 찬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해냈는지 아십니까? 

주치의가 말했습니다. “저분 말씀이 TV에서 여러분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의사인 저는 마라도나의 회복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기도한 다음부터 상태가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기적이에요!" 마라도나의 주치의는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목사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제발 마라도나를 살려 주세요. 이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로부터 22일 동안 날마다 병원에서 마라도나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처음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못하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시체였습니다. 그런데 매일 마라도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안수하며, 죽음의 영을 대적하고 기도하고 그를 치유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드디어 마라도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서 기도할 정도로 기력을 회복했고 알레한드로목사님은 그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전 아르헨티나에 증거되었습니다. 
병원에서 나올 때 알레한드로목사님은 담대하게 방송 카메라를 향해 말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현재 마라도나의 상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마라도나를 기적처럼 회생시키셨습니다." 그는 지금 월드컵 대회의 축구 대표팀 감독이 되어 있습니다.
순종이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내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때때로는 너무 부담스럽고 너무 귀찮고 너무 쓸데없는 일 같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힘들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너무 육신에 매어살기에 내 생각 내 뜻 내 판단대로만 살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내가 놓지려고 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됩니다.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께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 혹시 마음에 여전히 하나님의 뜻이 부담스러우십니까? 주님의 말씀이 힘들게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왜 이러시는가?’ 하지 말고 내가 너무 육신에 매어있구나, 하나님의 말씀이 꿀송이처럼 달아야 할텐데 주님의 말씀이 시온의 대로처럼 느껴져야 될텐데 왜 나는 이렇게 힘들게 느껴지는가? 주여, 제 마음과 생각을 바로 고쳐주시옵소서. 은혜가 은혜되게 하시고 복이 복으로 느껴지게 하시고 살 길이 대로처럼 보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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